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진로와 민족수난
1.시대의 변화와 교회의 선교 정책
1-1. 신앙의 자유
19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조선의 역사와 교회사는 운양호(雲揚號) 사건을 계기로 일대 전환을 맞게 되었다. 1876년 조선 왕국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병자 수호 조약)을 맺음으로써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그 후 조선은 1882년에 미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했고, 유럽의 여러 나라와 조약을 체결하면서 1886년에는 프랑스와도 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조선 왕국은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함과 동시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최말단에 편입하게 되었다.
조선에 교회가 설립된 18세기 말엽 이래 교회의 최대 관심사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 문제였다. 교회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국법에 우선함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성리학적 철학을 기초로 하여 성립되고 유지되던 당시 조정에서는 종교나 신앙에 대한 성리학적 가르침을 정부의 의무와 권리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로써 조선에서는 종교와 정치가 일치를 이루고 있거나 종교가 정치에 예속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조선 왕조에서는 신앙이나 사상에 관한 문제도 정치의 일환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성리학 이외의 종교를 규제했고, 신앙의 자유를 관철하려는 교회와 이를 계속 억압하려는 조정 사이에 마찰이 빚어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 조선 왕조에서는 인간의 기본권에 관한 사상이 발달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천주교 신앙을 법으로 금지하고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와 탄압에도 천주교는 신앙의 자유를 축차적으로 성취해 갔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은 대략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그 첫째 단계는 순교를 통한 신앙 자유 획득 운동이다. 이 첫 번째 단계는 신앙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시기였다. 박해 시대의 여러 순교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신자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였다. 이 시대의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가 인간의 당연한 권리이며, 국법에 우선함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양심법에 근거한 이들의 주장은 당시의 국법으로 말미암아 용납될 수 없었고 오히려 많은 이가 순교하게 되었다. 그들의 죽음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결의의 표현이었으며, 인간의 양심을 규제하는 그릇된 법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뒷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두 번째 단계는 개항(문호 개방) 이후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 두 번째 단계는 신앙의 자유를 묵시적으로 인정하는 단계이다. 개항이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지는 못하였다. 개항 이후 조선이 외국과 맺은 여러 조약에서도 조선인의 신앙의 자유에 관한 명백한 규정은 없었다. 조선이 외국과 맺은 극히 일부의 조약에 규정된 종교에 관한 조목은 어디까지나 한국에 나와 있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 조선인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용인한 것은 아니다.
조선인 신자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묵시적으로 용인된 때는 1882년이었다. 이 해에 교회는 인현서당(仁峴書堂, 韓漢學校)을 설립하였다. 블랑(Blanc, 白) 주교가 조선교구 제7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이듬해인 1885년에는 서울과 경상도에 고아원을 설치했고, 서울에는 양로원을 세웠다. 또한 원주 부엉골에 신학당(神學堂)을 세워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처럼 교회는 1882년 이래 조선 사회 안에서 공공연히 봉사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으니, 한국 교회는 교회가 세워진 후 100년 만에 신앙의 자유를 묵인받기에 이르렀다. 신앙의 자유가 묵인된 것은 이처럼 한불 조약(韓佛條約) 체결 이전의 일이다. 한불 조약은 조선에 강요된 불평등 조약의 하나였으나, 1886년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한불 조약이 맺어짐으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도 부분적으로 보장되어 갔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제한된 지역에서나마 조선 정부가 발행하는 호조(護照: 여행권)를 가지고 여행할 수 있었다. 1888년부터는 선교사들이 상복을 벗고 성직자 옷차림으로 선교하게 된다.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로는 1895년의 정부 사면령을 들 수 있는데, 정부에서는 1866년 박해 때에 순교한 일부 신자들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사면 대상인 신자들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이는 신앙의 자유를 공인하기 위한 사전 조처로 해석되었다. 또한 이 해에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인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고종을 만날 수 있었다. 이때 고종은 1866년의 박해(병인박해)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며, 뮈텔 주교에게 친선을 제의하였다. 군주 국가의 국왕의 이러한 태도는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실제로 공인하는 것을 뜻하였다. 뮈텔 주교는 1895년을 마침내 박해가 막을 내린 때로 기록하였다.
이러한 정세 변화가 법적으로 확인된 것은 1899년에 조인된 ‘교민 조약(敎民條約)’에서다. 이 교민 조약은 조선 정부의 관리인 정준시(鄭駿時)와 뮈텔 주교 사이에 체결된 것으로, 이 조약으로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가 법적으로 공인되었고, 신자들도 일반인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음이 인정되었다. ‘교민 조약’은 1904년 ‘선교 조약(宣敎條約)’을 체결함으로써 더욱 보완되었다. 이 ‘선교 조약’에 따라 선교사들은 개항장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토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세울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이와 함께 개항기 교회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한 노력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개항기 교안(敎案)의 과정에서도 일부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