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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외방전교회

라우빌,프와넬, 로베르, 르비엘,드망즈[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작성자김창환|작성시간21.12.26|조회수124 목록 댓글 0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26) 라우빌 신부

▲ 옛 용산 신학교

 

1887년 서울 용산 원효로(元曉路)에서 개교하여 1942년 일제의 탄압에 의해 폐교된 신학교. 원래 1885년 강원도 원주 부흥골(현 京畿道 驪州郡 康川面 釜坪里)에서 개교한 후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자 서울 원효로로 이전하였고, 1945년 2월 23일 경성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로 개칭, 다시 개교하여 현재의 가톨릭대학 신학부가 되었다.

 

초대 교장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 라우빌(Liouville, 柳) 신부가 취임했으며, 중등과 3년, 철학과 2년, 신학과 3년의 교육 과정을 운영하였다. (⇒) 가톨릭대학신학부

출처 : [가톨릭대사전]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27) 프와넬 Poisnel, Victor Louis(1855~1925).

▲ 명동 성당(종현(鐘峴)

파리 외방전교회원, 서울교구 부주교. 한국명 박도행(朴道行).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 지방에서 태어났다.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거쳐 1879년 6월 29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1880년 8월 18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81년 8월 3일 한국으로 떠났다.

 

곧장 한국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기착한 그는, 때마침 한국에서 추방당한 리델(Ridel) 주교를 만나 그의 병간호를 하다가 병이 악화된 리델 주교를 본국으로 송환시키기 위해 그를 따라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싱가포르에서 프랑스로 돌아가는 젊은 신부를 만나 주교를 그에게 맡기고 나가사끼로 돌아온 그는 곧 드게트(Deguette) 신부를 따라 한국에 잠입하였다.

첫 포교지도 황해도와 평안도를 맡게 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뮈텔(Mutel) 신부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그의 후임으로 조선교구의 경리일을 맡아 보게 되면서부터 장차 교회 발전에 대비하기 위해, 기회를 포착하여 토지를 매입하는 일에 착수했는데 그의 이러한 선견지명과 끈질긴 추진력으로 오늘의 명동대성당을 지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는 종현(오늘의 명동) 주임신부로 있을 때 종현(鐘峴) 대성당의 건축을 맡아보던 코스트(Coste) 신부가 선종하자, 건축관계도 맡아 보아 오늘날 누구나가 감탄하는 대성당을 완공시켰다. 그래서 그 뒤 30년 동안 모든 성당과 기타 부속건물을 지을 때에는 반드시 그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다. 1917년부터 부주교를 겸임하였고, 1925년 12월 26일 70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28) 로베르 ,아실 폴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1853-1922).

▲ 로베르 신부 ▲파리외방전교회 ‘순교자들의 모후’ 경당.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바오로. 한국명은 김보록(金保祿). 1853년 프랑스 오트 손(Haute-Saone)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소신학교를 거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곳에서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와 뮈텔(Mutel, 閔德孝) 신부와 함께 공부하였으며, 1876년 12월 23일 사제로 서품된 뒤, 이듬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월 25일에 동료 두세 신부와 파리를 출발, 베트남과 상해를 거쳐 그 해 3월 만주에 도착하였다.

 

그곳 차쿠(岔溝)에 머물러 있으면서 여러 차례 한국 입국을 시도하고 있던 리델(Ridel, 李福明) 주교를 만나, 9월 11일 다시 한국 입국을 시도하다, 많은 위험을 겪은 끝에 9월 23일에서야 황해도 장연(長淵)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이후 리델 주교는 서울로, 로베르 신부와 두세 신부는 황해도 배천[白川] 지방으로 가서 전교하게 되었는데, 로베르 신부는 배천 새터의 한 교우 집에 은거하면서 한국어와 관습을 익히고, 전교 활동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1878년 리델 주교의 명령에 따라 강원도 이천(伊川) 고메골로 이주하여 예비 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면서, 성사 집행에도 매우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한편 1878년 1월 28일, 서울에서 리델 주교가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로베르 신부는, 신학생들을 해산시키고 황해도 산악 지대인 곡산(谷山)의 버들골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곳 역시 많은 위험이 뒤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함경도 안변(安邊) 지방으로 이주하여, 그곳의 한 교우 집에서 은거하였다.

 

리델 주교가 추방된 뒤에 블랑 신부의 명령에 따라 1879년 경기도 삭령(朔寧)의 오리골로 가서 다시 신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몇 년 동안 은둔하며 전교 활동을 펼친 로베르 신부는 강원도 홍골, 경기도 지평(砥平) 고시울, 강원도 원주(原州) 부엉골 등지에서 1883년까지 전교하며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1885년까지 경기도와 강원도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전교하였다. 그 후 선교사의 수가 늘어나 로베르 신부가 관할하는 사목 담당 구역이 경상도와 그 인근 지역으로 한정되었지만, 순회 전교 때의 고된 성사 집행으로 결국 장티푸스에 걸려 거의 두 달 동안이나 병석에 눕게 되었다.

 

1886년 초 블랑 주교가 경상도 지역의 사목 중심지로 대구 본당을 설정하고 초대 본당 신부로 로베르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에 로베르 신부는 당시 다른 지역에서의 교안(敎案) 문제에 영향을 받아 대구 읍내가 아닌 근교에 있는 신나무골(현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한티 교우촌(현 경북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 소재)을 포함해 거제도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관할하였다.

 

1888년부터는 대구 부근의 죽전(竹田) 새방골로 옮겨 대구 읍내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행하고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1891년 교안(敎案) 사건이 발생하여, 로베르 신부가 대구에서 추방되어 서울로 이송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른바 ‘로베르 신부 추방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그 해 2월 대구의 불량배들이 집단으로 몰려와 사제관을 포위하고 위협을 가하자 로베르 신부는 지방 관청을 찾아가 그가 당한 모욕과 협박을 고발하였다.

 

그러나 로베르 신부는 경상도 밖으로 추방당하였으며 그의 수행원은 심하게 구타당하고 사제관은 약탈당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뮈텔 주교는 프랑스 공사에게 연락하여 경상 감사를 고발하였고, 교회 당국과 외무 독판(外務督辦)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어 새 감사가 임명되었다. 또한, 이 사건과 연루된 사람들이 귀양보내졌고, 로베르 신부는 경상 감사가 보낸 호위인의 보호를 받으며 다시 대구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대구 외곽의 대아벌[待御臺]에 정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오랜 박해로 이단시하던 인근 주민들의 태도를 완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891년부터 전교에 힘쓰면서 본당 건립을 추진하던 로베르 신부는 1897년 3월부터 루르드의 성모 성당을 계산동에 짓기 시작하여 1898년 12월 25일에 한식 목조 십자형 성당을 완공 · 축성하였다.

 

그러나 1901년 1월 말에 원인 모를 화재로 성당을 잃자 1902년에 고딕식으로 벽돌 성당을 지었는데, 이 성당은 1911년 대구대목구의 설정과 함께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로베르 신부는 대구 대목구의 주교로서 드망즈(Demange, 安世華) 신부가 부임하자 그를 보좌하는 일과 함께 계산동 본당의 사목 활동도 책임지게 되었다. 로베르 신부는 성영회(聖嬰會)를 운영하면서 많은 고아들을 돌보았고, 초등학교를 세워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명도회라 불리는 청년들을 위한 가톨릭 단체도 만들었다.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대구교구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던 로베르 신부는 마침내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고 병이 심해져 1911년에 프랑스로 돌아가 탈장 수술을 받고 요양하다가 1913년에 재입국하여 전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1919년에 병이 재발해 9월에 홍콩으로 떠나 휴양하다가 이듬해 5월 귀국하였으나 드망즈 주교에게 은퇴를 요청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은퇴 후 대구 주교관에 머무르면서 한국에서의 오랜 전교 활동에 대한 회고록을 집필하던 중 1922년 1월 2일 사망하여, 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 : 이유림, 한국가톨릭대사전 제4권]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29) 르비엘 Le Viel, Emile Constant(1863-1893).

▲파리외방전교회 ‘순교자들의 모후’ 경당.

 

파리 외방전교회원. 조선교구 선교사. 한국명 신삼덕(申三德). 1888년 12월 12일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5월 한국에 입국했다. 원래 몸이 허약했던 그는 오랜 여행으로 병이 도져 상해(上海)에서 홍콩으로 되돌아가 병 치료를 하였다.

약간 건강이 회복되어 1889년 5월말 경에야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원도의 조그마한 구역을 맡았으나, 그의 허약한 체질은 이 낯선 땅의 음식이나 풍습에 적응되기가 힘들어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를 본 코스트(Coste) 신부는 그를 용산신학교 선생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몸은 더욱 쇠약해져, 도저히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깨닫고 직에서 물러나 제물포(濟物浦)로 갔다.

 

이 때 제물포는 교세가 날로 번창하여 새로운 교회건물을 필요로 했으므로 르비엘 신부는 손수 석수와 대목일을 하여 1890년 가을에는 이를 완성시켰다.

 

한편 그는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병원환자들을 날마다 찾아가 그들을 치료하고 위로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의 병은 점점 심해져 이젠 기동조차 못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뮈텔(Mutel) 주교는 그를 홍콩으로 보내 요양케 하였다.

 

1892년 10월 홍콩에 도착한 그는 투병을 계속했지만 별 효과를 얻지 못하자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의 청원이 허락되어 고국으로 떠나기로 한 날, 심한 각혈을 일으켜, 그리던 고국에도, 그리고 한국에도 영영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1893년 4월 20일의 일이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30) 드망즈 Demange, Florian(1875~1938).

▲ 드망즈 주교 ▲파리외방전교회 ‘순교자들의 모후’ 경당.

 

초대 대구교구장(大邱敎區長). 주교. 한국명 안세화(安世華). 1875년 프랑스의 로렌(Lorraine) 지방에서 태어났으나 1870년 독불전쟁(獨佛戰爭)으로 로렌지방이 독일에 점령되었기 때문에 파리로 이주해 살았다. 1893년 파리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철학과를 다시 이수하였으며,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을 전공한 다음 1898년 졸업과 동시 사제서품을 받고, 곧 임지인 한국으로 떠났다.

 

그해 10월 6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우선 조선말과 풍속을 익힌 다음 1899년에 부산(釜山)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첫 포교사업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덕겸비의 고매한 인품은 그가 부산에 내려 온 지 불과 1년도 못되어 즉 1900년에 서울 용산신학교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신학교에서 6년간 봉직하면서 내국인 사제 양성에 정진 하던 차, 1906년 10월 19일에 <경향신문>이 창간되자 그 경영과 편집을 맡아 개화기의 애국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나, 불과 4년 만에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폐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법률문답’이란 고정란을 통해 민중과 공직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유익을 주었고 이로 말미암아 찬사와 신뢰 때문에 편집 책임자인 드망즈 신부의 사회적 영향력은 아주 컸었다.

 

<경향신문>의 창간과 더불어 부록으로 <보감>도 발간하여 교리와 교회사에 대한 지식과 함께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알려, 교인들의 신앙과 새생활을 교도하는 데 큰 공을 남기었다.

 

1911년 4월 8일. 서울교구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이 분할되어 대구교구가 신설되는 동시에 드망즈 신부가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드망즈 신부는 6월 11일 명동성당에서 주교성성식을 갖고 6월26일 대구로 부임하여 교구 창설의 중임을 맡게 되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부임한 지 5년 만에 대구교구는 교구관리소, 신학교대성당 증축, 수녀원 등 주요 시설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이에 날로 교세가 확장되어 1919년에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였고, 이때 대구신학교의 두 학생을 함께 데리고 가 로마 우르바노대학에 유학시켰다.

 

1925년에는 로마 교황청에서 거행된 조선 순교자 79위의 시복식에 참석하였고, 1928년에 중병을 얻어 고국에 돌아가 치료와 요양으로 3년을 체류하다가 1930년 11월 11일에 다시금 조선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연로하여 날로 늘어나는 교세를 전담키가 어렵게 되자, 오래전부터 계획해 오던 전라북도를 1931년 5월 감목대리구로 설정하고 김양홍(金佯洪, 스테파노) 신부를 초대 감목대리로 임명하였는데, 1937년 이 지역이 지목구(知牧區)로 설정됨으로써 최초의 방인교구를 탄생시켰다.

 

바로 이 해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었으므로 주교 공의회는 교리서 문제에 있어서, 우선 전국에 통일된 교리서의 필요성을 느껴, 새로운 통일된 교리서 편찬을 위한 5교구위원회가 설치되고 그 위원장에 드망즈 주교가 임명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2년 동안 교리서 편찬작업에 전심하여 1934년에 간행을 보게 되었다.

 

1934년 10월 31일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아 그의 36년 걸친 조선교구에서의 헌신적인 봉사와 대구교구 설창에 대한 절대적인 공로를 보상받았다. 1933년에 전라남도지방을 애란(愛蘭)의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전교를 전담케 하여 1937년 4월 15일 대구교구로부터 광주교구를 분할 독립시켰다.

 

이와 같이 드망즈 교주는 신설된 대구교구를 맡아 불과 25년 만에 대구교구와 전주, 그리고 광주의 3개 주교구로 이를 나누어야 할 만큼 크게 성장시키는데 온갖 정력을 다한 끝에 1938년 2월 9일에 대구에서 선종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지 40년 동안을 전교에 힘쓰다 63년를 일기로 선종한 것이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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