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 대제사장'의 재해석
[히브리서 7장]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원히 사시는 분이시므로 제사장직을 영원토록 맡아 보십니다(히7:24) 위의 텍스트를 보면 '예수 =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갈릴리 나사렛 예수를 제사장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고있다. 해석에는 항상 기표와 기의 사이에 필연적으로 차연(差延, Différance)이 존재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서를 그대로 보지 않고 왜 해석해야 되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얻는 모든 정보는 뇌가 해석한 표상일 뿐 물자체가 아니듯 성서를 보는 자체가 문자적 해석이든 알레고리적 해석이든 방법에 차이만 있을 뿐 성서에 대한 해석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히브리서 7장에서 이 해석으로 인한 차연의 문제는 당시 유대 기독교인들이 아론의 반차 즉 레위지파 중심으로 제사장직이 세습되어 왔는데 예수는 레위지파가 아니라 유다지파에 속하기 때문에 '예수' = '제사장'의 해석을 받아 들이는데 심각한 문제의식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데 있다. 그런 이유로 히브리서 기자는 아론 훨씬 이전에 하나님으로 부터 직접 위임 받아 세습되지 않은 살렘왕이면서 제사장인 멜기세덱(창14:18)을 끌어와 예수께서 멜기세덱 반차의 제사장임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다고 차연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의식이 완전히 해소 될 수는 없다. 이 외에도 성서에서는 '예수 = 어린양' 또는 '예수 = 속죄 제물'이라고 유다 전통의 제의적 모형으로 갈릴리 나사렛 예수를 해석하여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그 모두를 포함하여 신약성서 전체는 '예수 = 그리스도'라는 케리그마적 해석을 한다. 그렇다면 제사장, 어린양, 속죄 제물이라는 의미는 갈릴리 나사렛 예수와 어느 정도 일치할까? 일부분은 일치 하겠지만 본래 의미하는 갈릴리 나사렛 예수라는 실체와는 차연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신약성서라는 기표는 갈릴리 나사렛 예수에 대한 당시 믿음 공동체들이 어느 정도 공통되는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한 텍스트다. 따라서 신약성서는 갈릴리 나사렛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로 해석하는 텍스트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히브리서 7장에서와 같이 갈릴리 나사렛 예수 = 대제사장의 해석을 어떻게 하면 차연을 최소화 하여 재해석할 것인가? '예수'가 '그리스도'로 살았던 시대, 그 공간 안에서, 특정 언어로 기록된 텍스트의 맥락 안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볼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이 경우 어떻게 시간의 간격과 공간의 거리와 언어의 차이 특히 번역의 문제에서 비롯된 차연을 최소화 할 수 있을까?의 문제는 성서 해석의 더욱 근본적인 문제다. 1세기에 기록한 성서가 인간 '예수'와 같이 살면서 경험한 성서의 기자들의 '예수 그리스도' 에 대한 해석인데도 불구하고 기자들과 기자들이 속한 공동체의 관점에 따라 차연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데 이 시대에 사는 우리가 그 성서를 재해석할 때 어떻게 차연을 최소화 할 것인가의 문제와 마주치게 된다. 오늘의 본문 히브리서 7장의 '예수' = '멜기세덱 반차의 대제사장'이라는 해석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표해 다함이 없는 생명에서 흘러 나오는 힘으로 대제사장이 되셔서 먼저 지성소에 들어 가셨고 우리를 그 지성소로 인도하며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으로 용서와 화해를 이룬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 해석은 그리스도의 삼중직인 왕, 제사장, 선지자 중 제사장직의 근거가 된다. 성서에 기록된 기표로서의 상징과 메타포들을 해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와 생명의 주 되시고 우리의 아버지 되심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 하다. 이를 전제로 이 시대에 우리는 '예수' = '대제사장'을 어떻게 재해석 할까? 먼저 대제사장을 필요로 하는 '인간'을 해석해 보자.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늘 씨앗인 내가 하나나님으로 부터 소외되어 빛을 잃고 절대 타자로 실존적 한계상황에 놓여 있다고 '나'를 해석하는 것으로 부터 출발한다. 중요한 것은 '나'를 해석할 때 '나'라는 실존적 타자가 하나님으로 부터 유리 되어 소외된 절대 결핍과 이항대립적 분별 의식과 비존재에 대한 두려움 등 한계상황에 직면해 있을 뿐이지 '원죄' 로 굴레 씌워진 '죄인'이라는 종교적 해석을 거부하는 점이다. 원죄설(ORIGINAL SIN)은 선과 악이라는 대립된 두 원리가 공존한다는 철저한 이원론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마니교를 따르던 어거스틴에 의해 처음 교리화 되어 지금까지 인간을 선험적 '죄인'이라고 전제하여 빛의 존재인 인간을 빛이 부재한 죄의 어둠속에 가둬버렸다. 인간을 선험적 '죄인'이라고 전제하면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주신 자유의지와 정면으로 부딪힌다. 더욱 그 '죄인'과 '죽음'에 대한 인과적 해석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든 아니든 모두 죽는데 모두 죽는 것은 죄가 원인이라는 해석은 죽음의 모든 원인을 죄로 환원시키는 인과율의 오류다. 따라서 '인간' = '죄인'이라는 해석의 근원인 '원죄'를 거부하면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제'를 지내던 속죄를 위한 대제사장은 필요가 없게 된다. 규례와 율법이 제정된 이후 그 규례와 율법을 어긴 죄를 속죄 해 주던 대제사장은 새로운 약속인 예수의 오심으로 이 전의 율법과 규례가 폐기되어 더욱 필요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 = 죄인'이라는 해석을 폐기하고 실존적 해석으로 '나'라는 해석에서 차연을 최소화 한다. 그리고 죄인이 아닌 실존적 존재로 해석한 '나'와 '예수'의 관계에서 유대전통의 제의적 해석을 배제하고 '예수'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먼저 폴 틸리히의 상관관계적인 실존적 신학에 근거해 '예수'를 '새로운 존재'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존재는 하나님으로 부터 이미 소외 되어 스스로 소외상태를 극복할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해 이 땅에 와 인간들을 깨워 용서와 화해를 이루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중보자로 해석한다. '중보'의 '새로운 존재'는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다함이 없는 생명에서 흘러 나오는 힘으로 실존적 소외를 극복한 존재며 태어나기 전의 케노시스 상태로 건너간 존재 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같이 태어난 우리의 형제요 친구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 시켜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이렇게 '원죄'를 거부하고 '예수'를 제의적 모형인 '속죄'의 대제사장이 아닌 '중보'의 대제사장으로 해석할 수 있는 성서의 근거는 차고 넘친다. 이제 중보의 새로운 존재인 그리스도의 밥상에 숟가락을 얹듯 믿음으로 그리스도에 참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소외를 극복하고 하나님께로 건너갈 수 있다. 이 새로운 존재는 다함이 없는 생명에서 흘러 나오는 힘을 근거로 하여 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믿음이 존재의 용기가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힘과 우리의 용기가 하나 되어 소외상태를 극복하고 지성소 안에서 안식하는 궁극적 구원을 이룰 수 있다. 또 다른 '나' 의 해석은 우리의 형제요 친구인 예수께서 중보의 대제사장이 되었듯 나 또한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다함이 없는 생명에서 흘러 나오는 힘인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제사장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왕 같은 제사장이된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 신원하고 탄원하여 용서와 화해를 이룰 거룩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상 차연을 최소화 하기 위해 '나'를 실존적으로 해석하고 갈릴리 나사렛 '예수'를 중보의 대제사장인 '새로운 존재'로 해석을 하였다. 이제 우리 모두 중보의 대제사장인 새로운 존재 그 예수 그리스도에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려 다함이 없는 생명에서 흘러 나오는 힘을 얻어 그 용기로 소외를 극복하고 십자가를 건너 아버지께로 나아가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빛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의무와 책임을 다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길 소원한다. 지금 여기에서... 2021. 5. 30 평화 호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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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
21.06.01 17:27
첫댓글 아론과 레위지파가 아닌 멜기세덱과 예수로 잇는 대제사장의 지위는 당시 로마의 거대한 권력 앞에 움추리고 공포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던 유대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을 벗어나 유대교로 다시 회귀할 수 있는 근거로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계보가 아니라는 점일 겁니다.
이 점을 착안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임명한 멜기세덱과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 역시 대제사장으로 선포함으로써 예수님께 반역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장로님의 말씀이 생동감 넘치는 영혼의 음성입니다.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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