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아(無我)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마 16:24) 무아(無我)는 산스크리트어인 안-아트만(अनात्मन् an-ātman, an-atman)인데 중국으로 넘어와 한역을 하면서 'an'을 無로 번역해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인도에서의 ' an'은 '○○이 아니다'라는 뜻을 가지는 부정의 접두어 이다. 따라서 '내가 아니다 (非我)'로 번역 했어야한다. 물론 an을 한역할 때 無로 번역할 수는 있지만 많은 경에서 붓다는 '○○은 ○○이 아니다'라는 비아(非我)를 설했지 있다(atthita 有) 없다(natthita 無)로 존재의 有無를 설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이 있느냐?' 또는 '○○이 없느냐?'라고 물으면 모두 답하지 않았다. 불교에서의 모든 법(諸法 모든 사물)은 緣起에 의해 조건에 따라 生하고 滅하기 때문에 늘 변하여 항상함이 없어(無常) 영원한 것이 아님(非)으로 그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설해진 것이 anatman이다. 그리고 힌두사상인 범아일여(梵我一如)에서 브라만과 '나 atman' 는 하나이고 atman이 있어 윤회한다는 사상의 뿌리인 atman을 부정함으로서 계급질서를 타파하고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평등과 자유의 길을 열기 위해 atman(我)을 부정하여 an-atman(非我)으로 파사현정(破邪顯正)한 것이다. anatman을 무아로 번역하는 것은 영어로 ' He is not korean' 을 '그는 한국인이 아니다'가 아닌 ' 그는 한국인이 없다'로 번역한 것과 같다. '非我'는 모두가 '나'라고 여기는 '나'는 고정적 · 불변적인 실체로서의 아("我 · 아트만")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라고 여기는 오온(五蘊)이 緣起에 의해 生한 가유(假有 임시적인 존재)로 몸도 있고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고 분별하고 알아차리기 때문에 지금 경험하는 '나'가 '나의 실체'라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항상하고 독립적인 自性이 空함으로 나라고 여기는 '나'가 '나가 아니다' 즉 '非我'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이러한 '나'인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한다. '자기를 부인' 즉 아파르네사소 헤아우톤(ἀπαρνησάσθω ἑαυτὸν)에서 부인(否認)하다인 그리스어 '아파르네오마이'는 강세접두어 아포(apo)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다'라는 '아르네이마오'의 합성어 이다. 자기 부인은 atman인 지금의 '나'는 내것이 아니다(非我)의 선언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라고 여긴 것이 가진 모든 집착의 원천인 자기를 이제 부터 내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나'가 '非我'라고 하는 의식의 대 전환(메타노이아)이 되고 나서야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非를 無로 잘못 이해하면 있음(atthita有)이라는 상견(常見)이나 없음(natthita 無)이라는 단견(斷見)을 가져 양 극단을 취해 바른견해(正見)를 확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붓다는 有와 無를 논하는 것은 희론(戱論)이며 이러한 희론은 anatman 사상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실천적 중도'의 삶을 살 수 없게 한다고 말한다. 실천적 중도의 삶의 첫 걸음은 非我로써 모든 사물을 연기적 관점을 바탕으로 이항대립적 양극단인 이분법을 떠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팔불중도(八不中道)의 바른견해를 확립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非我로서 선과 악, 너와 나, 위와 아래로 분별하기 시작해 에덴에서 쫒겨 났던 이항대립적 양 극단을 버리고 십자가의 중심에서 바라 보는 귀일(歸一)의 바른견해를 확립하는 것이 주를 따르는 첫걸음 이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
댓글
씨알
22.02.25 03:28
첫댓글 장로님의 깊은 철학과 삶으로 말미암아 무와 비 또 불을 설명해주셔서 학습이 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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