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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깨어 바로 보기

작성자호건|작성시간26.06.15|조회수0 목록 댓글 0

깨어 바로 보기

 

가을이 깊어가며 들은 텅 비고 단풍은 더곱게 익어간다.
이런 시절인연들을 잠들어 눈 감은 사람은 볼 수 없다. 깨어 눈떠야 비로소 보인다. 그러나 보인다고 모두 바로 보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각자 경험한대로 나름의 안경을 쓰고 각각 다르게 세상을 본다.
바로 보기 위해서는 제 눈에 안경도 벗어야 되고 몇 겁으로 덮인 티를 걷어 내야한다. 우리가 보고 아는 것이 물자체가 아니라 현상이라면 훗셜처럼 에포케하고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어느 정도 있는 그대로의 현상으로 보고 알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물자체의 본질과 실상을 바로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보고 알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논리적으로 부정과 긍정의 변증적 과정을 거쳐 눈을 뜨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그 하나로 분별상(分別相)을 부정으로 즉비(卽非)하고 무분별지(無分別智)의 긍정으로 시명(是名)하는 즉비시명(卽非是名)의 공식을 사용한다. 또는 중관사상에서 처럼 즉비와 같이 쌍차(雙遮)로 부정하고, 시명과 같이 쌍조(雙照)로 긍정하여 실상(實相)을 보기도 한다. 즉비와 쌍차의 부정은 연기적(緣起的) 세계관을 바탕으로 모든 사물은 자성(自性)이 없어 원인과 조건에 의지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실체로 인정하지 않아 갈애와 탐착을 없애는 것이다. 중국 송나라 시대의 청원 유신(靑原惟信) 선사가 선지식을 만나 깨닫고 보니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이 공성(空性)의 지혜로 보는 단계다.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그냥 볼 때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였다가 공성(空性)을 깨닫고 그 지혜로 보니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대 부정의 문을 연 것이다. 그러나 이 부정만으로 사물을 바로 보고 알았다고 할 수 없다. 부정과 동시에 긍정의 시명과 쌍조의 눈을 떠야 비로소 실상을 바로 보고 알 수 있다.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고 인식할 때 색인하는 범주화 된 개념들을 분별상(相 산냐)이라고 하는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상으로 뇌에서 해석한 것을 실재 보는 것으로 착각한다. 각자의 경험적 해석에 따라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하여 좋아하는 것은 못가져서, 싫어하는 것은 화가 나서
괴롭고 불편한 마음이 생기게 만든다.
이런 해석을 모두 부정한 후 다시 눈을 떠 있는 그대로 바로 보고 알아 괴롭고 불편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궁극의 단계가 시명과 쌍조다. 즉비 쌍차와 동시에 시명과 쌍조를 해야 단견(斷見)의 무기공(無記空)에 빠지지 않는다. 자칫 공병(空病)에 걸려 허무주의에 빠지는 폐해가 있기에 있는 그대로 보고 아는 시명과 쌍조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시명은 실체가 아닌 이름으로만 인식하는 것이요 쌍조는 공성의 지혜로써 연기실상(緣起實相)으로 바로 보는 것이다.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예나 다름이 없지만 산과 물을 보고 아는 인식의 틀이 바뀐 것이다. 이를 괴로움을 일으키는 감각과 지각으로 비롯된 식(識)을 전환하여 지혜로 비춰 보는 전식득지(轉識得智)의 과정이라 한다. 청원선사가 무분별지를 증득 하고서야 '지금에 이르러 마음의 휴식처를 얻으니 (진정한 깨달음으로 괴로움을 여의고 보니), 여전히 산을 보니 그대로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이다(而今得箇休歇處 依然見山是山 見水是水)라고 있는 그대로 실상을 바로 본 경지를 말했다.
비로소 동시에 부정과 긍정으로 여실지견(如實知見)하여 괴로움을 여읜 마음의 안식처를 얻은 것이다. 진정한 마음의 안식처는 보이는 대상과 보는 내가 하나가 되는 자리다. 청원유신과 퇴옹성철선사는 눈을 떠 바로 보고 그 자리에 앉은 것이다.
가을이 깊어간다.
낙엽즉비낙엽 시명낙엽(落葉卽非落葉 是名落葉)이니 좋아할 것도 싫어할 것도 아니다. 그저 이름일 뿐이니...
이제 깨어, 있는 그대로 바로 보고 아는 눈을 떠 좋아하고 싫어해서 생기는 괴로운 마음에서 벗어나 평안을 찾아보지 않겠는가?
11.23.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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