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의 간략한 역사
순 서
1. 북경교구
2. 조선대목구
3. 파리외방전교회
4.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5. 교황 파견 선교사
6. 지목구
7. 대목구와 교구
8. 한국교회의 박해
9. 역대 조선 대목구장
10. 명의 주교
11. 부주교
12. 대목구장 직무대행
13. 제3대 조선 대목구장
14. 제4대와 제5대 조선 대목구장
15. 첫 번째 성직자 회의
16. 지역 교회법
17. 한국교회의 교계 제도
18. 순교 성인들
19. 성직자의 호칭
1. 북경교구
1533년 동양에서 처음으로 인도 고아에 교구가 설정되었다.
1576년 중국 대륙 전체를 관할하는 마카오 교구가 인도의 고아 교구에서 분리, 신설되었다.
1660년 중국 난징에 대목구가 마카오 교구에서 분리, 설정되면서 조선이 그 관할구역에 포함되었다.
1690년 난징 대목구가 교구로 승격되면서 동시에 북경교구가 분리, 설정되었다. 북경교구 관할구역에 조선이 포함되었다.
2. 조선 대목구
1779년 이벽,권철신,정약전 등 학자들이「천주실의:(天主實義)」등의 교리책을 통하여 천주교를 연구하였다「천주실의」는 1595년 마테오 리치(MatteoRicci)신부가 북경에서 중국어로 저술한 교리책이다. 이 책은 중국 지성인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었고 조선과 일본에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데 큰 공헌을 한 대단히 유명한 책이다.
1784년 이벽의 부탁을 받은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이벽, 이승훈 등은 명례방(서울 명동성당 자리)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주일 집회를 가졌다. 이로써 북경교구 소속 조선 공소가 설립되었다.
1786년 가짜 성직 계급이 생겼다. 권일신,이승훈,이존창,유항검,정약전 등 열 명을 사제로 선임하였다. 178S년 이들은 자기들이 성품성사를 받지 않은 것을 깨닫고 가짜 성직자 노릇을 정지하였다.
1793년 북경의 구베아(Gouvea)주교는 북경교구 소속의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일체의 정상 권한과 특별 권한을 부여하고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주 신부는 1795년 정월 서울 북촌(종로구 계동)에 정착하였다 이로써 북경교구 소속 조선 본당 사목구가 설정되었다. 당시 교우 수는 4천 명이었다.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조선 대목구를 북경교구에서 분리하여 설정하고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다.
3. 파리외방전교회
1658년 프랑스 파리에서 교구 사제들이 자발적으로 아시아에 선교사들을 파견할 목적으로 외방 선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파리외방전교회 (La 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 des Paris)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설립된 외방 선교회다. 교황청 포교성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사제들을 교황 대리 감목과 교황 파견 선교사로 임명하여 아시아의 포교 활동을 맡겼다.
그리하여 파리외방전교회는 인도, 시암(태국),베트남, 미얀마,말레이시아,대만,중국 만주,티베트,한국,일본 등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 지역의 포교 활동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하여 마카오에 극동 대표부를 설치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책임자 신부는 극동 지방으로 파견되는 모든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소임지를 배정하는 인사권을 가지고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는 마카오에 있는 동안 포르투갈 보호권을 내세우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간섭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1841년 영국이 홍콩을 점령하자 르그레즈와 신부가 그곳으로 대표부를 옮길 생각을 하고 그곳에 대지를 마련하였다 1847년 리브와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를 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홍콩으로 옮겼다.
1857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싱가포르 대표부가 설치되었고 1864년에는 상해에도 대표부가 설치되었다.
4.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1658년 설립된 파리외방전교회는 처음부터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파리 본부에 설치하였다 그뿐 아니라 본방인 성직자 양성을 위하여 일찍부터 선교지에 신학교를 세웠다.
1665년 시암에 세웠던 신학교를 말레이시아 페낭(Penang)으로 옮겼다. 이 신학교에서 조선 신학생들도 공부하였다. 김대건과 최양업도 본래 이 신학교로 보내졌으나 그 당시의 형편상 마카오 대표부에서 설치한 임시 신학교에서 5년간 공부한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에서 1845년에는 19개, 1900년에는 41개,1939년에는 75개의 신학교를 운영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창립 이래 3백 년 동안 4,137명의 회원 중 163명이 베트남,중국, 한국에서 순교하였다. 그중 10명이 한국 103위 성인에 포함되었다.
5. 교황 파견 선교사
16세기, 식민지를 개척한 포르투갈 국왕과 스페인 국왕은 그들의 식민지에 교회를 세우고 운영할 권한을 교황으로부터 받았다. 이 권리와 의무를 보호권(ius patronatus포르투갈어Padroado) 이리고 한다.
처음에는 국왕들이 보호권에 입각하여 선교사들을 파견하도록 수도회에 위촉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국왕이 선발하여 파견한 선교사들은 국왕의 관리로 전락하고 또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왕국의 국운이 쇠퇴하면서 선교사들을 파견하는 일을 소홀히 하였다. 한편 여러 수도회에서 파견된 선교단(missio)들은 상호 간의 경쟁과 불화가 심하여 교회에 대한 박해를 자초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보호권의 폐단이 컸다.
이에 따라 1622년 교황청 포교성이 신설되었고, 국왕의 보호권 남용을 견제하기 위하여 교황이 직접 선교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선교사를 교황 파견 선교사라고 일컬었다.
교황청 포교성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사제들을 교황 대리 감목과 교황 파견 선교사로 임명하여 아시아의 포교 활동을 맡겼다.
6. 지목구
교황청 포교성에서 파견하는 자치선교단(missio sui iuris)은 기존의 어느 지역 교회에도 예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관할구역을 배당받는다. 이 구역을 교황 파견 선교구(praefectura apostolica)라고 부른다. 이것을 한국에서는 지목구(知牧區)라고 한다.
(교회법 제368조 참조)
교황 파견 자치 선교단의 단장, 곧 지목구의 책임자는 통상적으로 탁덕 품을 받은 성직자다. 지목구장은 교구장 주교와 같은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담당 구역을 교황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준(準) 교구장이다(교회법 제381조 제2항 참조)지목구가 발전하면 대목구(代牧區)로 승격된다.
7. 대목구와 교구
교황청 포교성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두 왕국 국왕들의 보호권 폐단을 견제하기 위하여 옛날부터 있었던 교황 대리 제도를 변형하여 새로운 의미의 교황 대리 감목 제도를 신설하였다.
이 새로운 제도는 포교 지역에 교황 직속의 감목구를 설정하고 교황이 직접 임명하는 주교를 교황의 대리자로 파견하는 제도다. 교황청 포교성은 1658년에 설립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사제 두 명을 그다음 해인 1659년 중국 서남부와 동남부의 교황대리 감목으로 임명하였다.
교황 대리 감목구(vicariatus apostolicus)는 아직 교구로 설정될 여건이 성숙하지 않은 지역 교회다.(교회법 제368조 참조) 이것을 한국에서는 대목구라고 약칭한다.
대목구의 책임자는 통상적으로 주교 품을 받은 성직자다.
대목구장은 교구장과 같은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담당 구역을 교황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준 교구장이다.(교회법 제381조 제2항참조)
대목구가 발전하면 교구(DiOecesis)로 승격된다. 교구의 책임자 는 교구장 주교다.(교회법 제376조, 제381조 제1항 참조)몇몇 교구의 연합체를 관구(Provincia)라고 한다. 관구의 중심이 되는 교구를 대교구(Archidiocesis)라고 한다. 대교구의 교구장이
대주교(Archiepiscopus)다.(교회법 제435조 참조)
8. 한국교회의 박해
1784년에 세워진 한국교회는 백 년 동안 크고 작은 박해를 계속 받아 순교자만도 만 명이 넘는다. 그중에 두드러진 박해는 다음과 같다.
1785년(정조 9년) 을사박해, 김범우가 귀양 가서 순교하였다.
1791년(정조 15년) 신해박해, 윤지충과 권상연 등이 순교하였다
1795년(정조 19년) 을묘박해, 윤유일 등이 순교하였다.
1801년(순조 1년) 신유대박해,오가작통법으로 주문모 신부등 많은 신자들이 순교 하였다.
1815년(순조 15년) 을해박해,경상도에서 3백여 명의 신자가 검거되고 백여 명이
수감되었다
1827년(순조 27년) 정해박해,경상도와 전라도에서 2백40여 명이 체포되고 많은
교우들이 순교하였다.
1839년(헌종 5년) 기해대박해,제2대 조선 대목구장인 앵베르(Imbert) 범 주교와
모방(Maubant)나 신부 및 샤스탕(Chastan) 정 신부 그리고 두 신학생의 아버
지와 정하상 등 교회의 지도자들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846년(헌종 12년) 병오대박해,김대건 신부,현석문 등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1860년(철종 11년) 경신박해가 일어났다 그해 예비자만 천 명이 넘었는데 이 박해
로 복음화 사업이 큰 지장을 받았다.
1866년(고종 3년) 병인대박해는 대원군에 의해 6년 동안 계속된 가장 참혹한 박해
였다.
1876년(고종 13년) 조선과 일본이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대원군 시대
의 쇄국정책이 끝나고 조선 왕국이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1886년(고종 23년) 조선과 프랑스가 한불수호통상조약을 맺음으로써 천주교가 신
앙의 자유를 얻었다.
1901년(광무 5년) 제주도에서 민란이 일어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9. 역대 조선 대목구장
역대 조선 대목구장은 모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었고 거의 모두 부주교를 거쳐 대목구장직을 계승하였다.
제1대 조선 대목구장(1831~1835) 브뤼기에르(Bruguiere) 소 주교는 시암 대목구의 부주교였다가 조선 대목구장으로 전임 발령되었다. 소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애쓰다가 1935년 10월 국경 지대인 만주에서 사망하였다.
제2대 조선 대목구장(1836-1839) 앵베르 범 주교는 소 주교에 의해 부주교로 선임되었으나 소 주교 사후 주교로 서품되어 후임자가 되었다. 1936년 12월 조선에 입국한 범 주교는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인이다.
제3대 조선 대목구장(1843-1853) 페레올(Ferreol)고 주교는 만주에서 부주교로 주교 서품을 받았으나 그때에는 범 주교가 순교한 뒤였다.
제4대 조선 대목구장(1854-1866) 베르뇌(Berneux) 장 주교는 만주 대목구의 부주교를 거쳐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다. 장 주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인이다.
제5대 조선 대목구장(1866) 다블뤼(Daveluy) 안 주교는 장 주교에 의해 부주교로 선임된 후 후임자가 되었다. 안 주교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인이다.
제6대 조선 대목구장(1869-1884) 리델(Ridel) 이 주교는 부주교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선임자인 안 주교의 대목구장 재임 기간이 16일에 불과하였고 그나마도 감옥에 갇혀있어서 부주교를 선임할 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7대 조선 대목구장(1884-1890) 블랑(Blanc) 백 주교는 부주교를 거쳐 후임자가 되었다.
제8대 조선 대목구장(1890-1933) 뮈텔(Mutel)민 주교는 부주교를 거치지 않았다. 박해가 끝났기 때문이다. 민 주교 재임 때 조선 대목구가 서울 대목구와 대구 대목구로 분할되었다
제9대 서울 대목구장(1933-1941) 리-리보(Larribeau) 원 주교는 민주교의 부주교를 거쳐 후임자가 되었다.
10. 명의 주교
명의 주교(名義主敎,Episcopus tiuilaris)는, 옛날에 있었지만 현재는 없어진 교구의 명의를 가지는 주교를 말한다. 예를 들면 6세기까지 터키 등 소아시아 지방,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 지방 에는 가톨릭교회가 번창하여 굉장히 많은 교구가 설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지역은 이슬람교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천주교 교구가 거의 전멸되었다.
그런데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따라 주교는 반드시 어떤 교회의 명의(Titulus)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교구의 책임을 맡지 않은 주교는 옛날에 있었던 교구의 이름을 보존하는 것이다. 곧 현존하는 교구를 맡고 있는 주교는 교구장 주교(Episcopus dioecesanus)이고, 교구장이 아닌 그 밖의 주교는 명의 주교다.(교회법 제376조 참조)
교황청 근무 주교, 교황 대사,성직 자치구장,대목구장, 직할 서리구장, 군종 교구장,부주교나 보좌 주교 그리고 은퇴 주교는 모두 명의 주교다.(교회법 제368조 참조)
대목구는 정식 교구로 설정되기 이전의 포교지로서, 대목구장이 교황의 이름으로 사목하는 지역이다.(교회법 제371조 참조)그러므로 대목구는 좁은 의미의 교구가 아니고, 넓은 의미의 교구에 속하는 준 교구다.(교회법 제368조 참조)
대목구장은 좁은 의미의 교구장 주교가 아니고, 다만 넓은의미의 교구장에 속하는 준 교구장이다(교회법 제381조 참조) 대목구장으로는 통상적으로 명의 주교가 임명되고, 예외적으로는 명의 대주교나 사제품을 받은 고위 성직자가 임명된다.
11. 부주교
부주교(episcopus coadjutor)는 교구장 계승권을 가지는 보좌 주교를 말한다.(교회법 제403조 제3항 참조) 포교지방을 담당하는 대목구장은 박해나 풍토병으로 보통 생명의 위험 중에 산다. 그리고 포교지의 여러 가지 여건으로 말미암아 사망 소식이 교황청에 전달되고 교황이 그 후임자를 임명하게 되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세월이 걸린다.
그렇기 때문에 1622년 교황청에 신설된 포교성에서는 진작부터 후임 교구장 계승권을 가지는 부주교 제도를 상용하고 있다. 곧 후임 교구장이 될 사제를 미리 정하여 주교로 서품하여 두는 것이 부주교 제도다
부주교는 교구장 좌가 공석이 되면 별다른 법적 절차 없이 즉각 후임 교구장이 된다.(교회법 제409조 제1항 참조) 교구장이 체포나 유배나 추방이나 능력 상실 때문에 교구장 좌가 유고가 되면 부주교가 그 직무를 대행한다.(교회법 제신3조 제1항 참조)
주교를 선임하거나 선출된 주교를 추인하는 것은 교황의 전권 사항이다.(교회법 제377조 제1항 참조) 부주교의 선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박해 중인 포교지에 임명되는 대목구장에게는 그의 부주교를 선임할 수 있는 특별 권한까지도 수여되는 사례가 가끔 있다. 역대 조선 대목구장들은 이러한 특별 권한을 교황청으로부터 받았다.
12. 대목구장 직무대행
대목구장 직무대행은 대목구장이 공석이 되는 때 교황이 후임 대목구장을 임명할 때까지 임시로 그 직무를 대행하는 사제다. 대목구장 계승권을 가지는 부주교가 선임되어 있으면 대목구장 직무대행을 따로 선임할 필요가 없다.
대목구장은 박해나 풍토병 때문에 항상 죽음의 위험에 놓여있다. 그런데 포교 지방의 여건상 교황이 대목구장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 후임자를 임명하려면 오랜 세월이 걸린다.
따라서 대목구장으로 취임하면 자기의 직무를 수행할 수없는 상황에 대비하여 제일 먼저 직무대행을 임명해야 한다. 이 규정은 본래 교황청 포교성에서 제정하여 포교 지방에서 만 시행한 제도다. 이 제도가 1917년도 교회법전 제309조에 정식으로 편입되었고 이것이 1983년도 교회법전 제420조에도 계승되어 있다.
13.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고 신부는 1840년 초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를 떠나 1841년 초 소팔가자에 도착하여 조선입국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43년 3월 15일 조선 대목구장 계승권을 가지는 부주교로 임명하는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칙서를 받았다.
고 신부는 1843년 12월 31일 개주에서 만주 대목구장인 베롤(Verrolles)주교의 집전으로 벨린(Belline) 명의 주교로 성성되었다.
이 성성식에 메스트르 신부를 비롯하여 최양업과 김대건이 참석하였다. 이때는 제2대 조선 대목구장인 앵베르 주교가 이미 순교한 후였는데, 그 사실을 교황이나 페레올 주교가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고 주교는 부주교로 성성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 대목구장이 공석이었으므로 고 주교는 자동적으로 제3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다.
14. 제4대와 제5대 조선 대목구장
제3대 조선 대목구장인 페레올 고 주교는 1853년 2월 3일 사망하였다. 그런데 고 주교는 1845년 만주 대목구의 대목구장 직무대행이던 베르뇌 신부를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로 임명하려 하였으나 베르뇌 신부는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고 주교는 당신의 유언장에 이 임명을 보존하였다.
그런데 몇 해 후 1854년 12월 27일 만주 대목구장인 베롤주교가 베르뇌 장 신부를 자기의 부주교로 성성하였다. 그런데 주교 성성식이 있기 3일 전 장 주교는 자기를 제4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한 비오 9세 교황의 칙서를 받았다.
1년 3개월 후 1856년 3월 27일 베르뇌 장 주교는 프티니콜라(Petitnicolas) 박 신부와 푸르티에(POurthi) 신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다.
1857년 3월 25일 장 주교에 의해 다블뤼 안 신부가 대목구 장 계승권을 가지는 부주교로 성성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장 주교와 안 부주교가 한꺼번에 순교하였다. 장 주교는 3월 7일 순교하였고 안 주교는 3월 23일 순교하였다. 그러니까 제5대 조선 대목구장의 재임 기간은 단지 16일이었다.
15. 첫 번째 성직자 회의
1857년 3월 25일 안 부주교의 성성식이 있은 다음 날부터 3일간 조선 대목구는 처음으로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회의에 두 분의 주교와 최양업 신부를 포함하여 일곱 명의 성직자가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결의된 것 외에는 모두「사천대목구(四川代牧區 지도서」를 조선에서도 따르기로 결의하였다.
「사천 대목구 지도서j는 1801년 개최된 중국 사천 대목구 시노드에서 결정한 사항을 수록한 지역 교회법전이다.
조선 대목구의 첫 번째 성직자 회의의 결정 사항이 1857년 8월 2일〈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라는 제목의 사목교서로 발표되었다. 이 교서에는 성직자 생활 전반에 관한 지침과 성영회에 대한 규식이 규정되어 있다. 이것이 조선 대목구의 첫 번째 지역 교회법이다. 그 당시 조선 대목구에 선교사 신부들이 일곱 명으로 늘어났고 신자 수도 만오천 명을 넘었다
16. 지역 교회법
1887년 9월 21일 제7대 조선 대목구장 백규삼 주교가 조선포교지 지도서를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그 지도서는 3징으로 되어있는데 저U장은 칠성사, 제2장은 선교사, 신자, 회장, 제3장은 공소와 신심회에 관한 규정이었다. 그 지도서의 명칭은 Coutumier de la Mission de coree이다.
1931년 조선 대목구 설정 백주년 기념으로 한국 지역 공의회가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서울, 대구, 원산 3개 대목구와 평양과 연길 2개 지목구의 교구장들과 주요한 성직자들 도합 23명이 1931년 9월 13일부터 9월 26일까지 서울에 모였다. 이 회의에서 천주교 요리문답과 한국교회 공용 지도서를 편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 신부들이 주동이 되어 1년간의 편찬 작업을 거쳐 1932년 74개 조의 법령을 바탕으로 하여542개 항으로 부연한 한국 지역 교회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 지도서의 명칭은 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이다.
1983년 새 교회법전이 반포되었고 1984년 한국교회 2백 주년 기념사목회의가 개최되었다. 교회법을 전공한, 열 명의 한국인 사제들로 구성된 교회법위원회는 이 두 가지를 기본으로하여 10년간에 걸쳐 지역 교회법전 편찬 작업을 진행한 끝에 6개 편 256개 조로 편성된「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를 편찬하였다.
한국 주교회의는 교황청의 인준을 받고 1995년 4월16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를 한국지역 교회법으로 공포하여 6월 4일 성령 강림 대축일부터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 지침서의 명칭은 Directorium Pastorale Coreae 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지역 교회법이다.
17. 한국교회의 교계 제도
1831년 조선교회는 지목구의 단계를 거치지 아니하고 대목구로 설정되었다. 그리하여 북경교구에서 독립하였다.
1911년 조선 대목구가 서울 대목구와 대구 대목구로 분할되었다.
1920년 이후 원산, 평양, 광주, 전주, 춘천, 부산, 대전, 청주, 인천의 대목구들이 설정되었다. 그 중에 평양, 광주, 전주,준천은 지목구를 거쳐 대목구로 승격되었다. 원산 대목구는 함흥 대목구와 덕원 수도원구로 분할되었다.
1962년 3월 한국에 정식 교계 제도가 설정되었다. 3개의 대목구가 대교구로 승격되고,8개의 대목구가 교구로 승격되면서 1개의 수도원구와 함께 3개의 관구로 배속되었다.
1963년 이후 수원, 원주, 마산, 안동에 교구가 설정되었고 제주는 지목구를 거쳐 교구로 승격되었다.
1995년 현재 서울 관구에(북한의 3개를 포함하여 9개 교구, 대구 관구에 5개 교구,광주 관구에 3개 교구가 배속되어 있다.
18. 순교 성인들
1857년 9월 24일 비오 9세 교황은 조선 순교자 중 82명을 가경자VenerabiUs로 선포하였다. 가경자 중에는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과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 순교자들이 가경자로 선포될 수 있었던 것은 최신부가 라틴어로 번역해서 로마에 보낸,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전기 덕분이었다.
1925년 성년 7월 5일 비오 11세 교황은 조선의 가경자 중79명을 복자로 선언하는 시복식을 로마에서 집전하였다.
1968년 10월 7일 바오로 6세 교황은 1866년 순교한 분 중에 24명을 복자로 선언하는 시복식을 로마에서 집전하였다.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03 위 조선 순교복자를 성인으로 선포하는 시성식을 서울에서 집전하였다.
19. 성직자의 호칭
최양업 신부는 그의 편지에서 Pater라는 라틴어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편지 내용에 따라 역자는 하느님 아버지, 교황님, 사부님, 신부님 그리고 보통 의미의 아버지 등으로 구별하여 번역하였다.
이 라틴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초세기 교회의 탁월한 대학자들을 뜻하기도 한다. 이때에는 우리말로 교부라고 번역한다. 교회 역사상 스물한 차례의 세계 공의회와 수많은 지역 공의회가 개최되었는데, 공의회에 참석하는 고위 성직자들을 뜻하기도 한다.
초세기 에는 신자들이 성직자를 부를 때 상하 구별 없이 각 민족의 언어로 아버지라고 불렀다. 스승을 정신의 아버지,곧사부로 모시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니만큼 성직자를 영신의 아버지, 곧 신부神父로 받들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성직자들의 계층에 따른 호칭이 구별되었다. 교황만Papa라고 부르고, 수도원 원장만(abbas)라고 부르며, 일반 사제들은 pater라고 부르게 되었다. 모두가 아버지라 는 뜻이다.
교황은 오늘날에도 아버지, 거룩한 아버지, 지극히 거룩한 아버지,지극히 복되신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중세기 이후 고위 성직자들이 한 영지의 영주를 겸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고위 성직자를 ‘나의 주인님(monsignor)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 라틴어 계통 민족들은 (몬시뇰이라는 라틴어를 각 나라 말로 조금씩 변형하여) 고위 성직자를 몬시뇰이라고 부른다. 영어권에서는 My Lord라고 한다.
서양에는 봉쇄생활 수도회나 활동생활 수도회 또는 남자 수도자나 여자 수도자를 일일이 구별하는 용어가 다양하다. 그러나 수도자를 부를 때는 그냥 형제 또는 자매라고 부른다. 수사나 수녀라는 호칭은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에만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직함과 호칭이 구별된다. 정승, 판서 등 정2품 이상의 관직을 가진 분들을 부를 때 판서라고 하지 않고 대감이라고 불렀다.
대학교 총장이나 교수 또는 학교 교장이나 교사 등은 직책명이고 이들을 부를 때는 선생이라고 부른다.
신부는 성직자의 직책명이 아니고 호칭이다.
[자료: 바오로딸, 최양업신부의 편지모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