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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관의 좌충우돌

예레미야를 아십니까?

작성자김환기|작성시간26.06.06|조회수29 목록 댓글 0

 

예레미야를 아십니까? 예레미야 31:31-34

 

 

서론

 

지난주에는 “히스기야를 아십니까?” 제목으로 히스기야 왕의 특징을 3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히스기야는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내적 개혁을 한 사람입니다. 우상은 단순히 나무나 돌로 만든 형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둘째, 북왕국을 멸망시키고 호시탐탐 남왕국 침공을 엿보던 앗수르에 의한 외적 위기를 극복한 사람입니다.

셋째, 죽을 병에 걸렸을 때 눈물로 기도하여 15년의 생명을 연장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예레미야를 아십니까?’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레미야는 구약의 선지자들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고통을 깊이 보여 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가슴에 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눈물만 흘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말씀 때문에 고난받은 선지자였고, 동시에 절망의 시대 속에서 새 언약의 소망을 선포한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영적으로 무너지고,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 가던 시대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네 형태를 만들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구별하여 온 세상의 예언자로 세웠다.'(렘 1:5)  그때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는 아직도 어려서 말할 줄도 모릅니다.'(렘 1:6) 하자,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보호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 활동했던 이사야가 '자원한 선지자'라면(사 6:8), 예레미야는 '징집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히브리어로 '나비'입니다.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대언자입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때부터 시드기야 왕 때까지 약 40년 동안 말씀을 전했으며, 나라가 무너지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울었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를 세 가지 모습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둘째, 고난 받는 선지자입니다.

셋째, 새 언약의 선지자입니다.

 

 

 

1.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 9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 9:1)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그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는 백성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노력은 터진 웅덩이와 같습니다. 계속 붓지만 계속 새어 나갑니다. 채우려 하지만 채워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물질로 영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안타까운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3번 우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우셨습니다(요 11:35).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회개하지 않는 도시를 보며 울부짖으셨습니다(눅 19:41).

겟세마네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기 위한 고통 속에서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히 5:7).

 

하나님의 사람은 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죄를 보고 울고, 영혼을 위해 울고, 시대를 보고 울고, 교회를 위해 울고, 국가를 위해 울어야 합니다. 

 

어제는 현충일이었습니다. 현충일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친 이들의 눈물과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들의 희생 위에 오늘의 자유와 평화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 워싱턴 D.C에 가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가 있습니다. 그곳에 이런 비문이 써 있습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공짜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눈물과 희생이 우리가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도 십자가의 사랑 위에 세워졌습니다.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방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책임입니다.

 

 

2. 고난 받는 선지자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조롱을 당하고,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레미야 20장 앞부분을 보면 그는 바스훌이라는 제사장에게 맞고 목에 쇠고랑을 채운 채 갇히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 이것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너무 지치고 아파서 나온 선지자의 탄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의 안에서 불처럼 타올랐습니다. 예레미야가 입을 닫으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붙는 것처럼 타올랐습니다.

 

여기서 “불”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강한 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안에서 조용히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그의 마음과 영혼을 붙들고, 그를 다시 일어나게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침묵하려고 했지만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안에서 살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고전 9:16)

 

“화가 있다”는 말은 단순히 벌을 받는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외면할 때 오는 영적 고통과 책임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 하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다”고 고백한 것처럼, 바울도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잠자는 시대를 깨우는 사람입니다. 악한 시대를 역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선지자의 삶은 결코 평탄할 수가 없습니다. 악한 시대 속에서 선하게 살면, 당연히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증거입니다.  

 

 

3. 새 언약의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에서 34절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빛나는 약속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 31:31)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겠다.”(렘 31:33)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다릅니다. 옛 언약이 인간의 불순종을 드러냈다면, 새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냅니다. 옛 언약이 죄를 깨닫게 했다면, 새 언약은 죄를 용서합니다. 옛 언약이 돌판에 기록되었다면, 새 언약은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에 기록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새 언약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결심만으로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종교적 습관만으로는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씻어야 합니다. 은혜의 강물이 흘러야 합니다. 

 

은혜는 상과 다릅니다. 상은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지만, 은혜는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구원받은 자답게 사는 성결도 우리가 노력해서 받는 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을 상으로 착각하는 자는 결코 감사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구원을 받았고, 자기가 노력을 해서 성결하게 산다고 생각하는데 누구에게 감사하겠습니까? 교만한 자는 결코 감사하지 않습니다. 

 

금요일에 성경 묵상은 교만한 에돔에 관한 경고였습니다. “바위 틈에 살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 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 같이 보금자리를 높은 데에 지었을지라도 내가 그리로부터 너를 끌어내리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49:6)”  

 

 

에돔은 험한 바위산과 높은 산악 지대에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페트라는 에돔의 수도였습니다. 바위 틈은 외부의 공격을 막아 주는 천연 요새였고, 산꼭대기는 적들이 쉽게 올라올 수 없는 방어의 자리였습니다. 페트라 입구의 시크(siq) 길만 막으면 그곳의 철옹성입니다. 그래서 에돔은 교만하였습니다. 교만은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무지입니다. 정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진흙입니다. 진흙은 자기 모양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토기장이의 손에 붙들릴 때 비로소 그릇이 됩니다(렘 18:4).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가를 알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지만,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죄를 보며 분노만 한 것이 아니라, 무너지는 백성을 위해 울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고난 받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조롱과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새 언약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심판의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실 회복과 죄 사함의 은혜를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울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말씀을 붙드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 언약의 은혜를 붙드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죄로 무너지는 백성을 보며 울었던 예레미야처럼, 우리도 이 시대와 교회와 가정과 영혼을 위해 울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말씀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았지만 끝까지 말씀을 버리지 않았던 예레미야처럼,

우리도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게 하옵소서.

 

무너진 시대 속에서도 새 언약을 선포하게 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은혜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주시고,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옵소서.

 

눈물의 신앙, 말씀의 신앙, 새 언약의 신앙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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