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경설 음무난멸(盜寃竟雪 淫誣難滅)
도둑의 원죄는 끝내 눈처럼 할 수 있지만,
음탕한 꾸밈은 없애기가 어렵다.
盜 : 도둑 도
寃 : 원통할 원
竟 : 마침내 경
雪 : 눈 설
淫 : 음탕할 음
誣 : 무고할 무
難 : 어려울 난
滅 : 꺼질 멸
도적(盜賊)의 원죄(原罪)는 끝내 눈처럼 할 수 있지만,
음탕(淫蕩)한 꾸밈은 없애기가 어렵다.
도적의 누명은 장물이라는 물증이 있기 때문에
벗을 수 있으나 화냥(花娘)의 누명은
흔적이 없으므로 밝히기 어렵다.
여자가 부정한 짓을 했다는 누명은
밝힐 도리가 없기 때문에
품행을 방정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담속찬(耳談續簒)에 다음과 같은 구절(句節)이 실려 있다.
(盜寃竟雪 淫誣難滅 言有臟故可證 無跡苦難暴)
(도원경설 음무난멸 언유장고가증 무적고난폭)
도적(盜賊)의 누명(陋名)은 쉽게 벗을수 있으나
화냥(花娘)의 때는 벗기가 어렵다.
이것은 도적(盜賊)의 누명(陋名)은 장물(臟物)이기 때문에
증명(證明)할 수가 있으나 화냥(花娘)의 때는
자취가 없기 때문에 밝혀 내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옛(古)부터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莫論)하고
여자(女子)는 신비스러운 존재(存在)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여자(女子)에 관한 속언(俗言)
또한 범람(氾濫)하게 마련이었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계집 마음속은 모른다.”는 말은
여자(女子)의 마음은 감잡을수가 없다는 뜻이다.
“계집은 상(床)을 들고 문(門)지방을 넘으며
열두가지 생각을 한다.”는 말은
여자(女子)는 언제나 복잡한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의미(意味)이다
이렇게 여자(女子)란 존재(存在)를
무정형.무고정의 상태(狀態)로 파악(把握)하다 보니
여성(女性)에 대한 경계(境界)의
관념(觀念)이 싹 트게 된 것이다.
“계집의 독한 마음 오뉴월 서리친다.”는 속언(俗言)은
여자가 한번 원한(怨恨)을 품고
저주(詛呪)를 하게 되면 매섭고 독(毒)하다는 뜻이다.
“여자(女子)는 돌리면 버리고
접시는 빌리면 깨진다.”는 말은
여자가 너무 밖으로 나다니다 보면
몸(身)과 마음을 망치기 쉽다는 뜻이다.
“여자(女子)는 사흘 만 안 때리면 여우가 된다.”는 말은
여자는 때때로 훈계(訓戒)를 하지 않으면
간사(奸詐)한 짓을 하기가 쉽다는 뜻이다.
“여편네 활수하면 벌어 들여도 시루에 물 붓기”란
속담(俗談)이 있는데 이는 손 큰 여편네의
낭비벽(浪費癖)을 경계(境界)하여 일컫는 말이다.
또 여자들의 말 많은 것은 재앙(災殃)만 불러오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여
“여자가 셋이면 나무 접시가 드논다.”
“계집 입 싼것”이라는 속언(俗言)이 생겼으며
여자란 존재는 아무리 똑똑해도
할일 못 할일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여
“치맛자락이 똑똑하면
승전(勝戰)막이 갈까.”라는 말도 오르내렸다.
또한 남자(男子)들에게 주는 교훈(敎訓)의 의미(意味)로써
“여자(女子)의 말을 잘 들어도 패가(敗家)하고
안 들어도 망신(亡身)한다.”는 속담(俗談)이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남자는 여자의 말이라도
올바른 말은 들어야 하고 간악(奸惡)한 말은
아무리 혹(惑)한 계집의 말이라도
필히 물리쳐야 하다는 뜻이다.
“게집의 매도 너무 맞으면 아프다.”라는 속언(俗言)은
아무리 좋은 사이라도 너무 함부로 하면
불괘한 법인즉 가까운 사이에서도 지켜야 할
예절(禮節)은 꼭 지켜야 한다는 의미(意味)이다.
아무튼 예(古)나 지금이나 동서양(東西洋)을 막론(莫論)하고
여자(女子)는 남자(男子)들이 이해(利害)하기
어렵고 복잡하였던 것 같다.
사람들이 평소 남자관계(男子關係)가 복잡한 여자(女子)를
나쁘게 욕(辱)할 때“화냥년(花娘女)”
그리고 버릇없는 못된 사람 주로 남자(男子)를 말할 때
“호로자식(胡虜子息)”이란
욕(辱)을 하는 경우(境遇)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욕(辱)들의 유래(由來)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것 같아
역사적(歷史的)인 유래(由來)를 살펴보고자 한다.
1636년 후금(後金)은 국호(國號)를 청(淸)으로 바꾼 후,
정묘약조(丁卯約條)에서 설정(設定)한 형제관계(兄弟關係)를
폐기(廢棄)하고 새로 군신관계(君臣關係)를 맺어
공물(供物)과 군사 3만명을 지원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조선(朝鮮)이 거부(拒否)하자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朝鮮)을 침략(侵略)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켰다.
대군(大軍)에 밀린 조선군(朝鮮軍)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1만3천의 군사(軍士)로 진(陣)을 쳤지만
세력의 열세(劣勢)로 45일만에 항복(降服)하고,
인조(仁祖)는 삼(三田渡)에서 무릎을 꿇고
청(淸)과 군신(君臣)의 의(義)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청(淸)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리고 척화론(斥和論)을 펼치던
홍익한(洪翼漢).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 등도
청(淸)으로 끌려 갔다. 뿐만 아니라 청군(淸軍)들은
철수(撤收)하면서 상당히 많은
조선인(朝鮮人)들을 끌고 갔다.
인조(仁祖)의 항복(降服)으로 전쟁(戰爭)이 끝났다고
온 백성들이 좋아하다 보니 며칠 후 백성들이
궁궐(宮闕) 앞에 모여 들어 청(淸)나라에 끌려간
딸과 며느리는 물론 아내를 구해 달라고 아우성 치고 있었다
인조(仁祖)는 청(淸)에 끌려간 인원(人員)을 조사해보니
대부분 뷰녀자(婦女子)들로서,그수가 50만 명이나 됨으로
청(淸)에 사신(史臣)을 보내어 돌려
보내 줄 것을 요구(要求)하였다.
그러나 청(淸)나라는 끌려간 사람들을
등급(等級)을 매겨 놓고 엄청난 돈을 요구함으로
인조(仁祖)는 하는 수 없이 백성들이 각자
재산(財産)을 팔아서 그 돈으로 청(淸)나라에 가서
데려 오도록 하여 상당수의 여자(女子)들이
고향(故鄕)으로 돌아왔다
이 때 청(淸)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女人)들을
還鄕女(환향녀)라 부르면서 온 동네에서
고생(苦生)하고 돌아왔다고 위로(慰勞)를 해 주었다
그런데 이 환향녀(還鄕女)들은 청(淸)나라에 끌려 가서
못된 성관계를 배워 와서 온 동네 남자들을
모두 해 치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여자들이 사회 문제화되고 있으나
국가에서 묘한 방법이 없으므로 그 대책을
각 가정에서 단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각 가정(家庭)에서는 노인들이 밤낮으로
대문을 걸어 잠그고 부녀자들의 바깥 출입을
못하게 하였음은 물론, 부득이 외출을 할 때도
치마 같은 것을 뒤집어 쓴 후 눈만 내놓고 다니게 하고
게다가 감시자를 동행케 하였다.
이때부터 환향녀(還鄕女)를
화냥년(花娘女)이라고 하며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호로자식(胡虜子息)은 이들 환향녀(還鄕女)이 돌아올 때
이미 임신을 한 경우가 많아, 거기서 낳은 자식을
호로(胡虜) 즉 오랑케 자식이라 하여 사회에서 냉대하였다.
환향녀(還鄕女)나 호로자식(胡虜子息)들은
멸시의 대상이 아닌 피해자들이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했다.
왜냐하면 왕이 평소에 국가의 안보를 튼튼히 하지 못했고
또한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여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고,
전쟁이 나자 왕 밑에 신하들은 왕을 홀로 두고
도망가기 바빴고 또한 남자들이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결국 나약한 여성들만 끌려가서
청군들의 노리개가 되어 처참한 노예생활을 하다
돌아왔는데 조선에서는 전쟁에 대해 책임지는
자가 없이 모든 것을 불쌍한 여자들에게 만
죄를 뒤집어 씌운 가슴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