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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영성

믿음(πίστις)의 점검(2)

작성자호건|작성시간26.06.14|조회수1 목록 댓글 0

믿음(πίστις)의 점검(2)

이 뭣고?


믿음(πίστις)의 점검(2)
[ 체(體)•상(相)•용(用)과   
신(信)•해(解)•행(行)•증(證)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히브리서 11장


이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것을 전부 다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히11:39)


히브리서 11장에는 하나님께 인정받은 선진들의 믿음과 당시 로마권력과 유대사회로 부터 고난과 죽임을 당하거나 당할 기독교인 들의 믿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히브리서를 받아 읽던 당시의 유대 기독인들은 오늘 말씀에 기록된 대로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는 등의 죽음에 대한 위협과 극에 달하는 고통 가운데 혹독한 믿음의 시험을 견뎌 내야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흘린 피에 펜을 찍어 써 내려가는 심정으로 이 서신을 썻을 것입니다.  어떤 힘이 시공을 초월해 오늘의 우리에게 까지 그 믿음 안에 있게 하는지 또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온 몸에 전률이 흐릅니다. 믿음이 무엇이길래 수만년 동안 생존에 최적화 되도록 진화되어 온 인간이 생존 대신 죽음과 고통을 선택 했을까? 이 뭣고? 믿음은 극히 개인적인 마음의 작용과 체험이기 때문에 보편적 잣대로 측정할 수도 어떤 개념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성서에서 말하는 믿음의 성격이 하나님 약속에 대한  영성적, 사변적, 자각적 믿음인 것과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현현이며 '지금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가 현현 된 것이라는 것 정도만 말 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믿음에 무슨 힘이 있어서 생명 대신 죽음과 고통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추론해 보면 당시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생명은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이후의 모든 삶과 죽음의 문제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김'으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자신을 구원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헌신'과 '충성'도 하나의 조건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죽음과 고통을 선택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 뭣고?에 대한 답이 희미하게 나마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신념이나 꿈과 같은 것에 쉽게 목숨을 걸 수 있을까요? 당시의 믿음은 목숨을 담보하는 아주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보통 일상의 삶에서는 가치관과 지식, 지혜와 상황에 따라 판단과 선택을 하지 온전한 '맡김', '헌신', '충성',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맡김', '헌신', '충성', '용기' 모두 마음의 작용과 태도입니다. 곧 믿음은 자성(自性)이 있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들음으로 부터 싹터 죽순 자라듯 쑥쑥 자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성장이 멈추기도하며 병들어 시들시들 해 지기도 하는  변화무쌍한 마음작용입니다. 작은 불씨가 장작을 태우듯 확 타올랐다가도 한 순간 훅해서 꺼진 촛불마냥 사그러 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믿음이 평온한 상태가 일상이 되고 삶에 큰 문제가 없을 때는 상태가 어떤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때 당시는 신성시된 절대 권력인 로마와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들로 부터 받았던 생명의 위협과 고난 이었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믿음의 뿌리를 흔드는 힘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가장 큰 힘은 무엇보다도 끝 없는 탐욕을 먹고 자라는 소비자본주의와 길들여진 탐욕 그리고 극과 극으로 양분시켜 갈등을 조장하고 그를 이용하는 신자유주의 경쟁이데올로기와 이를 추종하며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상품화 하는 시장경제 체제, 끊임 없이 싸우며 약자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 넣는 정치 이데올로기 등입니다. 이러한 힘들은 거대 구조로 작동되는 불가항력적 힘이기 때문에 한 개인이 대항할 수도 없어 그 체제에 갖히고 종속되어 서서히 끓는 물에 자기도 모른채 죽어 가는 개구리 모양 우리의 믿음을 뿌리채 흔들고 위협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때 
나의 믿음은 어떤지 살펴 보라는 간곡한 권유의 메시지가 히브리서 11장 말씀이라 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선진들의 믿음을 어떻게 점검(시험) 했는지 그 기준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을 인정 받던 시대적 상황이 오늘과 다르기 때문에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런 상황에서 믿음을 점검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따라서 오늘은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뿌리 내리고 있는지 그 근거의 타당성과 믿음이 완성 되고 확증되는 과정에서 나의 믿음은 어떤 과정과 단계에 있는지 지금의 조건에서 점검할 기준들을 찾아 보고자 합니다. 
먼저 믿음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뿌리 내리고 있는가 라는 기준을 체(體)•상(相)•용(用)에서 찾아 봅니다.
체(體)는 神 자체이며 본체(本體)입니다. 궁극적 믿음의 대상인 없이계신 일자(一者)인 아버지 입니다. 이름을 지을 수도 지각할 수도 없는 초월적 체(體)이기에 '없이'며  체(體)로 부터 소외되어 한계상황의 고통을 겪는 우리에게 다가와 건지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 의지를 현현 하는 내재적 일자이기 때문에 '계신'입니다. 그리고 나를 낳으신 분이므로 '아버지'이십니다. 보이는 것 뒤에는 보이지 않는 없이계신 아버지의 신실하심, 무한하심, 전능하심, 자비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없이계신 아버지를 신뢰하여 모든 것을 맡기고 충성과 헌신을 다하며 어떠한 고난도 용기로 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상(相)은 없이계신 아버지의 의지(약속)가 보이는 모습으로 현현한 나사렛 예수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1:14)  나사렛 예수는 아버지로 부터 소외되어 고통 가운데 있는 인간을 향한 구원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온 '새로운 존재'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케노시스로 소외를 먼저 극복한 '새로운 존재'입니다. 이 새로운 존재를 믿고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용(用)은  神의 의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作用하는 구원입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새로운 존재요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성령의 일하심 입니다. 그리고 내게 새로운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새로운 존재에 참예하여 소외를 극복하도록 합니다.
지금 체(體)와 상(相)과 용(用)이 내 믿음의 근거가 되어 뿌리 내리고 있습니까?  거센 폭풍우에도 흔들리거나 뽑히지 않을 만큼 깊이 그리고 단단히 뿌리내렸습니까? 
이제는 체(體)•상(相)•용(用)에 뿌리 내리고 자라고 확증 되어 가는 과정과 단계에서 나의 믿음은 어디쯤에 있는지 해(解)•신(信)•행(行)•증(證)이라는 기준으로 알아 보겠습니다.
해(解)는 체(體)•상(相)•용(用)에 대한 이해(理解)의 과정과 단계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부터 남(롬10:17)으로 먼저 체(體)•상(相)•용(用)에 대해 듣고 봄으로써 이해가 시작되어 믿음이 싹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믿음의 이유와 근거에 대해 자각과 깨달음으로 얻어지는 구체적 앎입니다. 지금 나는 체•상•용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과 앎이 있습니까?
신(信)은 체(體)•상(相)•용(用)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믿음이 형성되고 자라는 과정입니다. 이해가 없는 믿음은 눈먼 맹신(盲信)이 되고 믿음이 없는 이해는 아만(我慢)에 빠지게 합니다. 
행(行)은 신행(信行)으로 믿음이 형성되어 그 믿음대로 행하여 지는 과정이며 믿음의 체험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온 삶을 아버지께 맡김, 헌신과 츙성, 인내로 기다림, 고난을 용기로 극복함, 순종함과 준행함 등의 생생한 체험으로 믿음이 성장합니다. 나는 지금 이러한 체험을 하고 있습니까?
증(證)은 체험된 믿음의 확증입니다. 체험이 곧 믿음대로 이루어진 확증이며  확고한 믿음의 증득입니다. 즉 믿음은 행동이 증명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미와 지금 그리고 아직의 어디쯤에 있으면서 완성을 위해 자라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믿음은 해(解)•신(信)•행(行)•증(證)의 과정과 단계에서 어디쯤 자리하고 있습니까?
믿음이 확증되면 이어 한발 더 나아가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확고하게 믿음이 성취되면 항상 아버지를 생각하여 그 앞에서 믿음으로 행함에 흔들림 없는 직심(直心)과 성취된 믿음으로 신의 근저와 영혼의 근저에 까지 내려가는 고요하고 깊은 심심(深心), 그리고  이타행(利他行)을 하게 하는 자비심(慈悲心)을 뜻합니다. 믿음이 온전하게 확증되면 마음이 고요하고 깊어져 영혼의 근저에서 늘 아버지 앞에서게 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통해 이웃을 향한 이타행(利他行)의 삶으로 나가게 합니다. 이 자비와 사랑은 본래 내 것이 아니기에 조금이라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주상(無住相) 이타행(利他行)입니다.
믿음은 체(體)를 향한 청정한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의 기준을 더한다면 체(體)를 향해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내 안의 욕망을 투사하는 식의 탐•진•치 삼독(貪瞋痴三毒)에 물든건 아닌지 살펴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 속성이 있어 아버지의 기쁨보다 자아 만족을 위한 기복신앙으로 흐르려는 경향성을 막고자함 입니다. 깨끗이 닦인 거울처럼 청정한 마음만이 아버지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반사하여 비추어 낼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믿음은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자비와 사랑으로 이타행을 하고 있습니까? 
이 뭣고?의 답을 찾으셨습니까?
우리의 없이계신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끝 없는 탐욕을 먹고 자라는 소비자본주의와 길들여진 탐욕 그리고 극과 극으로 양분시켜 갈등을 조장하고 그를 이용하는 신자유주의 경쟁이데올로기, 그리고 이를 추종하며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상품화 하는 시장경제 체제, 끊임 없이 싸우며 약자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 넣는 정치 이데올로기로 부터 흔들리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이 믿음을 정초(定礎)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이 믿음으로 이 어려운 시대에 그리스도에 참예(參預)하여 참자유와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 건너가기를 소원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를 비워 아버지께 온전히 맡김과 용기 그리고 자비의 행동과 체험으로 우리의 믿음이 인증 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오늘도 평안 하소서
2012. 7. 4. 평화 호건


* 기독교가 믿음의 종교라고 하면서도 믿음이 마음 작용이라는 깊은 통찰이 없어 믿음이 일심(一心)을 향한 마음 작용이라고 하는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에서 체(體)•상(相)•용(用)과 해(解)•신(信)•행(行)•증(證) 그리고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라는 다소 낮선 사유의 틀을 차용하여 대입해 기준을 삼아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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