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일본 26 성인의 명단과 조선출신 순교복자
순서는 각 성인이 매달린 십자가(순교기념탑)의 동쪽부터
| 순교자 | 직분 | 특기사항 |
| 성 프란시스코 | 미상 | 체포되지 않았으나, 순교하고자 나가사키로 가다 체포되어 처형당함. |
| 성 코스마 타케야(38세) | 선교사 | 오와리 출신. 칼 장인이었음. |
| 성 베드로 스케지로 | 미상 | 순교자들을 돌보고자 파견되었으나 포박당하여 같이 순교. |
| 성 미카엘 코자키(46세) | 활장인 | 프란치스코회 3회 소속. |
| 성 디에고 키사이 | 수도자 | 창으로 몸이 찔렸을 때 작은 목소리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부름. |
| 성 바오로 미키(33세) | 수도자 | 미요시 가문의 가신 미키 한다유의 아들. 죽기 전 "나는 아무 죄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당합니다" 라고 말함. |
| 성바오로이바라키(54세) | 미상 | 죽기 전 "주님!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라고 기도함. |
| 성 요한 고토(19세) | 수도자 | "아버지도 하느님의 가르침을 믿고 게으르지 않게 하느님을 섬기시기를"이라 말하며 자신의 묵주를 아버지에게 건냄. |
| 성루도비코이바라키(12세) | 미상 | 본래 체포 시 제외되었지만 스스로 자청해 체포되었고, 형장에 가서는 "내 십자가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음. |
| 성 안토니오(13세) | 미상 | 중국인과 일본인의 혼혈. 형장에서 한탄하는 양친을 달램. |
| 성베드로밥티스타(48세) | 신부 | 스페인인. 그리스도처럼 양손이 못박히기를 희망함.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사망함. |
| 성마르키노데라 아센시온(30세) | 신부 | 스페인인. 창으로 몸이 찔렸을 때 "주님! 저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겠습니다."라고 외침. |
| 성 필립보(24세) | 수도자 | 멕시코인. 형 집행 중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성가를 부르면서 숨을 거뒀다. |
| 성 군디살보 가르시아(40세) | 수도자 | 인도인. 형 집행자에게 개전과 개종을 권유함. |
| 성 프란치스코 브랑코(28세) | 신부 | 스페인인. 사후에도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음. |
| 성 프란치스코 데 산 미구엘(53세) | 수도자 | 스페인인. 젊은 시절에 프란치스코회에 입회. |
| 성 마티아스 | 미상 | 세례성사를 받은 직후 박해가 시작되어 체포됨. |
| 성레오카라수마루(48세) | 선교사 | 이전에는 불교 승려였으나 개종함. |
| 성 보나벤투라 | 미상 | 이전에는 불교도였으나 유아세례를 받은 것을 알고 기독교로 개종. |
| 성 토마스 코자키(14세) | 미상 | 마르티노 신부를 도움. 나중에는 사제가 될 계획이었음. |
| 성요아킴사카키바라(40세) | 미상 | 의학을 공부하였음. 설교에 감동하여 세례를 받고 가난한 병자들을 위해 일하였음. |
| 의사성프란치스코(46세) | 미상 | 교토에서 세례를 받고 성 요셉 병원에서 일함. |
| 설교자 성 토마스(36세) | 선교사 | 정의감이 강했음. |
| 성 요한 키누야(28세) | 미상 | 수도원 가까이 살아 선교사와 접촉기회가 많았음. |
| 성 가브리엘(19세) | 미상 | 개종자. 양친 역시 가톨릭 신자가 됨. |
| 성 바오로 스즈키(49세) | 선교사 | 외국인 신부의 선교를 도움. |
3) 조선출신 15인의 순교복자
소개된 26위의 성인 순교자 말고, 393위의 순교자가 1867년과 2008년 두 번에 나누어 복자가 되었다.
그 중 15위의 복자는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에서 끌려온 조선 출신 순교자들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노예로 5만명 정도의 조선인이 큐슈로 끌려갔는데, 당시 나가사키 교구장인 세루케이라 주교는 1598년 노예매매에 가담한 신자들에 대한 파문과 전쟁으로 끌려온 노예에 대한 해방을 명시한 사목교서를 발표한다.
이에 천주교 신자였던 일본인들은 노예매매를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노예로 끌려온 조선인들도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 약 7천명의 조선인이 이로 인해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나가사키에는 성 로렌조 성당이라는 조선인 성당이 생기기 까지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서 393위의 순교복자 중 조선 출신이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5위의 순교복자 중에 카이요(Caius)와 빈센트 카운(Vincent Caun)이 있는데 이들은 조선인 첫 번째와 2번째 예수회 수사이다. 빈센트 카운은 사제 양성을 받다가 순교 하였으며 조선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사제서품이 1845년이므로 그로부터 220여 년 전에 조선인 최초의 사제가 일본에서 나올 수도 있었다.
이 이야기를 다르게 바꾸자면 막부가 가톨릭 박해를 하지 않았다면 한국 가톨릭의 역사도 충분히 바뀔 수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인 최초의 예수회 수사라고 일컬어지는 복자 카이요는 조선에서 승려로서 살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전쟁포로로 나가사키로 끌려오게된다. 1598년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자 절에서 생활을 하던 중, 예수회 신부의 눈에 띄어 세례성사를 받았고 예수회에 입회하고 싶어했지만 예수회 입회 허가는 나지 않았다.
대신 키리시탄 다이묘였던 복자 다카야마 우콘의 부하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키리시탄 추방령을 내리자 다카야마 우콘은 필리핀 마닐라로 떠났는데, 카이요는 주군을 버리지 않고 마닐라로 따라가게 된다.
복자 다카야마 우콘이 사망하자 다시 나가사키로 돌아온 그는 선교생활을 열심히 하던 중에 체포되었고 모진 고문과 협박을 견뎌야만 했다. 그는 결국 사형집행일이 가까이 다가오자 수도서원을 할 수 있었고 결국 조선인 최초의 예수회 수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도미니코회 수사를 숨겨준 죄로 끌려온 일본인 농부 고이치 디에고와 같은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깊은 신앙적 친교를 나누다가 같은 날 화형을 당하며 생을 마감한다.
2016년이 되어, 깊은 친교를 나누다가 함께 불길에 스러져간 두 사람을 기리는, "고이치 디에고와 조선인 복자 카이요 순교 현양비"가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 안에 세워졌다.
2번째 수사였던 복자 빈센트 카운의 행적은 복자 카이요 보다 조금 더 알려져 있다.
복자 빈센트 카운의 원래 성은 권씨로 세례명인 빈센트와 합쳐 빈센트 권이라고 불린다.
그는 원래 양반가문의 자제였는데, 임진왜란에 휘말려 노예로 나가사키로 끌려가게 되었다. 하지만 예수회 신부는 그의 총명함을 보고 세례를 주고 예수회 신학교에 입학시켜 사제로 양성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금교령이 선포되고 빈센트 권도 사로 잡혀 온갖 고문을 당했고, 사형집행 전날에 수도서원을 함으로써 예수회 수사가 될 수 있었다. 복자 빈센트 권은 1626년 6월 29일에 화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의 3층에 가면 다른 복자와는 다른 복장을 한 초상화가 한켠에 있는데, 바로 복자 빈센트 권의 초상화이다.
평신도 수도단체인 프란치스코회 재속 3회 출신으로 전해지는 조선인 복자도 있는데, 복자 츠지 쇼보에 가스팔의 가족이다. 복자 츠지 쇼보에 가스팔은 정유재란때 일본에 끌려가서 포르투갈 상인에게 팔렸다가 몇 년후 다시 나가사키로 와서 부인인 마리아와 결혼하였고, 아들 키에몬 루카를 낳았다.
츠지 부부는 프란치스코 재속3회에 입회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선교에도 열정적이었으나 금교령 선포 이후 잡혀 1627년 8월 츠지부부는 화형으로, 아들 키에몬 루카는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당초 츠지 쇼보에 파스칼을 제외하고 부인인 마리아와 키에몬 루카는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9년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에서 일하던 한국인 수녀가 마리아가 조선 출신이라는 것을 밝혀내었고, 이는 나가사키 대교구장과 한일주교교류모임에서 양국 주교들이 인정하여 공식화 되었다.
그 이외에 도미니코회 성직자를 숨겨주다가 최초의 조선인 순교자가 된 다케야 소자부로 코스메 가족, 일본 최초의 신부인 세바스찬 키무라 신부를 숨겨주다가 순교한 하마노마치 안토니오 가족, 프란치스코 재속3회 출신으로 글을 몰랐으나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선교를 하다가 순교한 시네몬 토마, 예수회 신부인 발다살 토마스에게 집을 제공하고 여러 편의를 제공하다가 밀고로 붙잡혀 순교한 아카시지에몬 카요 등 조선출신 순교복자이다.
4) 기타
일본 26위 성인을 다룬 흑백 영화 <순교혈사 일본 26위 성인>이 1931년 제작되었는데, 당대에는 해외에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지만 2020년 기준으로 영화 연출 스타일이 상당히 깬다. 무성영화라 다소 방정맞고 경박한 어투의 변사가 내레이션을 넣어주고, 지나치게 발랄하게 들리는 BGM이 거룩함과 비장함을 해친다(...) 영화 보기
2016년 NHK 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 30화에 등장한다. 후시미성 공사에 목공 조장으로 참가하는 프란시스코 키치조에게 고니시 유키나가의 어머니 막달레나 와쿠사의 부탁으로 주인공 중 한명인 키리가 찾아가서 십자가상을 받아서 호소카와 가라샤에게 전달한다.
이후 토사[9]에 스페인의 배 산 페리페가 표류해왔는데, 실려있는 화물의 가치가 70만석[10]이라는 소리를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전의 진도 8급 대지진으로 인해 소모된 지출을 만회한답시고 그 화물을 뺏으려 하는데, 몇년전 내린 배의 화물을 함부로 뺏지 말라는 명령과 충돌하지 않는답시고 신부 추방령을 꺼내들어서 신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한다.
귀와 코를 자르고 조리돌림 후 책형에 처하라는 잔인한 명령. 프란시스코는 "왜 자신은 잡혀가지 않았을까요"라고 고민하면서,
가면 안된다는 가라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잡혀간 사람들에게 스스로 찾아간다.
이후 "6명의 선교사와 20명의 일본인 신자는 이후 나가사키에서 책형에 처해였다. 그 가운데에는 프란시스코 키치라는 장인도 섞여있었다"라는 나레이션과 함께 웃고있는 히데요시의 얼굴이 나온다. 이 사건은 도요토미 정권 안팎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일화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