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무라 호코바루 순교지
오무라의 처형장 옛터이다.
1603년 아우구스티노회 관계자가 작성한 기록을 살펴보면, 고오리 박해당시 호코바루에서 131명이 처형 당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유럽 파견 사절단을 로마로 인도한 소테로 신부도 이곳에서 순교 하였다 한다. 우에마쯔, 가코마치 성당의 신자들이 공동으로 이땅을 매입하여 1969년 205명의 순교자 복자100주념 기념비와 고오리 잠복기리시탄 순교 현양비 그리고 조선 출신자 13위 순교비가 세워졌다.
아름다운 해안 도시 오무라(大村)는 16세기 후반 일본과 포르투갈의 무역기지로 일본 가톨릭의 중심지였다. 오무라 가문 18대 영주 스미타다(純忠)는 1563년 세례를 받고 전국 다이묘(大名)가운데 최초로 가톨릭 신자가 되어 영내 키리시탄이 6만 명이 넘을 정도로 교회를 부흥시켰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스미요리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키쿠레 키리시탄을 색출하지 않는다는 힐책을 듣고 1617년부터 박해를 시작, 체포된 키리시탄을 호코바루에서 처형했다.
1658년에는 동굴에서 기도하던 카쿠레 키리시탄 608명을 체포해 411명을 처형했다. 411명을 한 곳에서 처형할 수 없어 5곳에 나눠 같은 날 처형했는데131명이 호코바루에서 순교했다.
가톨릭의 부활 신앙을 알고 있었던 오무라 영주는 순교자들의 부활을 겁내 131명의 참수한 머리와 몸을 500m 떨어진 곳에 따로 묻었다.
순교자들 머리만 묻혀있는 쿠비즈카(首塚)와 몸이 묻혀있는 도즈카(胴塚)에는 이들을 기억하는 순교자상이 홀로 서 있다.
호코바루 순교지에는 순교자 현양비와
조선인 순교복자 13위 현양비가 순교자들의 믿음을 증언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
오무라(大村)의 순교 유적
나가사키 국제공항에 도착한 순례자들이 우선 밟게 되는 땅이 오무라(大村)시입니다. 미노시마 섬(箕島)의 나가사키 공항에서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오무라 시에 들어가게 됩니다.
오무라에는 옛적 에도막부 시대에 가톨릭 신앙인들이 끔찍한 옥살이를 한 감옥이 있었습니다. ‘스즈타로’라는 참혹한 감옥입니다. 길이 5.3m 너비 3.5m의 공간을 통나무 벽으로 막아놓고 선교사 사제와 신자들 35명을 5년간 가둬놓았던 감옥입니다. 1617년에서 1622년까지 거기 갇혀있던 신자들 중 3명은 옥사하고, 24명은 나가사키의 니시자카에서 처형되었으며, 8명은 오무라의 호쿠바루에서 처형되어 순교했습니다.
‘오무라’라는 이 도시의 이름은 이 지방에서 ‘오무라(大村)’라는 가문이 12세기부터 대를 이어 다이묘(영주)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입니다. 그 오무라 가문의 다이묘 중에 16세기 말에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고 신자가 되어 포르투갈과의 무역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 다이묘가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입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지방영주(다이묘)로서는 최초로 천주교 신앙인이 된 오무라 스미타다의 영향 하에 한때는 가톨릭 중심의 지방이었던 오무라입니다. 그럼으로써 오무라는 서양의 발달한 문물을 일본 땅에서 가장 먼저 받아드린 개방적 무역항과 물류거점도시가 되었고 일본의 초기 천주교의 중심도시가 되었습니다.
스미타다는 오무라 지역에 여러 성당을 건립하도록 하여 지역 내 천주교 신자가 6만 명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스미타다는 총명한 소년 4명을 선발해서 포르투갈 상선과의 교역 항로를 통하여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도록 했습니다. 그 소년들이 출발하였던 바닷가에는 그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그 4명의 소년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있습니다. 지금은 건너의 섬에 있는 나가사키 공항으로 향하는 큰 다리가 그 기념공원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 소년 4명을 일컬어 ‘덴쇼 소년사절단’(天正少年使節団)이라 합니다. 그들은 만13-15세의 어린이들로서 1582년 출발하여, 남지나해와 인도양과 아프리카 남단을 거쳐 대서양을 거슬러 올라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경유하여 2년 반 만에 로마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를 알현하여 일본의 사정을 알려드린 그들은 같은 항로를 통하여 1590년에 귀국하였습니다. 출발한 지 8년 5개월 만에 돌아온 그들에 의하여 활판인쇄기 등 서구의 선진기술과 지식을 전수하여 일본의 문화발전에 공헌하였습니다. 그들 중 3명은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 나카우라 쥴리안 신부는 비밀리 사목하다가 체포되어 1633년에 거꾸로 매달려 사형당하는 순교로써 일본인 최초의 사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스미타다의 시대가 지나고 나서, 일본의 정치적 상황에서 오무라의 천주교 신자들이 당한 박해는 참혹했습니다. 박해시대의 오무라의 상황은 형언할 수 없습니다. 에도막부에 의해 1614년 금교령이 내려졌습니다. 오무라 지역의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고 신자들이 박해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637년 ‘시마바라의 난’ 이후 전국적인 강력한 박해로 인하여 천주교의 씨가 말린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오무라의 동굴에 성상을 감춰놓고 비밀리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608명 발각됩니다. 그 중 배교를 거부하는 411명을 한 곳에서 처형할 수 없게 되어 다섯 군데로 나누어 한 날에 처형했습니다. 그 처형지 중에 호코바루(放虎原)에서는 131명을 한꺼번에 효수하는 처참한 살생이 벌어졌습니다.
지금은 주택가 한 가운데 위치한 호코바루 처형장의 거대한 기념탑 아래에는 조선 출신의 순교자들 현양비가 조그맣게 세워져 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어 순교한 사실을 알리는 비석입니다. 당시 순교한 분들 중 시복식을 통하여 복자품에 올려진 205위 일본순교복자 중 13위의 조선인 복자들을 기리는 호코바루의 작은 현양비 앞에서 한국인 순례자들의 심정을 뭐라 말해야 할까요? 우리 민족이 타민족에 의해 신앙의 이유로 죽음을 당한 현장에서 갖게 되는 감회…! 강제적으로 끌려와서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비참한 삶 중에 얻은 신앙 때문에 또한 죽음을 당한 그 현장에서 동일민족의 후손으로서, 그리고 신앙의 후예로서, 가슴에 와 닿는 역사적 사연의 감회…! 뭐라 표현해야 하는지!
당시의 박해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부활을 믿는다 하여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목을 잘라서 몸 따로 머리 따로 처치했습니다. 당시의 일본인들에게 비쳐지기론, 천주교를 신봉하는 자들이란 죽더라도 다시 살아나는 요술을 부리는 무시무시한 존재들이라 했답니다. 때문에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처치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을 잘라 몸들은 따로 묻다가 장소가 부족하여 물고기 밥으로 바다에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잘린 머리들은 소금에 절여서 꼬챙이로 꿰어 길가에 전시했습니다. 그러므로 호쿠바루 처형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몸들만 따로 묻은 곳을 도즈카(胴塚), 그리고 더 멀리 머리만 따로 묻은 구비즈카(首塚)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