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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관의 좌충우돌

산상수훈의 팔복(Beatitude)이란?

작성자김환기|작성시간17.04.01|조회수633 목록 댓글 1

 

 

 

 

 

 

산상수훈의 팔복(Beatitude)이란?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복"을 성경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 중 하나는 '일반은총'에 속한 복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은총'에 속한 복이다. 일반은총의 복이란 현세적이고 일반적이기 때문에 누구나 누릴 수 있다. 하지만 특별은총의 복은 신령한 복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이땅에서 누리는 내세적인 복이다.

 

산상수훈은 구약의 십계명과 비교할 수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이다. 출애굽 하였으니 이제 너희들이 하나님 백성답게 살라는 법이다. 즉 십계명은 '구원의 법'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구원받은 자답게 사는 '성결의 법'이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팔복산에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새 율법이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말해 주는 '성결의 법'이다. 성결(Holy)한 삶이란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결의 영'(Holy Spirit)의 지배를 받을 때 성결하게 살 수 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형, 수동태, 현재형으로 성령의 지배를 받으라는 뜻이다. (엡5:18)

 

불교와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점은 불교는 ‘자력종교’이고 기독교는 ‘타력종교’이다. 불교는 '자기 의'로 구원 받지만,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의 의'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기에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로 구원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영'으로만 거룩하게 살 수 있다. 따라서 구원도 은혜이고, 구원 받은 자답게 사는 성결도 은혜이다.

 

혹시 예수님과 부처님의 차이점은 알고 있는가? 가장 큰 차이점은!

 

 

 

 

"헤어스타일"

 

 

 

 

 

 

 

산상수훈(마5,6,7장)의 서론 격인 팔복은 '특별은총'의 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팔복은 이것을 지키면 복을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복을 받은 자는 이런 상태이다'라는 말이다. ‘복’은 히브리어 '바라크'는 현실적이며 물질적인 축복을 의미하고, 헬라어 '율로기아'는 주로 영적인 복이지만, 때로 물질적 유익을 뜻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팔복의 '마카리오스'는 '복된 상태'를 뜻한다. 팔복(Beatitude)은 '존재'(be)와 '태도'(attitude)의 합성어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태도가 복이다. 8복은 어떤 태도가 ‘진정한 복’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우리는 복을 '조건이나 자격'과 연관시킨다. 이런 자격이 되면, 저런 조건을 갖추면 '내가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앙은 조건이나 자격이 아니다. 반대로 나는 그런 조건이나 저런 자격을 갖출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이고, 애통하는 자이다.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無知'라고 한다. '무지의 지'란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다. 너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 자임을 알라는 말이다. '마카리오스'는 바로 이런 상태이다. 따라서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조건이나 자격이 아니라, 은혜이다. 내가 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럴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팔복(Beatitude)이란?

 

1)1-4

 

[마 5:3] 심령(心靈)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Blessed(Μακάριοι) are the poor(πτωχο)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가난에는 두 종류가 있다. 절대적 가난과 상대적 가난이다. 상대적 가난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달동네 사람들은 바로 아랫동네의 부자들과 비교하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모두가 비슷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첫 번째 복인 가난은 ‘상대가난’이 아닌 '절대가난'이다. 여기서 가난은 '프토코이'로서 영적인 '절대 가난'을 의미하고 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다. 바울이 고백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나에게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등 철저하게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자가 복이 있고 그런 사람이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누리는 사람이다.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mourn(πενθοντες) for they will be comforted.

 

애통은 '펜톤테스'로 자신의 죄로 인한 애통이다. 죽음이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이다. '자기의 의'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애통하는 상태이다. '오호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누가 나를 구원하여 주려나' 애통하는 상태이다. 바로 그런 사람이 위로를 받는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ek(πραες),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온유란 단어는 '야생마'에서 나왔다. 야생마는 힘이 있지만 방향이 없다. 자기 맘대로 뛰고 달린다. 주인이 야생마를 훈련할 때 그 힘을 한곳에 집중한 것이 온유(πραΰς)이다. 힘은 있는데  방향이 없으면 방종이고, 방향은 있는데 힘이 없으면 구호이다. 온유란 힘과 방향이 하나 된 상태이다. 이런 사람이 복이 있고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δικαιοσύνην), for they will be filled.

 

성경에서 의는 '행위의 의'가 아니라 '관계의 의'이고, '자기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이다. 의인이란 '의로운 분이 의롭다고 할 때' 의인이 될 수가 있다. 이것을 '칭의'(稱義, Justification)라고 한다. 우리는 어떻게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가? 믿음으로 가능하다. 그래서 ‘이신’(以信, 믿음으로)란 말이 나왔다. 우리는 둘을 합하여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한다. 하나님의 의에 목마른 자가 복이 있고,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다.

 

 

 

 

 

 

 

2) 5-8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rciful(λεήμονες), for they will be shown mercy.

 

‘긍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에오’는 흔히 ‘불쌍히 여기다’ 혹은 ‘측은히 여기다’라는 뜻이다(마 18:33, 막 10:47).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헤세드’인데 이는 ‘자비’로 번역할 수 있다. 자비를 영어로 Mercy 또는 'Compassion'이라고 번역한다. Compassion이란 Com(함께) + Passion(고통)란 뜻으로 '고통을 받는 자과 고통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이 마음은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자가 복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주님의 긍휼함을 받는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ure(καθαρο)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청결은 '카타로이'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카타르시스'란 단어가 여기서 나왔다. 카타르시스(Catharsis)란 원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6장 비극의 정의 가운데에 나오는 용어로 ‘정화'(淨化)라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는 한편, 몸 안의 불순물을 배설(排泄)한다는 의학적 술어로도 쓰인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 사함을 받고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신실한 성도의 마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니 거룩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 레위기는 27장까지 되어 있다. 두 부분으로 나누면 1-17장까지는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18-27장까지는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길이다.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기 위하여서 거룩해 지는 길을 설명하였다.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eacemakers(ερηνοποιοί),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화평케 하는 자''란 ‘평화’라는 헬라어 ‘에이레네’와 ‘만들다’에 해당하는 ‘포이에오’의 합성어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란 뜻이다. ‘에이레네’는 히브리어로 ‘샬롬’이다. ‘샬롬’은 외적은 환경에 의지하지 않는 내적인 평화를 말하는 것이다.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진 상태가 평화이다. 화평케 하는 자란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는 자이다. 이와 반대되는 사람을 'Trouble Maker'라고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화평케 하는 자로 오셨고,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δικαιοσύνην),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4번째 복과 8번째 복은 '의'와 연관이 있다. 십계명은 1-4계명의 대신관계와 5-10명의 대인 관계로 분리할 수 있다. 만약 팔복을 둘로 분리한다면 1-4복, 5-8복으로 분리할 수 있을 것이다. 분리의 중심은 ‘하나님의 의’이다.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의’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의’(디카이오쉬네)란 단어를 마가는 단 한 번도 기록하지 않고, 누가는 1회, 요한은 단지 2회만 기록한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17회나 언급이 되었고,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예수를 믿고, 믿음으로 살고, 믿음을 증거하다' 받는 박해를 뜻한다.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 없어질 금보다도 귀하다”(벧전 1:7) 의를 위하여 핍박을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팔복(Beatitude)은 일관되게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로 연결되어 있고, 복은 세상적이거나 물질적이 복이 아닌,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복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마카리오스'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누리는 하늘의 복을 말하고 있다. 하늘의 복을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사람이, 하늘에서도 누릴 수 있다. 이곳의 삶과 그곳의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곳의 삶을 이곳에서 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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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환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4.01 3월의 마지막 날인 어제, 올림픽 팍 근처에서 한인 공원및 문화센타 기공식이 시드니에서 있었습니다. 5년 계획으로 5천만불 정도 예상합니다. 대부분이 한인들의 기부에 의존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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