하나님의 안식( 카타파우시스 κατάπαυσις)에의 참예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히3~4장) 어릴 적 유월이면 시골에서는 논에서 호미로 벼사이 논바닥을 긁어 김을 매는 시기다. 땡볕에 엎디어 일한 일꾼들이 점심 때가 되면 밥을 한 그릇씩 고봉으로 먹고 큰 팽나무 그늘에 멍석을 깔고 배꼽 내놓고 늘어지게 한숨잔다. 얼굴에 파리가 앉아 놀던 개미가 귓구멍을 파먹든 상관 없이 꿀잠을 잔다. 이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안식인지 모른다. 그런데 성서에는 우리의 이러한 안식의 원형이 따로 있고 다만 우리는 원형의 모형이나 그림자를 부분적으로만 경험할 뿐이라고 말한다. 오늘은 이러한 안식의 새로운 신약적 해석을 히3장~4장을 통해 살피고자한다. 성서에서 안식(安息 샤바트 שָׁבַת)이라는 용어가 처음 창2:2의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샤바트 שָׁבַת)하시니라"는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 이 샤바트가 제7일 안식(히 4:4) 즉 안식의 원형인 하나님의 안식이다. 샤바트( שָׁבַת)는 구약에서 멈추다, 내려놓다, 쉬다 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 말이다. 우리 말로는 주로 '안식(安息)'이라고 번역해 사용하고 있는데 이 문장에서는 특히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고 완성한 후의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데 사용하고 있다. 그 어떤 상태를 다만 용어의 쓰임에 따라 쉼, 멈춤, 내려놓음으로 말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을 경험하지 않고는 사변적으로 하나님의 안식은 이것이다 라고 규정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다. 그렇게 샤바트( שָׁבַת)를 성서 용례의 문맥에서 보면 하나님의 안식은 그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과 영원하며 완전하고 거룩한 지복의 상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창2:3) 그럼 안식의 원형인 하나님의 안식과 우리들의 안식과는 어떻게 다를까? 첫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이 피곤해서 쉴리는 없기 때문에 우리가 노동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쉼은 아닐 것이다. 둘째는 창조사역이 일회적 사건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은 인간의 휴식처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의 안식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우리는 몸과 마음이 같이 쉬어야 되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의 쉼이다. 네째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시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은 완전하나 우리의 안식은 불완전하다. 하나님의 안식이 창조사역을 마치고 완성한 후의 단순한 쉼이 아니고 영적인 영원하며 완전한 쉼이라면 그 상태는 창조 이전의 텅 비어 함이 없는 무위(無爲)의 평화와 자유와 거룩한 지복의 상태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되어 소외된 이후로 우리에게는 안식의 원형인 하나님의 안식이 없기 때문에 성서에서는 안식하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 오고 참예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고 참예하는 것이 곧 영원한 궁극의 구원이다. 그 참예함은 하나님의 근저에 다달아 경험하는 무위 열반(無爲 涅槃)혹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던 일체의 일이 멈춰지는 적멸(寂滅), 탐진치(탐욕(貪慾), 진애(嗔恚), 우치(愚癡)) 3毒이 비워진 상태로 비유할 수 있겠다. 이러한 하나님의 안식을 불완전 하나마 부분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한 모형이 두가지가 있다. 그 첫째 모형은 모세시대에 이르러 출20:8의 제4계명 "안식일(욤 샤바트 ( שָׁבַת יוֹם)"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에서 " 안식일 로 나타나는데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모세의 시내산 안식모형이다. 그러나 시내산 안식 모형 속에 하나님의 안식을 숨겨 뒀지만 출애굽 1세대가 불순종하고 완악함으로 광야에서 모두 엎드려져 하나님의 안식을 발견하지도 들어 가지도 못하고 가난안 땅에도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한다. (히 3:11, 3:19) 둘째 모형은 안식의 궁극적인 원형인 제7일 안식(창2:2 히4:4)의 모형인 가나안 안식모형인데 여호수아의 인도에 따라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2세대들도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긴 갔으나 하나님께서 노하여 하나님의 안식에는 들어가지 못했다(히3:11)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안식을 모형에 담아 부분적으로 경험하게 했지만 그들의 믿음 없음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모세와 여호수아시대 이후로 신약시대에 이르기 까지 샤바트( שָׁבַת )라는 안식일이 엿새 동안 하던 일을 멈추는 것으로 구체화되고 정착되면서 안식일의 주체가 하나님이며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곧 주체인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기억하며 관계를 회복하는 종교적 의례로 정착되였다. 안식일은 날짜만 다를 뿐 아브라한 종교 모두에서 지킨다. 이스라엘 민족이 2천 여년간 디아스포라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도 그 정체성을 잃지 않은 것을 두고 19세기의 랍비인 하하드 하암은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켰다기보다는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다"고 말했다. 그들은 안식일 계명을 지키기 위해 미쉬나에 별도로 안식일에 금하는 일들을 세세하게 정해 놓고 철저히 지켰다. 이렇게 안식일을 지키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안식의 원형이 가지는 의미는 사라지고 일상의 멈춤이라는 율법화 된 형식만 중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신약시대로 넘어 오면서 그 현상 중의 하나로 나타 나는 사건이 막2:23- 28과 눅6:1~11에서의 밀밭 사건이다. 성서에는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라 비벼 먹었는데 이를 본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금한 일을 한다고 항의 하자 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께서는 두가지의 경천동지할 말씀을 하신다. 그 첫번째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요 둘째는 우리를 형제요 친구인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선포다. 지금 까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사람이 있는 것처럼 안식일을 지키기에 급급하고 고통 당했는데 이제 사람 중심으로 주객이 바뀌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고통으로 부터의 해방을 선언한 것이다. 구약의 곳곳에 ' '여호와 하나님의 안식일'이라는 표현으로 하나님이 안식일의 주인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우리의 친구요 형제인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고 보란듯이 안식일에 바리새인들의 본거지인 회당안에 들어가 한손 마른자를 고쳐주심으로 자신이 생명을 살리는 안식일의 주인임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안식 혁명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안식일을 구약의 샤바트(שָׁבַת)를 음역하여 그리스어인 삽바톤 (σάββασιν)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시해야 할 것은 '안식일'은 고유명사로 음역을 한 반면에 '안식'은 샤바트를 음역하지 않고 아나파우오(αναπαυω)와 카타파우시스(κατάπαυσις)로 구분하여 기록한다. 아나파우오(αναπαυω)는 우리들의 안식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는 말씀에서 '쉬게'를 아나파우오(αναπαυω)로 기록하여 우리의 쉼을 나타낸다. 안식의 원형인 하나님의 안식인 카타파우시스(κατάπαυσις)는 히 4:1~11에서만 무려 11회 기록한다. 여기서 번역문제를 잠깐 짚고 넘어가자. 원문에 보면 하나님의 안식을 카타파우시스(κατάπαυσις)의 대격인 카타파우신(κατάπαυσιν)으로 기록하여 하나님의 '안식'으로 번역해야 되는데 공동번역이나 현대인의 성경은 '안식처'로 번역하여 '안식'이라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공간'의 이동으로 죽어서 들어가는 안식장소라는 개념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우리는 이미 가나안땅 하나님 나라에서 들어와 산다. 이제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상태에 들어 가기만 하면된다. go to bed가 아니라 go to sleep만 하면 되듯이 하나님의 안식 상태에 들어 가기만 하면 된다. 해석이 잘못되면 본래의 뜻을 왜곡한다. 여기에서 신약시대로 넘어오면서 예수님의 안식혁명 이후 안식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가 희망적이고 새롭게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두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실패했는데 아직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히4:9 )는 것이며 더욱 고무적인 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히4:10) 어떻게?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안식에 참예한 자가 된다( 히3:14의 )는 것이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인도는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궁극의 구원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안식일의 주인이며 순종의 아들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안식에 참예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 가는 때를 죽음 이후로 좁게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성서에서는 '오늘' 즉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안식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메르코스 μέτοχος) 할 수 있다는 것이다.(현대인의 히4:7)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안식에 참예할 수 있는가? 그 첫째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것이다.(히 3:14a) 여기서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은 무엇일까? '시작할 때'는 아르케(ἀρχή)로 창조의 태초며 신의 근저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난 때를 말한다. 그 때 확신한 것은 무엇인가? '확신한 것'은 그리스어로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며 고고학적 발굴 문서들 중 이집트의 모래 아래에서 발굴된 문서들로 소유권 권리증서, 사업 거래 계약서, 계약서들(covenants) 등 제1세기에 사용된 법적 문서들이 있었는데 이들 문서들 표제에 사용된 단어가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였다. 곧 '확신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 또는 하나님과의 '계약'인 것이다. 히브리서에 기록된 그 언약은 그리스도와 나는 한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형제 라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신의 성품을 담은 신적 존재라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가 안식의 주인으로 하나님의 안식처로 인도하여 함께 하나님의 영원하고 거룩하며 지복이 충만한 평화와 자유의 안식에 참예한다는 것이다. 이 '확신한 것'을 흔들리지 않고 붙들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안식에 참예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가?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함께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텅 비운 것 처럼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을 텅비워 초탈해야만 한다. 뫔을 초탈하여 오로지 신의 성품만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안식에 참예한다. 코로나와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안식의 부재는 또 하나의 커다란 위험이 되고 있다. 출애굽 세대들이 완악한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에는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우리들 또한 안식의 그림자만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 볼 일이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안식에 참예할 수 있다고 했는데도 살면서 한번도 하나님의 안식에 참예할 수 없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이제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의 때가 남아 있다는 소망이 있으니 그림자와 같은 안식을 밟거나 안식일을 지키는 모양을 버리고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안식에 참예해 보자. 먼저 멈춰보자. 몸과 마음이 하던 모든 일을 멈춰보자. 그런 다음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 척추를 곧추 세우고 앉아 보자. 짧은 시간에 머리 끝에서 손 끝 발 끝 까지 이완시켜 몸을 텅 비우자. 이제 몸은 텅 비워지고 의식이 성성해 진다. 의식이 성성함을 유지하면서 모든 감각과 생각과 감정을 비우기 위해 숨이 드나드는 코의 인중에 의식을 집중한다. 들이 쉬며 '그리스도와 함께' 내 쉬며 ' 안식에 참예합니다' 를 속으로 기도한다. 몽롱해 지거나 집중이 잘 안되면 열번씩 수를 세어 소리를 내어 기도한다. 이제 탐진치로 물든 에고가 사라지고 점점 나를 텅 비워 그리스도 안에서 내 영혼의 근저에 가 닿는다. 그 곳에서 내 영혼의 근저가 아버지 영혼의 근저에 가 닿는다. 그 자리가 아버지께서 창조를 다 이루시고 영원하며 고요한 안식에 든 자리다. 곧 아버지께서 초청하신 안식처다. 이렇게 깨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연습을 하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든 안식의 터가 흔들리지 않고 자유와 평화 그리고 거룩한 지복을 충만히 누릴 것이다. 사막의 교부들이 또 많은 영적 스승들이 이를 증명한다. 지금 여기에서 처음 시작할 때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의 원형인 궁극의 구원, 영원하고 평화로우며 자유와 거룩한 지복이 충만한 하나님의 안식에 참예 해보지 않겠는가? '아! 좋다! 고요하고 평안하다! ' 이 생각마저 사라진다. 無爲 • 寂滅 2021. 5. 9 평화 호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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