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호소가와글라시아[일본천주교회사]
▼ 오사카 주교좌 성 마리아 주교좌성당 성당에 호소가와 가라샤의 석상
오사카 주교좌 성 마리아 주교좌성당 성당에 호소가와 가라샤의 석상이 있다. 성당 옆에는 호소카와 그라시아가 사용한 우물(越中井)이 있다. 호소카와 그리시아는 2008년 11월 시복되었다.
호소카와 가라샤 에이로쿠 6년(1563년)센고쿠 시대의 여성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고 후일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하여 노부나가를 죽게 만든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셋째 딸로 아케치 다마(明智 珠)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본명은 다마(珠/玉) 또는 다마코(玉子)이나 기리시탄이 되면서 얻은 세례명 가라샤(ガラシャ, 그라시아, Gracia의 일본식 발음)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오다 노부나가의 중매로 노부나가의 적남(嫡男) 오다 노부타다의 가신이자 후일 부젠 국(豊前国) 고쿠라 번(小倉藩)의 번주가 되는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의 정실이 되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인질극을 시도하던 이시다 미쓰나리에 의해 사망했다. 실제로 '호소카와 가라샤'라는 이름이 대중에 널리 알려진 것은 여성이 남편의 성을 쓰는 것이 정착된 메이지 시대에 이르름과 동시에 일본 기독교인들이 가라샤의 종교인으로서의 미덕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세례명을 부각하여 홍보하면서이다.
아버지인 아케지미쯔히데가 혼노지(本能寺)에사 오다노부나(織田信長)를 살해 하고 모반을 이르켰을 때 남편인 호소가와 다다오기(細川忠興)는 이에 반하여 아케지미쯔히데의 토벌에 나서자 하루 아침에 사돈간에 원수가 되고 오도 갈데없이 자결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그녀를 남편은 특별한 배려로 깊은 산속에 유배 보내게 되는데,
이곳에서 다마코(호소가와그라샤)는 시녀 마리아를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되고 교리로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들게 되어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신부의 관면을 받아 시녀 마리아로부터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가라샤(Glatia(그라시아)-라틴어로 은총)라 하였다.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사후(1598년) 토요도미가를 지킬려는 이시다미쯔나리(石
田三成)와 도꾸가와이에야스(徳川家康)를 받드는 편이 동서(東西)로 갈리어 세끼
가하라(関ヶ原)에서 결전을 갖게되는데 이시다는 상대 다이묘들의 처들을 오사
카성에 불러들여 인질로할려고하자 자기 때문에 남편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
려한 가라샤는 자결할려고 결심 했으나 천주교신자로서 자결은 죄가 되므로 자
결하지 못하고 부하를 시켜 자신의 목숨을 끊게한다.
이러한 사실이 서양에 알려지자 1698년 에레오놀 막달레나(Eleonore Magdalena)황후의 영명축일에 예수회 극장에서 오페라로 상연하게 되는데 이 때 일본의 무사도 또는 무가사회의 예법 등을 알리없는 서양에서는 야만적인 남편군주의 비도덕적인 핍박에 견디지 못한 가라샤(그라시아)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게되고 종국에는 폭군적 남편을 개심시켰다고 해석하게된다.
이렇듯 미화된 가라샤의 이야기가 다시 일본에 들어와 순교성녀처럼 추앙하게된
것이다.
덧붙임: 가라샤에게 세례를 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는 에스파냐 마드
리드 출생. 예수회 선교사로 1577년 일본에 파송되어 전교사업을 하던 중, 1592
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가톨릭교를 탄압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
臣秀吉]가 일본 천주교도 1만 8000명으로 군대를 편성하여 출정시켰는데,
그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침략 선봉군 종군신부로 한국에 들어왔다가
이듬해 돌아갔다.
그후 침략군 철수 때에 잡혀간 한국 민간인 2,000여 명에게 세례를 주고 신도로 만들었다.
고니시유키나가(세례명" 아우그스티누스)는 위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西군에 가담, 패장이 되었는데 그도 천주교신자라 셋보꾸(切復-배를 갈라 자결)를 거부하고 처형되었다(고니시 유키나가는 본시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지만 유키니가는 성인이 된뒤 다가야마 우곤(高山右近)의 인품에 반하고 그의 권유에 의래 올간치노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