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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외방전교회

달레,코스트, 블랑, 두세,뮈텔주교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작성자김창환|작성시간21.12.26|조회수826 목록 댓글 0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21) 달레 Dallet, Claude Charles(1829~1878).

▲ 달레 신부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교회사가. 1829년 10월 18일 프랑스 디종(Dijon)의 동북부에 위치한 랑그르(Langres)에서 출생. 랑그르의 소신학교(小信學校)를 거쳐 대신학교(大神學校)에 진학하여 수학하던 중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1850년 10월 5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1852년 6월 5일 사제서품을 받고 인도 마이수르(Maissour) 지방의 선교사로 포교에 전념하는 한편 저술활동을 벌여 1859년 마이수르 지방의 개신교의 공격을 논박한 교리서 《A Controversial Catechism or short Answers to the Objections of Protestants against the true Religion》을 영어로 저술, 모든 선교사들의 필수품이 될 정도로 찬사를 받았다.

 

1860년 간질(癎疾)에 걸려 귀국, 치료를 받고 병이 어느 정도 낫자 힌두어의 보급을 위해 힌두어 활자를 주조(鑄造)하여 파리 국립인쇄소에 힌두어 인쇄시설을 갖추게 하고 1863년 포교지 인도로 돌아갔으나 간질이 재발되어 1867년 다시 귀국, 파리에서 병을 치료한 후 파리 외방전교회와 신학교를 위해 활동하였다.

 

1871년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보불전쟁(普佛戰爭)이 일어나 신학교의 경영이 어려워지자 캐나다와 미주지역을 방문, 기부금을 모집하는 한편 캐나다와 북미(北美)에서 파리 외방전교회의 활동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였고 이듬해 한국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보낸 기초 자료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의 비망기, 보고 및 편지들을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회사의 편찬에 착수, 2년 후인 1874년 상 · 하 2권으로 된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를 출판하였다.

 

그 후 파리 외방전교회사의 편찬에 착수, 자료 수집차 외방전교회 관할의 각 포교지를 방문하기 위해 1877년 2월 파리를 떠나 일본(日本), 만주(滿洲)를 방문하였으나 한국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북경(北京)에서 오래 체류한 뒤 다시 코친차이나, 홍콩을 거쳐 안남(安南)의 케소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케소에서 이질에 걸려 1878년 4월 25일 사망, 케소에 안장되었다. 평소 시와 철학에 관심이 깊어 몇 편의 철학 논문을 남겼고 선교사로 떠나가는 동료신부들을 격려하는 시 《선교사의 출발에 붙이는 노래》(Chant du depart des missionnaires)에는 작곡가인 친구 구노(Gounod)가 곡(曲)을 붙이기도 하였다.

 

달레의 사망으로 편찬이 중단되었던 《파리외방전교회사》(Histoire generale de la Societe des Missions-Etrangeres)는 1894년 동회원 로네(Adrien Launey)에 의해 완성되어 전 3권으로 간행되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22) 코스트 Coste, Eugene Jean George(18421896).

▲ 코스트 신부 ▲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 성전

 

파리 외방전교회원, 조선교구 선교사. 한국명 고의선(高宜善). 프랑스의 몽타르노(Montarnaud)에서 태어나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거쳐 1866년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1868년 6월 6일 사제서품을 받고 7월 15일에는 프랑스를 떠나 극동으로 파견되었다.

 

2년간 홍콩에서 경리를 맡아 본 후 1870년에 싱가포르로가 2년간 요양소 건설에 종사하다가 홍콩에 돌아왔고, 1874년에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경리일을 맡아 보았다.

 

1875년 11월 21일 청원이 허락되자, 곧 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만주로 갔다. 그곳에서 리델(Ridel) 주교가 오래 전부터 꾸며 오던 ≪한불자전≫(韓佛字典)의 인쇄일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 요꼬하마(橫濱)로 건너가 한국어의 자모를 주조하여≪한불자전≫의 간행사업에 착수, 1880년에 출판하였고, 이어 그 이듬해에는 한국어의 문법책과 천주성교공과를 출판하였다.

 

그 뒤 리델 주교에 의해 나가사끼(長崎)에 조선교구의 경리부가 설치되자 경리부장을 맡아 보게 되었다. 그 곳에서 인쇄일도 맡아 보던 중 1886년 블랑(Blanc) 주교에 의해 부주교로 임명되어 한국에 입국 이후 약현(藥峴)과 종현(鍾峴)성당을 비롯한 많은 성당과 교회건물을 직접 설계하고 감독하였다.

 

또 인쇄소를 나가사끼에서 옮겨와 한국어로 된 30여권의 책을 찍어 냈다. 이렇듯 박해에서 벗어난 한국 교회 발전의 초석을 튼튼히 다진 그는 만년에 고아원에서 어린이들을 돌보다 1896년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23) 블랑 Blanc, Jean Marie Gustave(1844-1890).

▲블랑 주교 

파리 외방전교회원. 제7대 조선교구장. 주교. 한국명 백규삼(白圭三). 1866년 12월 22일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신품성사를 받고 이듬해 2월 15일, 파리를 떠나 만주로 갔다.

그곳에서 병인(丙寅)박해로 두 조교를 함께 잃고 중국으로 탈출한 리델(Ridel)신부를 만나, 함께 조선입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 10년 동안 리델 주교를 도와 교리책의 번역과 ≪한불자전≫(韓佛字典)의 편찬 등으로 세월을 보냈다.

 

1876년 리델 주교, 드게트(Deguette)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조선을 향해 떠나, 5월 8일 리델 주교를 다시 청국으로 되돌려 보낸 다음 조선땅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목자를 다시 갖게 된 조선 땅을 숨어 다니면서 그는 전교에 힘쓰는 한편, 다시 주교를 맞을 준비를 착착 진행시켰다.

 

그 결과 1877년 9월에 리델 주교를 다시 맞게 되었으나 곧 주교가 잡히는 몸이 되어 추방되자 주교없는 한국 교회를 지켜나갔다.

 

그러는 가운데 1882년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883년 7월 8일 일본 나가사끼에서 주교 성성식을 갖고 조선에 돌아와 더욱 전교에 힘써 1887년말에는 14명의 성직자 14명의 신학생과 신자수 1만 5000명을 헤아릴 수 있게 되어, 박해로 거의 다 쓰러져가던 조선 교회를 재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1887년 9월 21일에는 조선 교회의 지도서를 공포하여 통일된 법전을 갖고 규칙에 따라 교회 행사를 집행할 수 있게 했고, 1888년 6월 8일에 조선교구를 예수성심께 봉헌하는 장엄한 미사를 올려 신교의 자유를 얻게 된 최후의 승리를 감사드렸다.

 

한편 방인 성직자 양성에 힘써 1885년에 강원도 부흥골에 신학교를 설치하여 페낭유학생을 포함한 신학생을 수용하였고, 2년 뒤에는 용산으로 옮기었는데 그때의 신학생수는 21명이었다.

 

고아와 노인들을 위한 사회사업도 활발히 전개하여 1885년에 서울에 고아원과 양로원을 세우고 40명의 노인과 100명의 고아를 돌보게 하였는데, 이 사업을 위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요청하여 4명의 수녀를 파견받아 그들로 하여금 이를 맡아보게 하였다.

 

그리고는 새로운 성당을 짓기 위한 대지를 사들여 1887년부터는 종현(鐘峴)의 산등을 깎아 1890년 성당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2월 2일 이를 감사하는 미사를 드리고 곧 주교관을 세우려 했으나 갑자기 중병을 얻어 2월 21일 46세로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24) 두세 Doucet, Camille-Eugene(1853~1917).

▲ 두세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 성전

 

서울교구 부주교, 한국명 정가미(丁加彌). 1917년 4월 19일, 1876년부터 40여 년간, 갖은 박해를 헤치며 한국 교회를 끝까지 지킨 초기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인 부주교 두세 신부를 잃음으로써 한국 교회는 큰 슬픔에 잠겼다.

 

그는 1853년 11월 16일 쉬브롱(Chevron)에서 태어나 1873년 9월 10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76년 12월 23일 사제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25일 한국으로 떠났다.

 

이 때 한국에는 1866년 병인박해로 두 명의 주교를 포함한 9명의 성직자가 순교한 뒤에도 계속 박해가 끊이지 않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1877년 3월에 만주에 도착한 그는 9월 11일 리델(Ridel) 주교와 로베르(Robert)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떠나 23일 저녁에 황해도 배천(白川) 맞은편 한강 입구에 닻을 내리고, 배천으로 들어가 1878년 1월말에는 구월산(九月山) 일대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 수 있게 되었다.

 

곧이어 서울에서 리델 주교가 체포되자 두세 신부와 로베르 신부를 만나 서로 무사함을 기뻐하였다.

 

이어 포졸들의 추적을 피해 이북 5도를 돌아다니면서도 전교활동을 멍추지 않았고, 12월에는 남부지방으로 내려가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로 가는 도중, 천연두에 걸린 어린이에게 성사를 베풀다가 자신도 감염되어 15일간 병석에서 신음하는 고통도 겪었다.

 

1881년 뮈텔(Mutel) 신부와 리우빌(Liouville) 신부가 조선 입국에 성공한 후, 두세 신부는 충청도지방을 전담하여 근 10년간 이곳에서 복음 전파에 전력을 다하였다.

 

1890년에 서울에 올라온 그는 곧 약현(藥峴, 현 중림동) 성당의 건축을 담당했고, 성당이 준공되자 1892년 초대 약현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사망하기까지 25년간 그 곳에서 일생을 바쳤다.

 

1896년 코스트(Coste) 신부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부주교로 임명되어, 더욱 바쁜 봉사생활에 몰두하였으나 점차 몸이 노쇠해져 40년에 걸친 그의 헌신적 봉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25) 뮈텔주교 Mutel, Gustave Charles Marie(1854-1933)

▲ 뮈텔 주교 ▲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 정원

 

대주교. 파리 외방전교회원. 제8대 조선 교구장. 한국명 민덕효(閔德孝). 프랑스 블뢰메리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조앵빌 중등학교와 랑그르 소신학교를 졸업하여 1873년 10월 11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한 뒤 1877년 2월 24일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같은 해 12월 만주에 도착하였다.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인하여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하고 만주에 머무르면서 전교활동 준비와 한국에 관련된 여러 문서들을 정리하는 한편 일본에서의 시복수속 등을 견학하기도 하였다. 이는 후에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의 시복과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80년 5월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신부와 함께 입국하려 하였으나 조선 관헌들의 엄한 감시로 성공하지 못하고 같은 해 11월에 가서야 황해도 장연(長淵)에 상륙할 수 있었다.

 

1881년 황해도 백천(白川)에서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와 잠입하였으나, 당시 천주교 탄압교서인 신사 척사윤음(辛巳斥邪綸音)이 공포된 때라서 은거생활을 하며 한국어와 한문공부에 몰두하면서 순교자에 관한 자료와 기록 정리에 열정을 쏟았다.

 

1885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지도자로 임명되어 파리로 소환되었으나 한불조약(韓佛條約, 1886. 6. 4)이 조인된 훨씬 뒤인 1890년 8월에는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대목)으로 임명되어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성당에서 성성식(成聖式)을 거행하고 나서 뒤테르트르(Dutertre, 姜良),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와 함께 1891년 2월 조선에 재입국하였다.

 

박해시대에 활동한 적이 있는 뮈텔 주교는 한불조약 이후 지하교회에서 해방된 교회의 모습을 좀더 확연히 하기 위하여 예수성심신학교, 종현(鐘峴) 성당, 약현(藥峴) 성당 등을 준공시키는 이외에 각 지방에서의 본당 창설활동에 많은 지원을 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순교자들의 꽃을 피어나게 하라”(Florete Flores Martyrum)는 그의 표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순교자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순교자 현양과 한국 천주교회사의 정립, 그리고 순교복자의 시복 등으로 꼽을 수 있다.

 

1894년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의 원본이 발견되자 곧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각 학계에 배포하고 그 원본은 교황에게 진상하였으며(1925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순교상황을 수집하여 1895년 ≪치명일기≫(致命日記)를 편찬하였다.

 

1904년을 전후하여서는 기해박해(己亥迫害)의 순교행적을 기록한 현석문(玄錫文)의 ≪기해일기≫(己亥日記) 한 벌이 발견되었는데 앞뒤의 일부가 상하여 이를 보충하고 서문을 붙여 1905년 ≪기해일기 뮈텔판≫을 간행하였다.

 

한편 뮈텔 주교는 확장되는 교세에 따라 교계제도가 확립될 수 있는 기초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1911년 전라도, 경상도의 남부지방을 분할하여 대구교구로 설정한 뒤 1920년에는 함경도, 간도지방을 분할하여 원산교구로 설정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1923년에는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Maryknoll Fathers)의 한국 진출을 주선하여 1927년에 창설된 평양교구의 사목을 이관하였다. 이와 같은 대내외적인 여러 활동으로 1920년 교황청으로부터 백작 작위를 수여받고, 1925년 3월 명의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더욱이 1925년 7월 5일에는 그의 오랜 숙원이던 한국 순교복자 79위에 대한 시복식이 교황 비오(Pius) 11세에 의해 거행되었다.

 

이밖에 일제하의 탄압 속에서도 교회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다가 한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33년 1월 23일 80세의 생을 마쳤다. 주요 저서는 ≪Doc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ee de 1839 et 1846≫, ≪Docu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ee, 1866≫, ≪뮈텔일기≫(Journal de Mgr. Mutel, 1890-1933), ≪뮈텔문서≫(Documents de Mgr. Mutel, 1890-1927) 등이 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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