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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영성

느헤미야의 극복 (克服)

작성자호건|작성시간26.06.14|조회수1 목록 댓글 0

느헤미야의 극복 (克服)

 


느헤미야의 극복 (克服)
[우리는 어떤 장애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느헤미야 2장)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왕국의 흥망성쇄와 재건, 다윗왕국의 회복 이라는 역사의 중심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소명으로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왕 치세에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무너진 성벽과 불타버린 성문을 중수하는 큰 역할을 감당한다. 느헤미야 2장에서 보면 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아닥사스다왕의 술관원이 되어 신뢰의 관계로 소통하며 자신의 예루살렘성 중수에 대한 허락과 조서를 받아 물적 인적 자원의 지원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해 성을 다시 쌓고 성문을 다시 만들어 단다. 물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스뤂바벨의 일차 귀환과 에스라의 이차 귀환으로 성전을 새로 건립하고 예배를 회복했다고는 하지만 비옥한 초승달 지역과 이집트를 잇는 지정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이스라엘의 고토 예루살렘의 거민들이 아직 도탄에 빠져 있고 사회 정치적으로 불안한 것을 안정시켜야 겠다는 아닥사스다왕의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진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복국 페르시아의 주구인 총독이 되어 북이스라엘인 사마리아 지역을 통치하던 산발랏과 산발랏 수하인 세금징수관으로 암몬지역을 다시리던 도비야, 그리고 예루살렘 남쪽의 무역상이던  아라비야 사람 게셈에게 예루살렘성의 중수를 위해 나타난 예루살렘 총독 느헤미야의 출현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큰 적이였을 것이고 느헤미야에게는 두고두고 방해가 되는 세력들 이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의 조롱과 방해와 그리고 살해 위협이 느헤미야의 회고에 기록된 것으로 알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은 다윗왕국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성의 중수는 곧 다윗왕국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며 북이스라엘은 남유다왕국을 이룬 유다와 벤야민 지파를 제외한 열지파가 왕국을 이뤘지만 신흥 패권국인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화친한 남유다와 달리 앗수르에 저항하다 망한 뒤 앗시리아의 이주 정책으로 사마리리아 지역은 완전히 혼혈민족이 되어 예루살렘 거민들로 부터 이방인의 개로 배척 당하는 입장이어서 겨우 산발랏이 유다의 제사장등 귀족들과 정략결혼으로 총독의 권세를 누렸는데 예루살렘 성의 중수로 옛 다윗왕국의 부활은 악몽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으려 성 중수공사에 참여해 보려했지만 느헤미야로 부터 거절 당하자 더 강경한 입장이되었다. 영원의 철학 저자인 영국의 올더스 헉슬리는 "인간이 역사를 통해 배운 바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역사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이다.” 라고 말하며 반복되는 역사의 고리를 끊는 것은 역사로 부터 배워 새로운 역사를 쓰는 것이라고 한다. 느헤미야 2장에서 배울 역사의 교훈은 무엇인가? 작게는 한 인간의 역사에서 크게는 한 나라와 민족 그리고 세계의 역사에서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울 때 느헤미야처럼 장애를 극복하고 세우는 것이다. 나의 삶에서 무너진 것은 무엇인가 나의 내면에서 무너진 것은 무엇인가? 이 사회와 국가가 무너진 것은 무엇이며 민족 공동체가 무너진 곳은 어디인가? 느헤미야가 무너진 예루살렘을 살피 듯 먼저 살펴서 알아 채는 일이다. 어디가 얼마나 무너졌는지 장애 요소는 무엇인지 살펴 알아채는 일이 간단 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다시 세우는 일을 시작하고 믿음으로 계획하고 추진하는데 항상 기도가 따른다. 하나님의 사람은 테바처럼 인도하심 따라 일을 한다. 외적으로 다시 세우는 일은 그렇다 치고 나의 삶과 내면이 무너진 곳을 어떻게 찾고 회복할 것인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고 즉시 반응 하듯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지 못하면 알아챌 수도 반응할 수도 없다. 무너진 성이 느헤미야를 만나 다시 쌓아지듯 무너진 우리의 삶과 내면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다시 세워진다. 때로는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때로는 깊히 명상기도 하는 중에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때 내가 작은 글스도로 다시 태어나 세워지고 주의 사랑으로 살아진다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눈마저 감은 텅빈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와 만나지고 나로 다시 세워진다. 이 사회도 한 국가와 민족도 무너진 곳이 다시 세워지기 위해서는 어떤 이념이나 기술에 앞서 영적 각성 없이는 일시적으로 세워지는 것 같으나 같은 이유로 다시 무너지는 것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앞에서 본 것처럼 느헤미야의 예루살렘성 중수는 산발랏과 도비야 그리고 게셈의 집요한 방해로 순조롭지 만은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신과 사회와 국가 민족을 다시 세우는 데에도 방해 세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나라로 보면 일제 치하에서 부터 누려왔던 친일 기득세력,  특히 조중동과 같은 언론 재벌 그리고 이들과 짝이된 보수우파와 통제 받지 않는 권력들, ~~피아들 그 중에서도 원피아 카르텔...산발랏보다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극복해야할 방해 세력들이다.  그것은 그 동안 자신의 주인 노릇하던 까르마와 사회 국가의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이익을 훼손하기 하기 때문에 극렬히 저항한다. 예수 께서 하나님나라를 다시 세우려하자 율법의 뒤에서 종교족으로나 정치적으로 온갖 기득권을 누리던 바리세파 등이 저항하여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았다. 다시 세운다는 것은 그렇게 목숨을 거는 일이다. 느헤미야도 숱한 살해 위협을 당했다. 우리의 역사에도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려 수 많은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걸었다. 흔히 하는 말로 개혁세력이 자신을 개혁하지 못하면 개혁이 실패한다고 말한다. 자신은 기득권을 누리면서 개혁세력으로 인정 받아 정치적 입지만 다지려는 수박들은 결코 무너진 자신도 국가 사회도 다시 세울 수 없다. 무너진 자신의 삶과 내면을 다시 세우기 위한 노력에도 방해꾼은 있다. 묻히고 덮혀버린 신성을 되찾고 무너진 자신을 다시 세워 가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고 깊히 명상기도를 하는 가운데 영혼의 근저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작은 예수로 태어나는 경험을 하려 할 때 이를 방해 하는 것을 성서에서는 콕집어 말한 것이 없지만 불가에서는 오장애(五障碍, nīvaraṇa)로 말하고 있다. 즉 ➀감각적 욕망(kāmāchanda), ➁악의(vyāpāda), ➂해태와 혼침(thīna-middha), ④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⑤회의적 의심(vicikichā)의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nīvaraṇa)를 말한다. 
➀감각적 욕망은 탐욕이다.  몸은 편한 쪽으로 무너져 가고 근본적인 소외 상태에서 오는 결핍은 한도 끝도 없이 ~하고 싶고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어한다. 내 생각대로 세상이 움직길 바란다. 온 우주가 내 중심을 돌기를 원한다. 원한다고 다 이루어지지 않는데서 방해 요소가 나타난다. 바로 ➁악의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니 화 나고 대상을 증오한다. 분심이 일면 앞뒤 분별심도 사라지고 눈이 먼다. 이럴 때 악의와 싸우지 말고 다만 알아 차려라. 아 내가 화가 많 났구나. 알아차리고 지켜 보면  사라진다. 이는 양자역학에서도 증명된 바다. 다음 ➂해태와 혼침이라는 고약하면서도 친한 장애다. 하다 보면 자꾸 게을러 진다. 엔트로피 증가 법칙 때문에 그렇다. 즐거움이 사라져서 그렇다. 그리고 성경과 기도가 수면제가 되어 방해 한다. 몸은 완전히 릴렉스 된 상태에서 의식이 성성해야 되는데 의식이 몸따라서 이완되기 때문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경행이다. 힘주어 걷지 말고 가볍게 한걸음 한걸음 걸으며 깊히 호흡하고 기도한다. 다음 ④들뜸은 말씀을 묵상하거나 기도 중에 성령체험으로 방방 뜨는 것을 말한다. 이제 시작인데 다 이룬 것처럼 착각해서 중도에 포기하게 만든다. 여기서 같이 하는 도반과 스승의 역할이 중요하다. 바로 잡아 주고 가라 앉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세주가 되어 사고친다. 그 반대로 아무런 진척이 없고 응답이 없다고 후회 하면서 중도 포기하게 하는 방해다. 역시 잘되고 있다고 격려하며 이끄는 도반과 스승의 역할이 중요하다. 마지막 지금 까지의 모든 노력을 무위로 돌려 버리는 ⑤회의적 의심이다. 믿음으로 시작한 다시 세우기의 근간을 흔들고 아버지를 만날 의미를 상실하게 한다. 의심병이 올 때 빨리 되돌아 간다. 되돌아가 왜 시작했는지 깨어 알아차리기를 한다. 되돌아간다고 결코 늦는 것이 안다. 의심을 품은 채 백날 앉아 있는 것 보다 빠르다. '이 뭣고?'라고 의정을 품는 것을 의심이라고 하지 않는다. 의심은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 회의다.  빨리 되돌아가 되짚어 와야한다. 느헤미야가 모든 장애를 믿음과 기도로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심 따라 소명을 다 했을 때 예루살렘 성은 다시 쎃어졌다. 무더운 여름 느헤미야서를 통해 우리 또한 역사의 가르침 대로 이 시대 역사의 중심에 서서 믿음의 역사 의식을 가지고 이 사회와 국가 민족을 다시 세우는 소명을 다하고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무너진 삶과 내면을 찾아 다시 세우길 소원한다.
2021. 8. 8. 평화 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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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씨알

21.08.09 10:43

첫댓글 "이 사회와 국가가 무너진 것은 무엇이며 민족 공동체가 무너진 곳은 어디인가? 느헤미야가 무너진 예루살렘을 살피 듯 먼저 살펴서 알아 채는 일이다. 어디가 얼마나 무너졌는지 장애 요소는 무엇인지 살펴 알아채는 일이 간단 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 세상 곳곳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양심이 무너져 내리고 정의가 무너져 내립니다.
예나 지금이나 형태는 다르지만 사람이 사람 위에 서서 군림하려 하고 사람을 짓밟고 누리려 합니다.
장로님의 글 속에서 느헤미아의 마음으로 무너져 내린 이 땅의 성읍을 세우고자 힘쓰시는 마음을 보고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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