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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토마스)

6. 안중근 토마스의 계몽 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발자취따라.연재]

작성자김창환|작성시간21.05.29|조회수150 목록 댓글 1

6. 안중근 토마스의 계몽 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발자취따라.연재]

1) 안중근, 만주에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고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여 실망하고 되돌아왔다.

 

이 무렵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1906년  3월에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했다. 이사한 곳에서 생계를 위해 한때 석탄상회를 경영하였으나 사업이 되지 않았으며,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석탄회사를 정리하고 자기 집안의 전 재산을 털어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황해남도의  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였으며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년에는 대구의 유생  서상일  등의 주도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됐고, 열심히 활동하여 인정을 받으면서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  역시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다.

 

 

 

2) 독립운동 투신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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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호세 박 | 작성시간 21.08.29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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