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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영성

죄(罪)에 대하여

작성자호건|작성시간26.06.21|조회수1 목록 댓글 0

죄(罪)에 대하여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창세기 4장 7절)

죄무자성종심기
(罪無自性從心起)
죄종심기장심참
(罪從心起將心懺)
(예경, 참회문)

오늘은 조금 무겁지만 외면할 수 없는 주제, 인간의 실존적 한계상황으로서의 '죄(罪)'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옛날 어른들은 어려움이 닥치면 흔히 내가 뭔 죄를 지어서 이런 일을 당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곤 했었죠.
그만큼 무의식적으로 죄라는 말이 삶의 심층에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어 현재의 상황을 죄의 문제로 해석하려고 했던것 같습니다.
​죄를 한자로 쓰면 그물 망(罒)과 아닐 비(非)가 합쳐진 '罪'가 됩니다. 여기서 '罒'은 법과 규율이라는 사회적 테두리(법망)를, '非'는 도리에 어긋나고 그릇된 행동을 뜻합니다. 즉, 자형(字形) 그대로 풀이하면 "해서는 안 될 그릇된 일을 저질러 법이라는 그물에 걸려들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와 같은 실정법을 어긴 좁은 의미의 죄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죄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국가라는 사회공동체가 법을 제정하기 이전부터,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규율하고 얽어매던 원초적이고 실존적인 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적 그물망 이전부터 인간을 옥죄어 온,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한계로서의 죄를 말해온 성서적 전통과 불교전통에서의 입장을 중심으로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먼저 성서의 죄 이해와 불교의 죄(罪)이해는 존재론적 전제가 다름을 봅니다.

1. 성서에서의 죄:
성서에서 말하는 죄는 관계적이면서도 실체적 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죄는 주로
하타(חטא)또는 하마르티아 (ἁμαρτία) : 과녁을 빗나감
아본(עון) 또는 아디키아(ἀδικία) : 비뚤어짐, 왜곡
페샤(פשע) 또는 파라코에 (παρακοή) : 반역, 의도적 불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이 세가지 말은 주로 神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쓰여집니다. 그러면서 죄라는 놈이 실체적으로 있어 관계에서 실재적으로 작용한다고 봅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죄를 단순히 '인간이 짓는 나쁜 행동' 수준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고 속박하는 거대하고 파괴적인 세력의 실체로 말했습니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보면 신의 뜻과 약속이 먼저 있고 그 뜻과 약속이 관계를 규정하는데 죄는 그 뜻과 약속에서 벗어나게 하고(하타), 뜻과 약속을 내적으로 마음이 뜻과 약속을 왜곡하고 거부하게 하며(아본), 뜻과 약속을 배반, 불순종(페샤)하게 하는 실체입니다.
여기서 죄는 단순히 “행위”만을 말하지 않고, 상태(state)를 말하기도 합니다. 특히 신도 모르고, 신의 뜻과 약속을 몰라 따르거나 지키는 관계가 아닌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라도 죄의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포괄적으로 죄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난 상태로 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타락 서사 이후 인간은 신과 유리되어 자기중심성에 기울어진 존재가 됩니다.
즉 죄는 하나님의 뜻과 약속에서 에서 벗어난 존재 상태, 왜곡된 욕망, 관계 단절에 따른 소외 입니다.
그러면서 성서에서의 죄는 행위(act)이기도 합니다.
그 행위는 구체적으로 율법을 제정해 기록하고 지키도록 명합니다.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지켜져야할 법이 십계명을 비롯한 많은 규례로 정해져 지키도록 명했고 그 법을 어기는 행위를 죄로 규정하고 그에 따른 형벌 또한 정해졌습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 율법은 죄의식을 가지게 하거나 죄의 기준을 알게 할 뿐 죄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없다는 사상이 싹트면서 예수의 사랑과 헌신 비움과 순종 그리고 믿음으로 율법이 완성 되었다고 선언하며 관계가 율법이 아닌 믿음과 사랑으로 재정립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죄는 죄형법정주의에 따른 좁은 의미에서의 법을 어긴 행위 보다 그 마음까지도 포함한 포괄적인 의미로 말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성서에서의 죄는 실체로서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작용하는 관계적 실재입니다.
즉 “죄라는 실체”도 있고 작용하는 힘(power)도 실재합니다. 죄가 실체이기 때문에 대적하여 싸워 이겨야 되고 죄에 지면 대가로 죄값을 감당해야 됩니다. 성서에서는 죄를 실체로 보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더욱 죄의 삯이 죽음이라 하여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인류 모두의 죽음이라는 삯을 대신 했다고 해석하여 스스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듭니다.
차후에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지만 기독교에서 죄로 부터 벗어나는 길은 자기를 비우고 사랑으로 채운 예수의 죽기까지 순종한 믿음위에 나의 믿음을 얹어 예수 안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 갈 수 있도록 전존재를 전환하는 메타노이아입니다.

2. 불교전통 에서의 죄
불교전통에서 죄를 보는 대표적인 말이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라는 말입니다. 즉 “죄는 고정된 실체적 자성(自性)이 없고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 말의 출처는 華嚴經 계통의 참회 게송, 특히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이나 장수멸죄호저동자경(長壽滅罪護諸童子經) 에 근거한 예불·참회문입니다.
대표적인 전체 문구는 보통 이렇게 전승됩니다.
罪從心起將心懺
心若滅時罪亦亡
心亡罪滅兩俱空
是則名為眞懺悔
(죄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니 마음으로 참회하고,
마음이 멸하면 죄 또한 사라지며,
마음과 죄가 둘 다 공하면,
이를 진정한 참회라 한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죄를 독립적 실체로 보지 않습니다.
죄는 본래 자성이 없습니다
무명과 집착이 일으킨 마음작용일 뿐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죄의 자성(自性) 없음(空) 입니다. 자성이 없어 공하다는 말은 본래 죄가 고정된 실체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조곤따라 형성 된 것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불가의
죄는 탐(貪)•진(瞋)•치(癡)
삼독이 조건 따라 일으킨 카르마적 현상에 불과 합니다.
죄라는 실체가 있어 실재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만 죄라고 붙여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참회는 왜 하느냐?
불가의 참회는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죄의 공성을 깨닫고 지혜로써 죄의식을 가지는 마음도 공함을 깨닫는 수행인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성서적 전통과 불교적 전통의 존재론적 관점에서의 가장 큰 차이를 보면
궁극적 기준이 성서에서는 신이라면 불교에서는 연기(緣起)·공(空)이며, 죄의 근원이 성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이탈과 소외라면 불교는 연기(緣起)·공(空)을 모르는
무명(無明)이며, 죄의 실체성이 성서는 관계적으로 실재하고 작용하며, 불교는 자성이 없이 공하다는 점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성서는 회개와 은총을 말하고 불교는 지혜를 닦아 깨달음에 이름을 말 합니다.
더 깊은 차이를 보면
성서에서 죄는 궁극적으로 누군가에게 범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죄는 인격적 관계의 파괴입니다.
반면 불교에서는 죄를
“실체적 상대에게 범한 절대적 위반”이라기보다, 무명이 만든 분별 집착이 만든 업(業 카르마)
으로 봅니다.
죄를 작용(作用)·작의(作意)·작위(作爲)의 틀로 보면 성서의 죄는 죄가 실체적으로 관계에서 작용하여 잘못된 작의(지향) 와 작위(의지적 행위)로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훼손한 상태이며, 불교의 죄는
탐진치가 개입한 작의·작위 이지만 그 자체는 독립 실체가 아닌 공한 작용으로 실체는 없으나 작용은 있지만 작용마저 공한 것으로 봅니다. 궁극적으로 죄라는 상(相)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여 죄에 집착하거나 붙들리지 않도록 합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접점도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깊은 기독교 신비주의(예: Meister Eckhart)에서는 죄를 분리의 착각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는 불교와 가까워집니다.
성서의 심층에서 죄를 하나님과 분리된 자기중심성이라고 본다면 불교의 심층 또한 죄를 실체화된 아상으로 보아
둘 다 결국 왜곡된 자아 중심성을 문제 삼습니다.
지금까지의 여러 말들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성서는 죄를 “관계를 단절하는 실체”로 보고, 불교는 죄를 “무명이 만든 공한 심적 구성”으로 봅니다.
그래서 성서는 죄 값의 용서로 관계의 회복을, 불교는 죄의 공성에 대한 통찰로 상을 지우는데 더 중심에 둡니다.
어느 입장이 되었든 각자의 입장에서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실존적 한계상황으로서의 죄를 좀더 깊고 근원적으로 살피고 벗어나는 길을 찾아 밝고 자유로운 세계를 열어 가시길 기원합니다.
2026. 6. 21(일)
평화 황호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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