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eternal life, ζωὴν αἰώνιον)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요5:24)
고대 인류로부터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존재에 대한 비존재의 가장 큰 위협인 죽음은 두려움의 원천이다. 그래서 인류는 모든 상상을 동원해 그 두려움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갖 불노장생 또는 불노불사의 방법들을 찾아왔다.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의 우르크 왕조 초대 왕인 길가메시의 영생에 대한 노력이 신화로 기록된 최초의 문서일 것이다. 점토판에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길가메시가 친구의 죽음으로 공포를 느껴 불로초를 얻기 위해 불사의신 우트나피슈팀을 찾아가 천신만고 끝에 바다의 밑바닥에서 자라는 불로초에 대해 알아내어 몸을 구부려 불로초를 뽑자마자 뱀 한 마리가 훔쳐가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도 죽었다. 이러한 불노영생의 열망은 죽지못해 사는 천민들 보다는 모든걸 가지고 누리던 왕과 제후들이 더 컸다. 여기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옛 중국의 진(秦)나라 시황(始皇)인
영정(嬴政)이라는 왕이다. 전 대륙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았으며 五步一樓 十步一閣이라는 화려한 아방궁을 짓고 육국의 모든 미녀를 궁녀로 뒀던 시황이 누리던 이 모든 것과 단절되어 잃고 잊혀지는 죽음이야 말로 최대로 두려운 적이였을 것이다. 불로초를 구하러 보냈던 서복(徐福)의 이야기와 죽어서도 누리고 살겠다고 병마용을 만들어 채운 능묘가 이를 말해준다. 각 지역 각 민족의 장례의식을 보면 그 흔적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생체물리학과 유전공학은 머지않아 불사의 생명체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9988이 아니라 영생은 온 인류의 로망이다. 그래서 교회며 학교 등 여기 저기 영생을 가져다 붙인다.
영생(永生)이라고 줄여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시공을 초월하여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요5: 26)이기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는 땅의 언어로 설명하려면 상호 모순되는 충돌을 일으킨다. 영생을 얻었다 했는데 죽음을 전제로 한 부활은 무엇인가? 땅의 언어로는 영생하려면 부활이 없어야 되고 부활이 있으려면 영생이 있을 수 없는 충돌이 발생한다. 죽음으로 부터 구원 받아 얻은 생명 또는 죽은 후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부활해서 얻는 보상으로 얻는 생명도 죽음을 전제로한 생명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지금 숨 쉬는 생명의 生과 死는 연기적(緣起的) 관계가 있는 상대적 개념이다. 유전연기(流轉緣起)로 보면 태어남이 있음으로 죽음이 있고 환멸연기(還滅緣起)로 보면 태어남이 없으므로 죽음도 없다.
따라서 영생은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하늘로 부터 온 절대 생명이다. 성경에서는 상대적이고 유한한 생명은 프쉬케(ψυχή)나 bio의 어원인 비오스(βίος)로 하나님의 생명은 조애(ζωὴ)로 구분해서 쓰고 영원한 생명을 조앤 아이오니온(ζωὴν αἰώνιον)이라고 쓰고 있는데 영원한 생명에서의 생명을 푸쉬케나 비오스 처럼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의 숨쉬며 살아가는 전 과정이나 살아가게 하는 힘으로 오해하는 데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푸쉬케나 비오스가 개별적인 유한한 生命이라면 조애는 인간 스스로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생명이나 태어나 죽을 때 까지의 유한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인간에게 준 생명이다. 개별적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공을 초월해 서로 연합된 생명으로 전 우주적으로 확장되어 현실의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궁극적인 힘을 말한다.
상식적으로 보면 우리가 이 몸으로 태어나 시공의 제약을 받아 언젠가는 육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한계상황에서 시공을 초월한 영생을 스스로 얻고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아버지의 생명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생명을 받아 영생을 얻을 수 있고 누리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말한다(요 3:16). 성경에서는 어떻게 영생을 얻는다고 말 하는가? 우리가 영생을 얻게하려고 독생자를 보내셨고(요 3:16) 그 영생을 얻는 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부터 시작 된다고 말한다(요17:3).
. 여기서 '안다'는 말은 기노스코(γινώσκω)로 히브리어 야다(ידע)를 말하며 깊은 관계 속에서 주관적이며 체험적인 앎을 말한다. 단순한 知的 앎이 아니라 깊은 교재 속에 전 인격적인 체험으로 얻는 깨달음의 앎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도마복음 1장에서는 “이 말씀들의 해석(의미)을 발견(이해한)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여 말씀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발견하고 깨닫는 것 까지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알기까지 먼저 하나님께 깨어 있어 완전한 의식전환이 있어야 듣고 알며 깨달을 수 있다. 여기까지 우리는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고 그 생명이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 있어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알 때 그 안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어 우리가 얻게 됨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영원한 생명 안에서 이 땅의 삶을 누릴 수 있는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영생은
시공을 초월한 생명을 말한다. 따라서 죽음과 대비 되는 생명 또는 심판으로서의 죽음과 구원으로서의 생명 즉 상대적이고 이원적인 생명을 누리는 것은 영생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생명이 이 땅의 생명과 같다면 니체가 말한 것처럼 진즉 죽고 없을 것이다. 다석 선생님은 영생을 얻고 그 안에서 누리는 것을 탐진치 삼독에 물든 제나는 죽고 하늘을 향해 얼나로 솟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제자 김흥호 목사님은 한발 더 나아가 실천적으로 내안에 다시 산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영생을 얻은 것이요 이 땅에 살면서 경험하는 영생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 영생을 누리는 열쇠다. 탈리히는 그 열쇠가 영원한 현재인 '지금'에 있다고 말하며 곧 그리스도가 '영원한 지금'이라고 선언한다. 실재 차원에서 보면, 시간 이전의 시간도, 시간 이후의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의 의식과 기억 속에만 있을 뿐이다. 존재하는 시간은 오직 '지금 이 시간'(혹은 순간) 뿐, 현재만 계속 존재한다. 이 순간, 즉 '지금'(now)만이 영원히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영원한 지금'(the eternal now)이 가능한 것이다. 그 '영원'이 그리스도며 영원의 현존이 '지금'이라고 말한다.
또한 '영원한 지금'이 왜 그리스도인지 예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고 말 한 것으로 설명한다(계 1:8, 21:6, 22:13).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하는 알파와 오메가는 객관적인 형태의 시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즉 예수 그리스도 자체다.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지금'으로 만나는 것이 '영원한 현재'다.
불가능해 보이는 '지금'과 '영원'의 신비한 조합을 이해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하며 기도가 '지금'을 '영원의 빛' 속에서 실제로 이해하고 경험하게 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기도 가운데 크로노스의 시간이 사라지고 아버지의 때인 카이로스 영원한 현재에 집중해 머물면 곧 그것이 그리스도와 연합이며 그리스도의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 톨레와 같은 현대의 많은 영성가들은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외치며 '현재를 살아라'라고 말한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아 현재 만이 진실하기 때문에 의식을 현재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현재를 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현재는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크로노스의 현재인데도 불구하고 그 현재에 집중해 머물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우리가 영원한 지금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지금을 일치 시켜 그리스도의 영생에 참여하는 방법으로 깨어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숨기도를 권한다. 숨은 잠시라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 태초의 숨이며 숨으로 온 우주와 연결되며 쉽게 코와 인중 사이에서 드나드는 느낌을 알아채고 집중할 수 있다. 들이 마시며 '아버지의 생명으로' 내쉬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등 각자 반복할 수 있는 말씀을 정하면 된다. 행주좌와 언제든 어디서든 숨은 계속 되니 이 숨에 집중해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 면전에 서는 코람데오가 이루어 진다.
다른 한편으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깊은 기도 속에 영혼의 근저에 이르러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지극히 신비적인 체험으로서의 영생을 경험하는 경우다.
이제 깨어 우리가 알고 믿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 우주에 가득 찬 아버지의 생명인 태초의 숨을 지금 여기에서 온 몸 깊히 맞아들이는 기도를 해보자! 마음이 고요해지며 깊어져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이 벅찬 기쁨 그리고 감사를 아버지께 드리자!
이 기도 가운데 순간 순간 아버지의 면전에서 온 우주를 향한 사랑으로 영원한 현재를 붙들고 살아가자!
이제 됐다! 영생!
2022. 3. 15. 🙏
댓글
씨알
22.03.16 17:56
첫댓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 영생을 누리는 열쇠다." 은혜 넘치는 말씀입니다.
빛의 바다
22.03.18 06:05
들이쉬며 '하나님 사랑'
내쉬며 '이웃사랑'
은혜 충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