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2026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복음ㅣ 리처드 로어 신부님, 벌거벗은 지금, 2부 예수의 경우는 어떠한가?
작성자어리니작성시간26.06.17조회수46 목록 댓글 0
예수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원적 생각의 틀로는 무엇이든지 가르고 나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예수를 신으로'만' 이해하고 사람을 사람으로'만' 이해한다.
아무리 성경 본문과 신비주의 사상가들이 그렇지 않다고 말해도 소용없다.
이 분리를 극복하는 데에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신 사건'의 요점이 있다.
그러나 전체 그리스도교와 개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육화의 비밀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출현인
예수 안에 나타난 '위대한 나인 나 the Great I AM'가 첫 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도 감동적인 것이어서,
그 뒤로 계속 유지되어야 할 그분의 인성과 신성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실은 그분의 인성이 좀 더 강조되었어야 했다.
실제로 예수가 자신을 가리킬 때 쓴 유일한 칭호가,
네 복음서에 87회나 등장하는 '벤 아담ben adam,
곧 '사람의 아들'이었음을 기억하라.
예수는 실제로 강조하여 말한다.
"나도 그대들과 같다." 그대들과 같은 유한한 사람,보통사람이다!
우리는 그분의 신성에 사로잡혀서,
그분이 그토록 분명하게 밝힌 인성에 대한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역사의 대부분이 자기네가 단죄한 바로 그 이단으로 채워져 있다.
덕분에 우리는 예수를 신성만을 지닌 존재로 생각하여
당신 스스로 밝힌 인성을 놓치거나 외면하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균형을 볼 수 없었고,
아마도 그래서 나 자신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을 함께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원론의 틀에서 보면 언제나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둘 다일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영적 존재가 되고자 갖은 애를 쓰는 단지 인간일 뿐인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자체가 너는 이미 영적 존재라고(하느님 안에 있다고),
따라서 어렵지만 네가 해야 하는 과제는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가르치는데도 말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온전한 통합의 모델1코린 15,47-49로 오셨고,
사실상 하느님은 모든 사람 눈에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는,
예수 자신처럼 생겼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여전히 상처 입고 부족하고
사랑도 못하고 자기를 미워하고 깨달아야 할 것이 많은 존재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영적 존재가 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그 결과는 가련할 따름이다.
예수는 동시대인들에게
당신의 오묘한 신비 앞에서 겸손과 인내를 지니라고 경고하는 듯하다.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또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요한 8,14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 다."마태 11,27
그분은 신이면서 인간인 존재의 신비를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대로 감수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신 것 같다.
예수의 기도
1. 예수 자신은 특정한 시간에 드리는 전례기도, 공동기도, 말로 하는 기도보다
조용히 은밀하게 드리는 기도를 선호한 듯하다.
2. 기도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
⑴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마태 6,5 여러 사람이 듣게 하는 기도를 그분은 경계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
개인기도로 공동기도를 받쳐주고 두 가지 기도의 균형을 이루려 하는 것 같지 않다.
(2)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6
당시 사람들은 집 안에 혼자 쓰는 방이 따로 없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상당히 예외적이고 특별한 주문이었다.
(3)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6,7 이 말씀 또한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분명한 요구다.
그런데 오히려 그리스도교회들(가톨릭, 정교회,프로테 스탄트)은
이 말씀을 외면하고 공동기도 시간에 많은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덕분에 우리 성직자들이 쓸모 있는 존재로 대접받지만.)
3.
단체들은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 모임Alcoholics Anonymous의
〈평온을 비는 기도〉처럼,
자기들만의 공식적인 기도를 드림으로써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자기들이 누군지, 영성이 어떤 것인지를 그 기도가 천명해 주는 것이다.
정해진 예배형식에 따라 소리 내어 드리는 공동기도 형식을 중요시하면서
사람들 각자 안에서 그분을 경험할(성령 안에 거할) 기회를 충분히 만들어 주지 못할 때,
종교는 하나의 사회적 계약 로 남게 된다.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문화적 그리스도교 또는 시민 종교라고 부른다.
그런 현상은 그리스도교보다 이슬람교에서 더 쉽게 볼 수 있다.
예언자들이 그토록 자주 사제직과 희생제사와 제단을 비판한
예레 7,1-11; 이사 1,11-17; 아모 5,21-24; 호세 6,6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동기도는 단체나 종교를 하나로 묶어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깊은 차원에서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실제로 우리가 속해 있는 종교의 결속이
우리 자신의 진정한 구도행각을 대신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실제로 교회 현장에서 성직자들이
매일 미사를 집전하고 빠지지 않고 성무일도를 바치지만,
내면적으로 성숙한 삶을 보여주지 못하는 사제들을 만날까 봐 두렵다.
아마도 그 것은 개인의 허물이라기보다 구조적 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공동기도는 하느님께,
또는 단체나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발표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예수는 그것이 사실상 필요 없는 짓 이라고 말한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이 모든 예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겉으로 소리 내어 하는' 기도와 균형을 이루기 위하여
'속으로 말없이 드리는' 묵상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말없이 드리는 기도의 경험이 거의 없고,
오히려 그것을 겁내거나 비난하는 사람조차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지나치게 분주한 생각들을 다스리는 법에 대하여 배운 바가 없고,
그래서 침묵을 겁낸다.
내면의 충실한 삶이 없으면,
머잖아 겉으로 하는 우리의 기도가 자아 중심적 겉치레가 되고
영적 여정을 거역하는 장애가 될 것이다.
서구 문화는 외향적 문화,
'할 수 있다' 문화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기도 또한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는 대신,
내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하느님까지 바꾸려는 시도를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자를 바꾸기 위한 내적 수련이다.
두려우면서도 지극히 안전한 하느님의 현존 앞에 조용히 서서,
'하느님의 눈길'이 우리 동기와 행동의 95퍼센트가 나오는
무의식에 침투하여 치유하도록 맡길 때 그 일은 언제나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