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산

작성자김창환|작성시간24.01.31|조회수120 목록 댓글 0

김유산

북경에 파견된 밀사

 

17611801, 세례명 토마스, 전주에서 참수

 

김유산金有山토마스1761년 충청도 보령현 청연靑延역촌에서 아버지 김태일金太 과 어머니 김소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가 없어, 열다섯 살에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가 스물두 살에 환속하였다. 그러나 생계유지가 어려워 홍성군 금정 역졸로 이름만 걸어놓고, 부여군 홍산鴻山으로 가서 짚신을 삼아 팔며 연명하고 있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어 의지 할데가 없던 김유산은 승려가 되었다가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사람을 하늘같이 존중하는 천주교에 이끌려

흥산에는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李存昌루도비코 곤자가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1791년 신해박 해가 일어나자 형의 강요에 못 이겨 형식적으로는 배교했지만 본심만은 변하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그는 천주교를 계속 신봉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홍산에 머물고 있었다.

 

김유산은 17917, 홍산 천후泉後에 짚신 재료가 많다는 한 노인의 말을 듣고 갔다가 그곳에서 이존창의 머슴인 유순철을 만나게 되었다. 그후 유순철이 찾아와 천주 십계를 가르쳐 준다며 여러 날을 졸라 할 수 없이 배우고 익히게 되었다. 이렇게 천주교와 인연을 맺게 된 김유산은 이존창에게 기쁜 마음으로 교리를 배우고 개종하였다. 사람을 하늘같이 존중하고 모두가 형제 자매처럼 사랑하는 천주교에 끌려 입교한 것이었다. 그 뒤 이존창은 고산 저구리로 이사하였는데김유산은 전라도에 갔다가 우연히 시장에서 유순철을 만나 이존창의 집을 다시 찾게 되었다. 그리고 저구리에 머무르며 이존창에게서 계속 교리를 배웠다.

 

한편 이존창은 1795년 말경 체포되어 천안에서 연금 생활을 하고 있던 중 1797년 정사 박해가

일어나자이듬해부터 다시 공주 감영에 갇혔다.

당시 고산 대판리에 살고 있던 김유산은 1798년 옥에 갇힌 이존창을 면회 갔다가 이존창의 부탁을 받게 되었다. “중국은 천주교를 애초부터 금하거나 배척하지 않아 성당까지 지었다. 우리나라는 천주 십계가 나라에 유익한 것을 모르고 법을 세워 엄금하고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 실로 원통하다. 이제 만일 이러한 사연을 신부에게 알리면 우리나라가 금하는 것을 푸는 방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북경 천주당을 다녀와 달라는 것이었다.

 

이존창의 부탁을 받은 김유산은 사신 일행의 마부 직책으로 북경에 가서 동행한 군졸들과 함께 남당과 북당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관광차 갔다 온 것이므로. 천주교 신자들과의 접촉은 없었다. 한편 이존창은 1799년에 충청 감영에서 풀려 난 후 천안 장교將校에 임명되어 관청의 영문營門일을 보고 있었다. 이때 김유산은 진잠 산막동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존창은 그가 남당을 방문한 경험이 있으므로 다시 한번 다녀올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면서 자기 집에 은밀히 연락하여 겨울 내의 한 벌과 여비 15냥을 마련해 주며 비밀이 발설되지 않도록 신신당부하였다. 그리고 작은 저고리를 주면서 그 속에 정약종의 편지가 들어 있으니 북경에 전하고 답장을 받아 오라고 하였다.

 

평안도 정주로 간 김유산은 마침 다리를 다친 금정 역졸이 있어 그 사람을 대신하여 북경에 갈 수 있었다. 김유산은 여관에 한 5일쯤 묵다가 남당을 찾아가 이존창이 시킨 대로 암호로 가슴에 십자 성호를 그었다. 그런 다음 문지기에게 주교에게 전할 편지가 들어 있는 작은 저고리를 벗어 주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4일 후 답장을 받으러 갔을 때. 구베아 주교는 그를 반가이 맞으며 술과 과자를 권하고 답장을 저고리에 넣어 돌려주었다. 그 후 북경에서 귀국한 김유산은 구베아 주교의 서한을 옥에 있는 이존창에게 전해 주었다.

 

옷섶에 요망한 서찰을 감히 숨겨 가다니

18012월 초서울에서 시작된 신유박해의 불길은 전주에서 다시 타올랐다. 포도대장은 전라 감사에게 전라도 천주교의 두목인 유항검을 체포하도록 비밀리에 지시를 내렸다. 이에 유항검은 3월 초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는데, 당시 그의 동생인 유관검과 이우집윤지헌 등도 함께 체포되었다.

 

전라 감사는 유관검과 이우집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죄목을 찾아냈다. 그들이 서양 선교사를 끌어들여 나라를 망칠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한국 교회가 북경 주교에게 서양의 큰 배를 보내 주도록 요청한 활동이 정치권의 눈에는 외세를 끌어들여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역모로 인식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1798년과 1799년에 김유산이 밀사로 파견된 사실도 밝혀졌다.

그 결과 김유산은 다른 동료들보다 늦게 전라 감영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516일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이어 형조로 이송된 김유산은 85일부터 심문을 받았는데, 자기가 한 일은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며 순교할 준비를 하였다. 자기같이 천한 사람을 하늘같이 존귀하게 만들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얻게 해준 교회를 위한 일이라면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911일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으면서도 김유산은 전라 감영에서 실토한 말을 반복하여 말했다. 이에 의금부에서는 "김유산은 본래 시골의 천인으로 사학을 몹시 믿어 정약종, 유항검, 이가환, 이존창 등과 서로 내왕하였다. 그리고 감영에 갇힌 사교邪敎의 괴수를 찾아가 옷섶에 요망한 서찰을 숨기고는 감히 역졸의 명색으로 서양인이 거처하는 천주당에 몰래 들어가서 서찰을 전달하였으니실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죄로 결안한다고 판결하였다.

 

의금부에서는 판결문을 작성한 다음 날김유산을 유항검 '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등과 함께 전라 감영으로 보내어 때를 기다리지 말고 처형하도록 전라 감사에게 명하였다. 이에 김유산은 9171024, 마흔 살의 나이로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함으로써천대받으며 어렵고 고생스러웠던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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