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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자료

[스크랩]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창설(1907. 9)

작성자sarmy|작성시간08.05.10|조회수424 목록 댓글 0

1. 한국교회의 대부흥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章台峴敎會)를 중심으로 평양지방을 시발로 하여 한국교회에 부흥의 일대 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조선예수교사기(朝鮮예수교史記)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1903년 원산(元山)지방의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창전교회(倉前敎會)에서 일주일간 기도회와 성경공부를 하는 사경회를 집회하는 기간에 감리회 선교사 하디(R.A.Hardie 河鯉泳)가 크게 은혜를 받았으며, 1904년 1월에 원산에서 다시 연합사경회를 통하여 장로회 선교사 로브(A.F.Robb (鄴亞力)가 큰 은혜를 받아 여러 날 금식 통회하며 간구함과 전도 활동을 하였다.

 

이 집회를 통하여 성령의 충만한 은사가 임한다는 사실을 전하여 듣고, 1906년 8월 평양의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은 하디(河鯉泳)선교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었는데 그 때 성신의 감동을 받아 평양교회 제직들을 회집하여 1주일간 성경공부를 하는 동안 제직들이 은혜를 받기 시작하였고, 10월에 다시 집회를 개최하던 중 미국 존스톤(Rev.Howard Agnew John Ston)목사의 인도와 영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한 가르침에 신자들은 많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 중 길선주(吉善宙)장로가 성신의 은사를 크게 받았다.

 

이듬해 1907년 1월 6일부터 10일간 평양 장대현교회(章台峴敎會)에서 한국신자들과 선교사들이 모인 도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많은 신도들이 통곡과 회개의 자복으로 교회와 심령이 크게 부흥하여 매일 남자들만 1,500여명이 참석하였고, 여자 신도들은 들어올 자리가 없어 밖에서 자리를 만들어 참석하였다. 

 

  길선주 장로가 1개월을 더 계속하여 사경회를 인도하는 기간에 수 천명의 교인이 중생의 성신세례를 받았고, 이러한 부흥의 여파가 각 학교에도 파급되어 숭덕학교의 300여명의 학생들이 통회 자복하는 은혜를 받았으며, 감리교 학교 학생과 숭실대학과 신학교를 비롯 여러 학교에서 부흥의 물결이 높아갔다.  사경회가 끝난 후 선교사들과 한국지도자들은 전국 지방으로 분산하여, 이길함은 선천으로, 소알론은 광주로, 헌트는 대구로, 길선주는 의주와 서울로, 게르딘은 전년에 이미 목포로 떠나 부흥의 불길을 집혔다.

이러한 부흥의 불길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교인의 수가 1년 동안에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고, 그 후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의 선두적 부흥운동으로 한국교회의 부흥이 크게 일어났다.

 

  ◆ 부흥기간의 장로교 교세 증가표

년 도

교회수

전도소 수

세례교인수

학습교인수

헌 금(원)

1905

321

470

9.761

30.136

1.352.867

1907

642

1.045

18.964

99.300

5.319.785

증가율

200

222.3

194.2

329.5

393.2

 

1907년의 부흥운동의 성격은 성서교육을 중심으로 하여 시작되었음으로, 그 내용이 성서적이며 건전한 신앙을 바탕으로 했기에 광신적 비 성서적인 요소가 잠재하지 않았으며, 순수한 영적 부흥 운동과 도덕적 운동을 추진함으로 당시 사회적으로 타락하고 범죄한자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주안에서 새 사람으로 변화되게 하였다.


부흥 운동의 영향으로 선교사들과 한국인들간의 견해의 차이로 선교사들의 우월적 의식과 한국교인들의 위축된 의식 및 배타성 또는, 개인적인 문제의 요소 등이 부흥 운동을 통하여 서로가 상호 이해하고 자성함으로 화해의 기운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개 교회 중심, 개인의 영혼 구원의 문제에만 중시했던 신앙에서 교회의 공동체적 개념으로 변하여, 나 혼자의 개념에서 우리들의 개념으로 개 교회 중심에서 교회와 교회간의 연합적 공동체의 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1907년에 독노회의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 신앙적 향상에 있어서도 신앙생활의 핵심이 성경공부와 기도회와 전도사업이었고 이때를 계기로 모든 신앙인들의 신앙 생활의 요소가 되어 오늘에까지 이어져 오게 되었으며, 새벽기도회는 길선주목사가 시초로 일으킨 신앙운동이기도 하다. 이렇게 부흥운동을 통하여 개인과 교회는 높은 영적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2. 독노회(獨老會)의 창설과 공의회 시대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되기 전 공의회시대(公議會時代 1893~1906)에 대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朝鮮예수교長老會史記)를 중심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선교사 공의회 시대(宣敎師公議會時代 1893~1900)

기독교가 1884년에 한국에 전교 된 후 교인의 수와 교회의 수가 많이 늘어나게 되었으나, 이를 치리 하는 상회가 없었으므로 외국선교사들이 1893년 1월 28일에 공의회를 조직하여 전국교회를 치리하는 상회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초대 회장에 이눌서(李訥瑞)선교사가 맡아보았다.

 

  2) 합동 공의회 시대(合同公議會時代 1901~1906)

1901년 9월 20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한국인 장로 3명과 조사 6명 선교사 25명이 모여 한국인과 선교사가 합동공의회를 조직하여 그 명칭을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朝鮮耶蘇敎長老會公議會)라 부르게 되었고, 초대 회장에 소안론(蘇安論)선교사가 맡아 보았다.

 

   3) 독노회의 창설(1907.9.17)

한국교회가 크게 부흥하게 이르자 공의회에서는 총회의 전신인 조선예수교장로회독노회(朝鮮예수교長老會獨老會)를 창설하기로 결의하고, 1907년 9월17일 평양장대현교회에서 한국인 장로 40명 선교사 38명 도합 78명이 모여 독노회를 조직하니, 회장에 선교사 마포삼열(馬布三悅), 부회장 방기창(邦基昌), 서기 한석진(韓錫晋), 부서기 송인서(宋麟瑞), 회계 이길함(李吉咸)선교사가 선출되었다.

 

 

○ 독노회에서의 중요 처리 사항으로

   ◇ 첫째, 1901년에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인 서경조(徐景祚) 방기창(邦基昌) 한석진(韓錫晋) 양순백(梁旬伯) 송인서(宋麟瑞) 길선주(吉善宙) 이기풍(李基豊)이상 7인을 목사로 안수하였다.

   ◇ 둘째, 목사 이기풍(李基豊)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 하였다.

   ◇ 셋째, 전국적인 노회의 회집을 수시로 개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7개 처에 대리회를 조직하여 노회의 위임사항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 대리회(代理會)의 조직 명칭은

   ◇ 경기 충청(京畿 忠淸) 대리회 …… 50교회

      평북(平北)           대리회 ……160교회

      평남(平南)           대리회 …… 89교회

      황해(黃海)           대리회 …… 47교회

      경상(慶尙)           대리회 ……186교회

      함경(咸鏡)           대리회 …… 78교회

      전라(全羅)           대리회 ……127교회

로 조직하였으며 독노회 조직 당시 전국 장로회의 조직 상황은

노 회

소회(대리회)

당회(조직교회)

미조직교회

교회건물

1

7

38

984

687

 

◇외국선교사 49명 ◇한국선교사 7명 ◇장로 47명 ◇조사 160명

  ◇장립집사  180명

  ◇세례교인 18,081명 ◇학습교인 19,789명  합계 72,968명의 교세를 가졌다.

 

 

 

고신총회의 역사와 이념


필자는 본 고에서 고신 총회의 조직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고 거기에 다라 고신 정신을 추출하여 미래를 전망하고자 한다.

한국장로교는 1885년 4월 5일 미국북장로교 원두우 선교사(H. G. Underwood)가 인천에 상륙함으로서 시작되었다. 1907년 조선장로교 독노회가 조직되었고 1912년 9월 1일에는 총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1938년 신사참배 결정으로 인하여 교회는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본 총회는 ‘신구약성경과 장로회 표준문서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교리문답, 교회 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에 의한 개혁주의 신학을 따라 믿고, 전하고, 생활한다.’(제 27
총회 가결 공포)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한국교회박해


일본의 기독교박해에 대한 배경은 신도주의(神道主義)에서 그 배경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개국신 천조대신 800만 수호신을 섬겨 왔는데 천황은 현인신(現人神)이라 하여 살아 있는 신으로 받들었다. 이 신들을 모신 곳이 신사(神社)인데 한국에도 조선신궁을 지어 참배케 하였다.


기독교말살정책으로 교회사찰(敎會査察),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과 기독교지도자포섭, 국방헌금(國防獻金) 명목의 교회 연보수탈, 교인 우선적 징용, 성종헌납(聖鐘獻納), 찬송가 가사수정, 성경(구약)제한과 절제운동, 주일학교대회, 기독청년회 등의 기독교단체들을 해체하였다.


기독교 박해와 신사참배 결정


일본은 1909년 초대(初代) 통감(統監) 이또오히로부미(伊藤博文)를 보내 조선의 무단통치 (武斷統治)를 시작하였으나 이또오히로부미는 만주 할빈역에서 안중근(安重根)에게 저격당하여 죽고 2대 통감으로 데라우치(寺內正穀)를 보내 1910년(庚戌)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을 강점(强占)하였다. 이로서 고종황제(高宗皇帝)는 사실상 폐위되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로부터 시작되어 519년 간 이어오던 조선 왕조는 끝이 났다.


1931년 6대 총독 우가끼잇쎄이(宇垣一成)에 이어 1936년 7대 총독으로 미나미지로(南次郞)가 부임하여 본격적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하게 되었고 기독교탄압도 표면화되었다.
1938년 2월 총독부는 각 교회에 공문을 보내 시국인식 철저, 국기 게양 탑 건설, 국기 경례, 동방 요배, 국가 봉창, 황국신민서사 제창, 서력 사용 금지, 찬송가 가사수정 등을 시달하였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 27회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다. 신사참배를 최초로 결의한 노회는 평북노회다. 1938년 2월 9일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계속해서 23개 노회 중 17노회가 신사 참배를 결의했다.


1938년 9월 10일 서문밖교회당에서 모인 제 27회 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씨의 사회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오후에는 김길창 씨의 인솔로 평양 신사에 참배하였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일본의 탄압


평양신학교 교수와 학생들이 반대하였다. 이기선 목사, 최정민 목사, 김의창 목사는 평안북도, 황해도의 교회들을 순방하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폈고 전국에서 많은 반대 운동자
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모여 신사참배 하는 학교에 자녀를 보내지 말 것과 신사 참배하는 교회에 출석하
지 말고 가정예배를 드릴 것이며 새로운 교회를 신설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1943. 5. 7 제 31회 총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를 해체하고 일본기독교조선 장로교단을 조직하기로 가결하였다. 또한 일면(一面)에 일교회(一敎會)로 통합하고 성경을 고치고 구약을 금지하고 찬송가 가사를 삭제 정정 토록함과 교회당 안에도 신단(神壇)을 건립하고 예배는 동방요배로 시작하고 뜰에는 일장기를 게양하도록 함으로 교회는 속속 문을 닫고 신사참배자들과 일본 앞잡이들이 교회를 주관하게 되었다.

교회 재건과 신학교 문제

1945년 8월 17일 평양형무소 옥문이 열려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등 20여명이 출옥하여 한국교회 재건을 착수하였다
이들은 이미 옥중에서 구상했던 한국교회의 재건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교회재건 방법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였다.


밖에서 불러내는 방법으로 신사 참배한 교회당과 교인은 놓아두고 나오는 것과 현실교회
내에 들어가서 가르쳐 회개에 동참케 하는 방법인데 후자를 택했다.
1946. 6. 23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가 만주 동북 신학교 교수 박윤선 목사와 같이 고려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진해에서 신학강좌를 시작하여 9월 20일 부산 구 일신여고에서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다.


1946. 7. 9. 경남노회 제 47회 임시노회는 고려신학교 설립을 인가하고 환영하였다. 그러나 12. 3에 열린 제 48회 노회(노회장: 김길창)에서는 고려신학교 인가를 취소하다. 이 때 한상동 목사가 “불순한 태도를 고침이 없는 경남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 노회를 탈퇴한다”고 선언하다. 1947. 3. 10 구포교회당에서 임시노회가 모여 노회장 김길창 목사와 전 임원이 사면하다. 1947. 4. 9 송상석 목사가 만주로 가서 박형룡 박사를 모셔와 10. 14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47. 12. 9 제49회 경남노회가 부산 광복교회당에서 모여 한상동 목사가 노회 탈퇴 선언을 취소하고 노회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1948. 9. 20 제49회 임시노회가 부산 항서교회당에서 모여 박형룡 박사 고려신학교 교장 사면 건, 미국 정통장로교와 성경 장로교소속 선교사 교수 채용 등을 이유로 고려신학교 인가를 취소하였다.


이로써 경남노회에는 고신을 반대하는 자와 지지하는 자로 다시 분리되었다.
1949. 4. 23. 대구에서 모인 제35회 총회는 노희의 고려신학교 학생 추천 반대를 결정하였고, 1950. 4 대구제일교회당에서 모인 제36회는 경남노회 총대 문제로 옥신각신 하다가 정 회되었는데 두 달 후 전쟁이 터졌다. 1951. 5. 24 부산 중앙교회당에서 열린 제36회 총회에서 경남노회 총대를 제외시켰다.


총노회 조직과 합동

이와 같은 불가피한 형편에 따라 1952. 9. 11 진주 성남교회당에서 이약신 목사 사회로 총 노회를 조직하다. 이 때 선출된 임원은 회장 이약신 목사 부회장 한상동 목사 서기 홍순탁 목사 회록서기 오병세 목사 부회록서기 윤봉기 목사 회계 양진환 장로 부회계 김인식 장로였다. 이 때 이약신 목사가 읽은 총노회 조직 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현 대한예수교 장로회는 본 장로회 정신을 떠나서 이교적으로 흐르므로 이를 바로잡아 대한예수교 장로회를 계승하기 위하여 총노회를 조직한다.”


총노회는 신사참배 죄, 미소기 바라이한 죄, 공적, 사적 회개하는 기간을 정하고 통회 자
복하되 목사 장로 전도사는 일체 공적예배 인도와 성례주례와 공중기도를 중지하고 3개월
동안 근신하기로 하였다.


한국교회의 분열을 마음 아프게 여기던 지도자들은 1960. 9. 20 제10회 총회에서 승동측과 합동을 추진키로 가결하였다. 이 때 합동 기념으로 고신측에서 사용하던 새찬송가를 발행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합동 총회는 합동 정신을 준수하는 일과 고신 신앙 노선에 위배되는 일이 많아 여러 차례 시정을 요구하고 노력였으나 효과는 없어 결국 1962. 10.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하였다. 부산노회의 환원 결의에 이어서 경기, 경북, 진주, 전라, 경남노
회 등이 환원을 결의하였다.

고신의 이념과 미래 전망

고신 교단의 문제점은 그 원인이 고신 정신의 둔화라고 본다. 교회의 세속화, 경건 생활의 퇴색, 인맥과 파벌의 부작용, 물량주의의 고조, 권징 부재, 빈익빈 부익부의 격차 심화 등이다.

고신 정신이 무엇이냐?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신사 불참배 운동(반대자들의 심문 받을 때)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 신사참배가 국민의식이냐? 종교의식이냐?
   ㉡ 천조대신이 높으냐? 하나님이 높으냐?
   ㉢ 국가가 제일이냐? 종교가 제일이냐?
   1938. 3. 6 한상동 목사가 마산 경찰서에 불려가서 신사참배를 왜 반대하느냐고 심문 받을 때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것은 계명을 범하는 일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의 본분을 어기는 일이며, 교회가 없어지는 일이며, 민족이 금하는 일이며,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 해방 후 출옥 성도를 중심으로 한 교회재건운동 방향에 나타난다.
   ㉠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 오직 하나님에게만 충성 ㉢ 철두철미 회개
   ㉣ 깨끗한 생활 ㉤ 개혁주의 교회건설 이다.

   셋째, 고신교단 발족 때 발표한 성명서와 선언문에서 밝힌 것이며

   넷째, 제27회 총회 때 만장일치로 총회에서 가결한 교단이념이다.

   다섯째, 생활의 순결과 중심사상(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다.  교단 이념을 확립하고 뿌리 찾기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성경 중심의 신앙 운동을 해야한다. 경건 생활을 회복하고 고신 정신이 투철한 교역자를 양성해야 한다. 교역자 청빙이나 각 기관의 인맥과 파벌을 해소하고 교역자 노후대책을 마 련해야 한다. 또한 인본주의를 버리고 신본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끝으로 양질의 소수가 저질의 다수보다 중요함을 잊지 말고 유행에 맹종하는 조류에 편승하지 말고 성경을 깊이 연구해서 성경대로 전하고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 철저히 회개 운
동을 지속시켜 정결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가 되며 예배 모범에 부합된 예배 생
활을 하도록 하고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는 교단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고신 교단 약사


   1884. 9. 22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H.N.Alen 의사가 입국하여 의료선교로 복음전도의 길을 열고 1885.4. 5 H.G Underwood 선교사의 입국으로 장로교 선교는 활발히 시작되었다. 1893. 1. 장로회 선교사 공의회가 조직되고 1901. 5. 15 평양 장로회 신학교 개교, 1907. 9. 17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어 장로교 교회 확장은 잘 되었으나 1932년부터 일기 시작한 신사참배 강요로 기독교 학교가 어려움을 겪고 1938. 9.10 제27회 총회는 신사참배 하기로 가결하니 진리를 수호하는 주의 신실한 종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평양 장로회 신학교가 문을 닫고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은 검속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주기철목사 등 많은 분들이 순교하고 한상동, 주남선 목사, 손명복, 조수옥전도사등은 평양형무소에서, 손양원 목사는 청주 감옥에서 1945. 8. 15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이들은 한국교회 재건의 주역이 되었고, 순수한 개혁주의 보수신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946. 6. 23 진해에서 하기신학강좌를 개최하고 9. 20에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다.

   1948. 4. 제 34회 총회는 고려신학교 학생 추천문제를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노회가 천서를 줄 수 없다] 하여 문제가 제기되고 이때부터 총회 내엔 출옥성도들이 중심된 고려신학교를 거세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고 장로교 분열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1948. 12. 손양원 목사 고려신학교 총무로 취임.

   1950. 4. 경남노회는 출옥성도들을 거북스럽게 여기는 친일목사들의 세력이 점차  확산되고 고려신학교 천서 문제를 반대하여 오다가 경남노회는 5개가 되었다.

   4. 21 제36회 총회는 경남노회 총대문제로 개회벽두부터 소란이 일다가 급기야는 경찰이 동원되어 진압이 되고 총회는 유회가 되었다. 그리고 2개월 후 6. 25전쟁이 터졌다.

   1950. 9. 28 고려신학교 총무 손양원 목사 순교. 장례는 고려고등성경학교 오종덕 목사 집례. 고려신학교 교장 박윤선 목사가 설교하다.

   1951. 3. 23 고려신학교 설립자 중 한 분인 출옥성도 주남선 목사 별세

   1951. 5. 25 제36회 총회시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법통)노회 총대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와 관계 없는 것으로 선포가 되었다.

   1951. 9. 8 총회측에서는 한상동목사에게 그가 시무하던 부산초량교회의 명도를 요구하였고, 한상동목사는 10. 14 초량교회를 떠나니 90% 이상의 교인들이 따르게 되어 초량에 있는 주영문장로 뜰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고 교회가 시작되니 삼일교회였다.

   1952. 4. 29 제37회 총회는 고려신학교와 그 관계자들(경남(법통)노회)은 총회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총회측의 재언명과 경남(법통)노회의 엄주신 장로의 고별선언을 최후로 고려학교를 중심한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와 결별이 되었다.

   이 때의 일을 김양선 목사가 쓴 [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 p.159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교회의 주권을 의식적으로 교권주의자에게 바친 때문에 일어난 일대 불상사들 이었다. 한국교회 70년사 상에 있어서 이때처럼 교권이 형세된 때는 없었다."

   1952. 9. 11 경남 진주 성남교회당에서 제1회 총노회가 조직되고 총노회 조직의 취지와 목적을 발표하였다.
              취지 : 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본 장로회 정신을 떠나서 이교파적으로 흐르므로 이를 바로 잡아 참된 예수교장로회 총회를 계승하기 위하여 총노회를 조직한다.
              목적 : 정통적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정신을 지지하는 전국교회를 규합하여 통합하며 개혁주의 신앙 운동을 하며, 법통총회를 장차 계승키로 한다.

   1952. 9. 22 신사참배 한 일에 대하여 목사, 장로, 남녀 전도사의 자숙기간을 3주간 정하고 공인죄와 자인죄를 통회 자복하다.

   1953. 3. 12 ①미국개혁파장로회와 정통장로회와 성경장로회에 대표를 파송하다.
                    ②경북노회 조직

   1954. 3. 13 경기, 전라노회 조직하다.

   1955. 3. 8 송도에 고려신학교 교사신축(594평)을 시작하다.

   1956. 9. 20 총노회가 총회로 개편키로 하고,회수는 총노회 회수를 계속키로 하다.
              제6회 총회가 되었다. 이 때 총회 교회수 568, 목사 111명 세례교인수 15,350명, 박윤선 목사 개혁운동 10주년을 맞아 총회로 출발함에 있어서 과거 10년을 회고하면서 잘못된 것을 시정하고 새롭게 도약하는 것을 선언하다. 1957. 9. 19 제7회 총회에서
              ①자유중국(대만)에 선교사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김영진 선교사를 선정하다.
              ②새찬송가 발간하기로 하고 편집위원 선정하다.

   1958. 5. 13 김영진 선교사 자유중국에 파송되다.

   1960. 9. 20 제10회 총회에서 승동측(NA)과 합통키로 하고 합통 추진위원 9명을 선정하다.

   1960. 10. 박윤선 목사 주일성수 문제로 고려신학교 교수직 사면.

   1960. 12. 13 승동측과 합동하고 제45회 총회로 하다. 기념으로 고신에서 편집하여온 새찬송가를 생명의 말씀사에서 발행하다.

   1962. 9. 20 제47회 총회(고신 12회)에서 고신측 지도자들이 총회 내의 상대방 처사에 불안감을 갖게 되다. 그 이유는 합동 원칙에서 어긋나기 때문에.1963. 7. 29 부산노회 소속 교직자들 고신노회 환원 추진. 8. 8. 목사 23명, 장로 21명 부산남교회당에서 부산노회 환원을 결정함. 8월 전라노회, 9. 3 경북노회 9. 4 경기노회, 9. 10 경남(법통)노회 환원.

   1963. 9. 17 제13회 환원총회 회집되다.
               합동위원 대표, 송상석, 황철도, 한상동 제 목사가 합동하게된 것을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 잘못된 것임을 사과하고 온 회원이 함께 회개하고 감사의 마음으로 사과를 받다.
              환원현황, 7개노회(부산, 경남, 경북, 전라, 진주, 경동)  교회수 445, 목사 116명.

   1964. 9. 22 제14회 총회시 ①고려학원을 총회가 직영하도록 하다.
                            ②고려고등성경학교(교장 오종덕목사)재산일 체를 총회에 헌납.
                            ③고려신학교(이사장, 한상동목사) 재산 일체를 총회에 헌납.

   1965. 9. 6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총회유지재단 인가 받음.

   1966. 9. 20 고려신학교 설립 20주년 기념행사 갖고 주남선 목사 기념관 건립.

   1966. 9. 22 제16회 총회시 목사 시무년한 70년 정년제 결의.

   1967. 5. 17 학교법인 고려학원 문교부인가.

   1968. 9. 19 제18회 총회에서 타교단 신학교를 졸업하고 본 교단에 가입하여 강도사 고시에 응하고저하면 고려신학교에 1년 이상 수학한 후에 응시하도록 한다.

   1969. 7. 10 국방부장관으로 부터 군종장교 후보생 지정학교의 인가를 취득함.

   9. 6 문교부장관으로부터 고려신학교를 대학 동등 학력인정 지정학교의 인가를 취득하다.

   9. 15 제 19회 총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 정년을 만 70세를 결의하다.

   1970. 12. 30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고려신학대학 인가 받음. 복음병원을 학교법인 고려학원 수익 기관으로 정함.

   1971. 9. 23 제21회 총회에서 강단교류 문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칼빈주의 보수 교단으로 본교단 정신에 맞지 않는 교단을 거부키로.

   1972. 9. 21 제22회 총회시 고려학원 이사장 송상석 목사의 임기가 만료되어 총회에서 이사를 선출하였으나 문교부의 법정 기일이 남았다는 이유로 총회 결의에 순응하지 않으므로 총회가 이사를 전면 개편하 였다.

   1974. 4. 23 경안노회 조직

   1974. 9. 19 고려학원 이사회 문제가 계속 어려움을 겪어 오다가 세상 법정에 고소가 되고 제24회에서는 이사장 처리f를 위한 특별 재판국이 설치되다.

   12. 4 이사장 송상석 목사를 특별 재판국에서 면직 판결함.

   1975. 9. 25 ①이사장 문제로 경남노회가 양분이 되고,총회를 순복하는 경남노회측 총대를 경남노회 계승총대로 인정 하고 총회가 받다.
              ②총무제도 신설하기로 결의하다.

   1976. 9. 23 ①제26회 총회에서 소송문제에 대한 천명 건의건은 [사회법정에서의 성도간의 소송은 부득이한 경우와 교회법에 불복하는 경우 외에는 하지 않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로 천명하다. 소송을 반대했던 측은 총회를 떠나 별도 반고소란 이름으로 교단이  분열되다.
               ②1대총무 : 민영완 목사

               ③동부산노회 조직

   1978. 2. 15 문교부장관으로부터 고려신학 대학원 인가를 받다.

   1979. 9. 25 ①제 29회 총회시 의과대학 추진이 건의 되었으므로 의과대학은 현 고려신학대학을 개편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하고 현 이사회와 각노회에서 대표 1인씩 파송하여 함께 협력 연구 추진키로 하다.
              ②YFC를 CE로 명칭 변경.

   1980. 9. 25 ①고려신학대학은 고신대학으로 명칭변경된 일에 학장이 사과하고 목회신학대학원 인가를 얻도록 교섭하기로 하다.
              ②울산, 서울노회 조직

   1981. 9. 24 제 31회 총회에서 교단사 편찬위원 선정하여 집필키로 하다.
              교단창설기념주일 제정(9월둘째주일)

   1982. 9. 23 제 32회 총회에서 소송문제로 나누어졌던 일은 피차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운 것임을 승인하고 하나되다.

   1983. 9. 22 제 33회 총회시 총회회관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하기로 하다.

   1984. 9. 20 교회와 노회가 개척한 교회들은 유지재단에 등기키로 하다.

   1988. 9. 5 ①교단주일. 9월 둘째주일로 정하다.
             ②총회회관 건립을 유지재단이사회에 맡겨 진행하도록 하다.

   1989. 7. 17 기독교보 복간되다.

   1990. 9. 17 총회 전담 총무 두기로 하고 1년 후 실시하기로 하다. 경서노회 조직

   1992. 3. 31 ①총회 회관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58-10 에 기공예배, 280평 대지, 지하2층 지상 7층 연건평 1266평.
              ②경남중부, 경인노회 조직

   1993. 9. 17 총회회관 준공예배.11.1 입주 이후 총회산하 모든 상비부가 총회 회관에서 업무를 수행 하고 있다.

   1994. 9. 26 총회 선교부 전담 총무 두다.(이병길 목사)

   1995. 6. 해방 50주년 기념행사를 30개 노회별로 실시하고 특별 연보하여 개척교회를 1개처씩 30개 노회가 일제히 세우기로 하다.

   1996. 4. 26 천안캠퍼스 기공식 (고려신학대학원)

   1996. 7. 8-11 총회 선교부 주최 세계선교대회를 개최하다 (장소:부산남교회)

   1996. 10 46회 총회시 동대구, 전북노회 분리 (32개노회)

   1997. 6. 24-25 제1회 '97 목사.장로 특별기도회 (부산삼일교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4:11)

   1998. 3. 2- 3 제2회 교단특별기도회 (전국여전도회관) "나라와 민족과 교단을 위하여"

   1998. 8. 18-19 제3회 교단특별기도회 (전국여전도회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자"(출20:1-17)

   1998. 8. 25 고려신학대학원 천안캠퍼스 준공예배

   1999. 9. 49회 총회시 울산남노회 분리 (33개노회)

   2001. 6. 단군상 철거를 위한 전국 궐기 대회(서울종묘공원)

   2001. 9. 51회 총회시 서경노회 합동 (34개 노회)

   2002. 9. 교단설립50주년 기념대회 개최(고려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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