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의 가톨릭 교회사 편람
일본 가톨릭 신자의 1할 이상이 나가사키 현(長崎県)에 살고 있습니다(2012년 교세현황 참조).
에도막부(江戸幕府)시대의 나가사키 현은 좁은 지역임에도 바쿠후(幕府)의 직할령과 5개의 다이묘 영지(히라도, 오무라, 시마바라, 고토, 나베시마<이사하야·후카보리>)가 있었습니다.
오무라의 영주인 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는 전국시대 말기 주변 영주들이 전투에 휘말리고 있는 동안, 가톨릭을 수용하여 나가사키 지방에 가톨릭교회의 기원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1) 선교시대
선교를 위해 아시아에 온 예수회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1549년 규슈(九洲) 본토의 남쪽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 하면서 일본의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다음 해 1550년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규슈의 북서쪽 히라도(平戶)에 기항한 포르투칼 무역선을 찾았습니다.
히라도 영주는 무역을 우선시 하고, 영지 내 불교세력의 저항이 강하였기 때문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히라도와 가까운 오무라의 영주인 오무라 스미타다와 교섭하여 개항 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1562년에 요코세우라 라는 곳에 새 무역항을 만들어 포르투칼 상선이 입항하게 되었습니다. 부두가 만들어 지고 성당을 건립하여 기리시탄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스미타다는 일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영주(기리시탄 다이묘)로서 선교에 협력하였고, 자신의 영지 주민들을 통합하는 체제를 굳히면서, 주변의 공격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가신과 주민을 일제히 개종하도록 했습니다. 1582년 기록에 의하면 일본에 15만 명의 가톨릭 신자 중 7만 명은 오무라 영내 주민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주가 세례를 받은 아리마 영내(시마바라 반도)에는 2만 명이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원래는 오무라 영내였고 후에 바쿠후 직할영이 된 나가사키는 1570년 개항하여 무역으로 번영하면서 가톨릭의 도시를 이루었습니다.
얼마 후 예수회와 더불어 다른 선교수도회들도 차츰 일본에 들어와 나가사키를 선교 거점으로 하면서 일본의 가톨릭 신자는 점점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2) 박해시대
그러나 전국시대가 끝나고 나라를 통일한 에도막부는 증가한 가톨릭 신자들을 큰 위협세력으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614년에는 가톨릭 금교령을 내리고 사제와 주요한 일본인 가톨릭 신자들을 국외로 추방하였습니다. 국내에 남아있는 사제와 신자들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붙이며 개종하지 않는 자는 처형하였습니다.
타 지역보다 그리스도 신자가 많은 오무라와 시마바라와 나가사키 직할영 등에 살고 있는 신자들도 가혹한 박해 속에서 처형되어 순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을 포기하는 배교자들이 속출하였지만, 한편 더 많은 신자들은 하느님을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습니다.
가혹한 박해 속에서 사제들이 추방당하거나 처형되어 성직자 없는 상항에서 성화 밟기(후미에)에 응하면서 겉으로는 불교도 행세를 가장한 신자들은 감시의 눈을 피해 평신도 지도자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신앙 공동체를 조직하여 세례를 받고 기도(오라쇼)를 계속 바쳤습니다. 그들을 일컬어 ‘가쿠레 기리시탄(隱れ吉利支丹)’이라 합니다.
그런 가운데 나가사키의 우라카미(浦上)와 소토메(外海)의 기리시탄 공동체는 200년을 기다리면 고해를 들어주는 사제가 다시 돌아와 준다는 예언을 믿으며 신앙을 감추고 살았습니다.
그러한 막부시대의 일본은 나가사키의 ‘데지마’라는 격리된 공간에서만 네덜란드와 무역을 하고 그 외의 나라와는 교역하지 않는 쇄국의 나라였습니다.
3) 부활시대
이윽고 260여년이 지난 에도시대 말기에 미국 등으로부터 문호개방을 요구받아 결국 쇄국 정책을 풀게 되었습니다. 나가사키에서는 데지마 밖에도 외국인 거류지가 생기고 외국인을 위한 성당이 프랑스인 사제에 의하여 세워졌습니다.
사제를 기다리며 260여년을 버티어온 가톨릭 7대째의 자손들이 나가사키의 오우라 성당을 찾아와 프랑스 사제와 만남으로 예언이 실현됩니다. 신앙을 지켜온 후손들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프랑스인 사제에게도 이 사건은 대단한 감격이었습니다.
이어서 각지에서 몰래 신앙을 지켜온 많은 신자들이 사제를 찾아오게 되었고, 사제의 지도를 받아 잠복 시대의 신앙 형태를 교정하며 가톨릭 신자가 되어 갔습니다. 가쿠레 기리시탄이 가톨릭의 그리스도인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에도바쿠후(에도막부)와 그 후의 메이지(명치) 정권도 그리스도교 금교령을 풀지 않았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임을 공표한 많은 신자들이 대량으로 검거되고 강제유배를 시키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정부의 처사가 비인도적이라는 외국의 비판에 부딪치자 메이지 정부는 금교령을 해제하여 신앙을 묵인하게 되었습니다.
어렵게 신앙의 자유를 얻은 신자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부락에 성당을 세워갔습니다. 지금의 나가사키 현에 있는 성당들은 그러한 시대의 신자들이 눈물겹게 세운 성당들입니다.
일본의 가톨릭교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잔인한 박해를 비롯하여 260여 년간 에도막부 시대의 혹독한 박해로 순교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들 1만여 명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를 합하면 5만 명이 넘는 순교자들의 피로 기록하는 역사입니다.
300년 가까이 혹독한 박해를 당한 일본 가톨릭교회의 역사에서 이른바 ‘가쿠레 기리스탄(隱れ吉利支丹 · 잠복 크리스찬)’의 기막힌 사연들과 더불어 나가사키현(長崎県) 전역이 대표적 순교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키츠키(生月)와 나가에노지마(中江の島) 인근의 섬들과 소토메(外海)에서 이주한 신자들이 집단촌을 이룬 고토열도(五島列島) 등 기막힌 사연들이 전해져오는 순교지가 나가사키 지방에 산재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