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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영성

천국의 비밀

작성자호건|작성시간26.06.14|조회수0 목록 댓글 0
천국의 비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3)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 배에 앉으시고 무리는 해변에서 가르침을 듣고있다. 참 아름다운 광경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도무지 말귀가 통하지 않는 무리들 앞에서 답답한 것이다. 앞에 있는 무리 모두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됫글로 배워서 말글로 풀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그러지 못하다는 것을 비유로 말하고 있다. 오늘의 가르침은 하늘나라의 비밀과 함께 물가에 서서 말씀을 듣는 무리와 주님을 씨뿌리는자의 비유로 말씀하신다.
비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이나 사상을 원관념(tenor)이라 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빌려온 대상이나 사상을 보조관념(vehicle)이라 하며 그들 사이에는 반드시 유사성이나 유추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
이러한 유사성이나 유추관계는 인간의 공통적 경험에 의해 인정받은 것이라야만 한다. 이에 따라 인간은 알려진 경험에서 오는 익숙한 대상과의 유사성이나 유추관계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새로운 경험 세계를 공통적으로 확장시켜 나가며 깨닫게 된다.
오늘의 말씀에서 '하늘나라의 비밀'이 원관념이고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 일'이 보조 관념이다. 이 네러티브는 공통으로 경험한 씨 뿌리는자의 비유로 부터 유추하여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아 내 깨닫는 구조다. 그런데 왜 하늘나라의 비밀을 쉽게 깨달으라고 비유로 말했는데도 그들은 왜 얼아듣지도 못하고 깨닫지 못했을까?
첫째는 아직 귀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제자들이나 무리들은 붓다가 연꽃을 들자 미소로 화답한 마하가섭의 오도경지 만큼 성장이 안되어 주님과의 의식채널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는 위와 같은 의식 상태에서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유를 말하기 전에 이 비유가 하늘나라 비밀이라는 암시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추론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손가락으로 달을 가르키는데 달이 구름속에 숨어 버린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니 들을 귀 있는자는 들으라 해도 듣지 못하고 끙끙대는 것이다.
주께서는 제자들과 무리들이 가진 씨뿌려 농사 짓는 공통적인 경험 즉 한번 딱 들으면 알 수 있는 비유로 말했지만 아직 하늘나라의 비밀로 추론하지 못하고 있다. 더우기 팔레스타인의 농토라는 것이 거의 사막지역이라 밭이 길가와 같은 땅, 가시덤불, 바위 , 좋은 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혼재되어 있어 한 줌 씨를 뿌리면 어떤 씨는 이런 곳에 어떤 씨는 저런 곳에 무작위로 떨어지는 상황까지 친절하게 비유로 말 하지만 그들의 깨달음은 멀리 있다.
이것이 뭔 말이여? 가서 씨뿌리고 농사를 지으라는 말이여 어쩌란 말이여?
이렇게 끙끙대고 있을 때 이 비유가 하늘나라 비밀을 가르키고 있음을 말한다. 끙끙대며 알고자 하는 호기심을 극대화 시킨뒤 알려줘 효과를 높힌다.
이렇게 비유는 원관념을 감춰 쉽게 알아내지 못하게도 할 수 있고 경험에 비추어 쉽게 알 수도 있게 하는 기능이 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하늘나라의 비밀이 무엇이라고 알고 깨달았을까?
씨뿌리는자의 비유가 가르키는 하늘나라 비밀의 본질은 씨가 말씀이며 씨 뿌리는 자는 말씀을 전하는자로 똑 같은 말씀을 전해도 조건에 따라 깨닫는 결과는 달라진다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작동방식은 똑 같은 원인라도 조건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 조건은 개인이 처한 사회적 환경일 수도 있고 개인의 인격적 특성이나 믿음의 성격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밭이 여러 상태가 혼재되어 조건을 이룬 것처럼 말씀을 받는 각 개인도 조건이 혼재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건은 늘 변하기 때문에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비유는 주께서 대중을 대상으로 말씀을 전하는 상황의 비유인데 상황을 소수의 대상으로 전환 시키면 씨를 뿌리는 사람이 각 사람의 근기(根氣)에 맞게 먼저 길가 같은 땅을 파해치고 바위를 치우며 덤불을 없애고 나서 응병여약(應病與藥)으로 말씀을 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말씀을 받으면 깨닫기 까지 뺏기지 말자!
어떤 고난 속에서도 넘어지지 말자!
말씀을 들을 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빠져 헤매지 말자!
늘 깨어있어 말씀을 듣는 즉시 깨닫자!
깨달음은 듣는 즉시 번개처럼 올 수도 있고 앎과 체험을 통해 서서히 올수도 있다. 번개처럼 단박에 얻은 깨달음을 돈오(頓悟)라하고 서서히 얻는 깨달음을 점오(漸悟)라하며 단박에 깨닫고 닦을 것이 없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있고 단박에 깨닫고 서서히 닦아야 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있는데 전통기독교 입장에서는 깨달음과 거듭남으로(頓悟)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는(漸修)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본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은 아하! 하고 모든 의문이 풀려버리는 것이며 귀가 열리고 눈이 떠져 하나님나라가 여실히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나의 에고와 지식의 개념체계를 뛰어 넘은 데카차원을 여는 하나님나라 그리고 이원대립에서 불이(不二)의 하나님 나라를 살게한다.
이제 일상에서 판단과 선택 그리고 행함이 아버지의 뜻과 일치 되는 온전한 메타노이아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비로소 우리 눈은 봄으로, 우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2022. 3. 20. 평화🙏
샬롬!
작성자 22.03.20 20:44
첫댓글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가 불가의 선종에서 법을 전하고 깨달음의 길을 갈 때 불립문자라고해서 할이나 몽둥이나 주먹이나 화두나가 전부로 아는데 오히려 붓다는 죽는 날까지 말로 법을 설했다
 씨알
22.03.23 07:23
아하!...
용타스님께 배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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