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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가톨릭교회사

세키가하라(關原) 전투[일본천주교회사]

작성자김창환|작성시간21.12.26|조회수245 목록 댓글 0

8. 세키가하라(關原) 전투[일본천주교회사]

 

일본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전투라고 하는 '세키가하라' 전투입니다. 세키가하라는 전투가 벌어진 지명인데, 모두 17만의 군사가 대치한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라고 합니다.

 

이후 사람이 모든 것 을 건 큰 일을 하려고 할 때 쓰이는 비유적 표현으로 쓰인다고 들은 것 같기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을 내세운 야심찼던 관료 이시다 미츠나리 측의 서군과 '울지 않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비유로 유명한 대명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의 동군간에 벌어졌던 전투로, 이후 250년의 역사의 주인을 판가름한 전투입니다.

 

결과는 잘 아다시피 도쿠가와 이에야스 쪽의 동군이 승리하여 이후 에도 막부 시대를 열게 됩니다.

 

1) 결전의 배경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6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몸이 약했던 히데요시는 늦은 나이에 어렵게 아들 히데요리를 얻었는데, 히데요리가 5살되던 때에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게 된다. 자신도 노부나가의 어린 아들에게서 정권을 찬탈하는 선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히데요리의 안전이 걱정된 그는 편히 눈을 감지 못하다가 각각 쌀 100만석 이상의 영토를 가지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우에스키 가게가츠(우에스기 겐신의 아들), 모리 데루모토, 유키다 히데이에의 5명의 대명과 자신의 통치를 도왔던 5인의 문관 관료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겠다는 서약서를 받고 난 후에도 자신의 업보에 울며불며 편안치 못한 저승길에 오르게 된다.

 

당시에 재력이나 권력을 재는 기준은 쌀이었으며, 100석으로 3~5명의 병사를 징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앞서 거명된 5명의 대명들은 히데요시 이후를 노리는 2인자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너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제휴하기 전에 멋지게 일격을 날린 경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휘하에 '붉은 악마' 이이 나오마사, '사슴뿔 투구' 혼다 다다쓰구라는 일본 최고의 가신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이 사람을 주목하였고, 나머지 4명의 대로들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특히 5명의 관료 중에서 이시다 미쓰나리는 제2의 히데요시를 꿈꾸는 야심가였기 때문에 히데요리를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노골적으로 이에야스에게 적의를 드러내었다.

 

히데요리가 있는 오사카 성을 중심으로 서쪽은 문관인 미쓰나리를 따랐고 동쪽은 역전의 노장 이에야스를 주축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마에다 도시이에는 미쓰나리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고수하지만 나머지 3명의 대로가 서쪽 진영에 가담을 하였다.

 

히데요리 보호라는 기치를 걸고 3명의 대로를 전면에 내세운 미쓰나리가 일방적으로 우세하리라는 일반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미쓰나리의 미숙함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관료 재직 중에 독설을 서슴치 않아 상당히 많은 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구로다 나가마사, 가토 기요마사와 같은 맹장들은 히데요시가 옛부터 길러온 심복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쓰나리에 대한 반감으로 동쪽 진영에 가담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미쓰나리의 결정적인 실수가 또 한 번 일어나 승패를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가신들이나 동맹 대명들의 충성을 강요하기 위하여 인질을 잡아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미쓰나리는 전쟁을 유리하게 시작하기 위해 오사카에 남아있던 유명한 무장들의 식구를 인질로 잡아두고 경비병을 세웠으나 너무 방심을 하였다.

도쿠가와 진영의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내인 그라시아(세례명)는 자신으로 인해 남편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집에 불을 지르고 자살을 하였고, 가토 기요시마, 구로다 나가마사, 이케다 데루마사등의 부인들이 어둠을 틈타 전부 탈출을 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에야스의 카리스마를 두려워하던 일부 서쪽 대명들이 미쓰나리는 인물이 못 된다는 판단아래 중립을 표명하거나 동쪽으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이에야스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던 초기에는 미쓰나리가 절대 우세하였으나 점차 그 무게추가 기울어 거의 균형을 잡게 된 것이다.

 

2) 전쟁의 전개

서쪽 진영에서 가장 먼저 군사를 낸 것이 동쪽의 아이즈에 있던 우에스기 가게가츠였다. 가게가츠가 성공적으로 서쪽을 향해 진격하면 이에야스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고, 두 대명이 장기전을 벌이는 동안 서쪽의 8만 대군이 동쪽 진영의 대명들을 진압하여 이 작전을 종료한다는 미쓰나리의 계획에 따라, 가게가츠는 8만 명을 동원해 새로운 성과 진지들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서쪽으로 진격하기 위한 길을 닦았다.

 

이에야스는 휘하의 장수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군사들을 징집하도록 명 령하였고, 모든 이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1600년 7월 24일 동쪽으로 발길 을 돌려 미쓰나리의 계략에 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쾌재를 부른 가게가츠의 앞길을 막은 것은 이에야스의 동맹군인 모가미 요시아키라와 '외눈박이 용' 다테 마사무네였다.

 

이들은 이미 가게가츠의 움직임을 예상 한 듯 철저한 준비를 하였고 오히려 가게가츠가 이들에게 발이 묶여버렸 다. 미쓰나리의 움직임을 이미 파악한 이에야스는 유유자적하며 5만 대군 을 이끌고 서서히 아오야마까지 진군하였으나, 미쓰나리가 거병을 하는 순간부터는 그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아들 히데타다로 하여금 사나다 마사유키의 우에다 성을 공략하게 하고, 다다쓰구, 나오사마 에게 3만 2000명을 주어 먼저 오사카로 급히 진격하도록 명령한 다음에 후쿠시마 와 이케다로 하여금 기요스 성을 거쳐 전략 요충지인 기후 성을 먼저 점 령하게 하는 등 맹장의 면모를 날카롭게 세웠다.

 

한편 오사카의 기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데루모토가 서쪽 진영의 지휘자라 는 명색뿐이며, 일개 관료에 불과한 미쓰나리가 실질적으로 명령을 내리 는 것에 불같이 화를 내고 데루모토의 3만6000대군은 전투에는 참가하되 단 한 발의 화살도 날리지 않겠다고 동쪽의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맹세를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야스의 카리스마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동 쪽 진영과는 달리 서쪽 진영에는 차츰 배신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유부단했던 고바야카와 히데야키는 서군에 가담을 하고는 있었으나 이 에야스에게 전투가 시작되면 동군으로 이탈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여왔다.

 

8월 27일, 미쓰나리 측은 진격로에 있던 후지미 성을 공격하지만, 이 성 은 이에야스의 오랜 친구이자 가신인 도리이 모토다타가 지키고 있었으 며, 이 사람의 목적은 이에야스가 구원할 때까지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하 루라도 더 지연시키자는 것으로 살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이 조그만 성을 함락시키기까지 10여 일을 지체하고도 3천명을 잃었다. 미쓰나 리군은 이런 사소한 전투에 전력을 낭비하고 있는 데에다가 이에야스가 아직 가게가츠에게 묶여있는 것으로 오판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단 한 명의 병력도 아쉬운 미쓰나리의 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부 동맹군들은 정말 쓸데없는 곳에서 쓸데없는 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며느리 그라시아의 자살에 충격을 받은 호소카와 유사이가 다나 베 성에서 500명의 병력으로 이에야스 지원을 외쳤고, 동쪽으로 이동하 여 이에야스의 본국을 유린해야 할 1만5000명이 호소카와 집안의 정벌에 나선 것이었다.

 

전력의 격차로 보아서는 금방 떨어질 성이었으나 문제는 성주인 호소카와 유사이였다. 이 사람은 문화 불모지대였던 일본에서 얼마 안되는 시인이자 학자로 존경받던 인물이었고, 밖에서 포위하고 있던 장수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였다.

 

정작 포위를 한 후 당황하기 시작한 것은 서쪽 진영이었다. 이 유명한 학자의 일신상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이제는 일황도 동쪽으로 돌아설 판이었고 그렇다고 그 냥 물러서자니 그 영향이 만만치 않을 터, 오히려 포위한 쪽이 더 골치아 픈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궁색한 전술이 포탄이 들어있지 않은 대포로 하루 종일 성을 포격하는 것이었다. 유사이의 안전을 염려한 일황이 항복하고 교토로 오라는 사신을 다급하게 보냈으나 유사이는 학자 이전에 무사였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유사이는 농성을 풀고 교토로 갔 지만 무려 1만5000명의 병력을 세키가하라 전투와 전혀 관련 없는 먼 곳 에 2달간이나 묶어두었었다.

 

3) 결전의 전야

비록 지연되기는 하였지만 전략 요충지인 기요스 성을 치기 위하여 9월 20일에 미츠나리가 오가키 성에 도달하였을 때에, 지금쯤 먼 아이즈에서 가게가츠와 대치하고 있어야 할 이에야스의 은행나무 기치가 불과 5km밖 에 떨어지지 않은 아카사카에서 나부끼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서군은 크 게 술렁였다.

 

이에야스는 지난 40일동안 천천히 움직인 거리를 단 2주만 에 돌파했으며 기요스 성은 이미 점령된 상태였다. 이로서 미츠나리의 계 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서로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시마 사콘이 1300명을 이끌고 이에야스의 전력 탐색에 나섰다. 절반은 매복을 시킨 후 나머지 절반으로 다리를 건 너갔고 이를 요격한 동군의 나카무라는 다리를 건너 추격하였다가 매복군 에게 당하여 도리어 쫓겨왔다. 이에야스는 한 가옥의 지붕 위에서 이 광 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카무라도 제법이군. 서군 녀석들 도망가는 것 좀 봐. 아니 저 바보, 너 무 따라가면 안 되는데. 틀림없이 매복이 있을 거란 말이야. 이봐! 아리마 를 준비시켜라." 
이에 동군의 아리마가 보강되면서 정찰형태의 싸움이 차츰 커져 본격적인 전투가 되려는 순간 다리가 부서졌고 날이 저물면서 자연스럽게 최초의 탐색전은 종결되었다.

 

기요스 성을 빼앗긴 미츠나리의 본진은 언제라도 포위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오사카 성으로의 후퇴를 고려하던 중 미츠나리의 눈에 세키가하 라 지역이 들어왔다. 이 지역은 양 옆이 산으로 둘러싸여 입구와 출구가 각각 하나뿐인 곳으로 이에야스가 섣불리 추격해 들어온다면 쥐덫에 갇히 는 꼴이 될 판국이었다.

 

9월 20일 저녁, 동군이 다음날의 전투를 위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 안 12km 떨어진 세키가하라로 총 퇴각하는 서군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방울은 굵어졌고 어두워져 가면서 서군은 자기 부대의 기치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서군이 세 키가하라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가 넘어서였다. 미츠나리는 우선 고바야 카와 히데야키가 진을 치고 있는 마츠오 산으로 달려가 신호탄을 발사하 면 산 아래로 진격해 동군의 측면을 치겠다는 다짐을 받고는 맞은 편의 사사오 산의 중턱에 6000명의 병력으로 자신의 본진을 설치하였다.

 

비가 그치자 안개가 짙게 깔리기 시작하였다. 호소카베와 모리의 병력 2만 2000명은 낭구 산에서 이에야스의 배후를 치도록 되어있었다. 가장 늦게 도착한 것은 유키다 히데이에의 1만5700명의 병력으로 중앙 부근의 텐마 산에서 이에야스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칠 계획이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서군의 진영은 학익진과 흡사하였다. 새벽 4시 30분에 모든 진영을 편성한 서군 병사들은 젖은 갑옷 속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동군에서는 자정 직후에 미츠나리의 후퇴가 전해지자마자 이를 즉시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새벽 2시가 되기 전에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선봉으 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서군의 후미를 바라보며 달린 덕분으로 미츠나리의 최후위 부대와 비슷한 시각에 계곡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짙은 안개 때문에 후쿠시마와 유키다의 부대가 예정에도 없던 충돌을 하였으나 곧 서로를 놓치고 말았다. 이에야스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묵계를 이미 모 리에게 받았기 때문에 전면에 거의 모든 주력을 두었고 후방은 그 방어막 이 매우 얇았다.

 

이로서 17만이라는 대군이 대치하는 일본 역사상 최대의 회전이 벌어지 게 된다. 양측이 어디에 포진하고 있는지 대충 파악이 되었으나 안개 너 머로 들리는 말발굽과 진지구축소음은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 다. 양군은 쉴 새 없이 정찰병을 내보냈고 정찰병간의 전투와 이를 요격 하는 고함소리가 어둠 속에서 끊이지 않았다.

 

4) 결전의 시작

오전 8시 안개가 드디어 걷혀 양 군의 진영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진영이 소란스러워졌다. 양 군은 불과 수 백m의 사이를 두고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이 순간 동군에서 30명의 기병이 바람과 같이 서군의 유키다 히데이에의 1만5000대군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가 되어가면서 이에야스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하였다. 아들인 히데다다가 쓸데없는 성 하나에 신경을 쓰는 바람에 1만6000명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고 있고 서군은 이제 겨우 3만5000명이 움직였을 뿐 이었다.

나머지 병력은 언제 공격해 올 것인가? 그러나 나머지 5만5000 명이 움직이지 않고 있던 것은 미츠나리에게도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고 바야카와 히데야키와 모리는 신호에 따라 공격을 개시하기로 하였으니 당 연하겠지만 나머지 병력은 왜 싸우지 않는 것이었을까?

오전 11시가 되면서 점차 이에야스의 본진이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싸움을 끝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미츠나리는 미친 듯이 신호탄 을 쏘아올렸다.


그 동안 관망만을 하고 있던 다른 대명들까지 이 공격군에 합류하기 시작 해 무려 2만여 명이 산을 달려 내려가 오타니의 측면을 찔렀다. 서군의 오타니는 이미 이들의 변절을 눈치채고 있었으나, 600명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전세가 기운 것을 직감한 오타니는 가신에게 자신의 목을 잘라 전리품이 되지 않도록 명령한다.

 

고바야카와의 2만여 명은 오타 니의 저지를 가볍게 물리치고 유키다와 고니시에게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동군을 밀어내려는 찰라였는데, 등뒤에서 칼을 맞은 꼴이 되 었다.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된 서군의 우익은 무너져내리기 시작하였다. 유키다 히데이에는 배신자만은 자신이 목을 자르겠다고 달려나가는 것을 근위무사들이 에워싸고 후방으로 실어날랐다고 한다.

 

 고바야카와의 변절로 순식간에 동군의 승리가 확실해져갔지만 모리의 3 만 대군이 움직인다면 최소한 무승부는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부대 들로 퇴로가 막힌 일부 패잔병들이 그만 낭구 산쪽의 모리 부대의 앞을 지나고 말았다. 


"고바야카와가 배신을 했다. 유키다와 고니시의 부대도 깨졌다. 서군이 졌 다. 이에야스의 3만 대군이 몰려온다." 


가뜩이나 싸우고 싶지 않았던 차에 아군의 패주 소식을 전해들은 모리의 대군도 동요가 일어나며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미츠나리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시종 몇 명만을 대동하고 황급히 자신의 영지로 도망치기 시 작했다. 이로서 모두 17만여 명이 벌인 일본 역사상 최대의 회전은 이에 야스의 카리스마와 서군 진영의 변절로 6시간만에 동군의 대승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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