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죽산 순교성지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서울에서 중부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다가 일죽 나들목에서 나와 죽산리 한가운데로 들어가면 수원교구 죽산 성당이 나온다. 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교우가 끌려와 혹독한 심문과 고문을 받던 죽산 도호부 관아터가 자리하고 있다.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로 갈라지는 주요 길목인 죽산에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조선 시대부터 일찍이 도호부가 설치되었다. 죽산 도호부는 지금의 안성시 죽산면 · 일죽면 · 삼죽면과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 백암면 등 넓은 지역을 관할한 행정기관으로 특히 교우촌이 많이 자리했던 지역을 담당했다. 그래서 병인박해 때 이 지역에서 체포된 신자들은 지금은 죽산면사무소가 들어선 죽산 도호부의 옥사로 끌려와 참담한 고문을 당한 후 현 죽산 순교성지 자리에서 처형을 당했다.
이곳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은 “치명일기” · “병인치명사적”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에서 그 이름이 밝혀진 이만해도 24명에 이른다. 하지만 척화비를 세우고 오가작통(五家作統)으로 ‘사학 죄인’을 색출한 뒤 무차별적으로 교우들을 끌어다가 처형하던 당시의 몸서리쳐지는 박해의 서슬을 생각해 볼 때,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무명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셀 수조차 없다. 병인박해가 시작된 1866년부터 이곳에 처음 공소가 설립되기 2년 전인 1932년까지 무려 70여 년 동안 신자 공동체의 형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그 당시 박해의 참상과 공포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죽산 순교성지에 얽힌 순교 사화는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들뿐이다.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숨어든 김 도미니코의 가족이 천주교 신자인 사실을 안 마을 사람 십여 명이 작당하고 찾아와, 열일곱 된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을 불러 몰살시키겠다고 협박해서 기어이 딸을 빼앗아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순교자 묘역 위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 가운데로 예수성심상이 보인다. 60세의 나이에 교수형으로 순교한 여기중은 한 가족 3대가 한자리에서 순교했다. 또 여정문은 그 아내와 어린 아들이 한날, 한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국법으로는 아무리 중죄인일지라도 부자(父子)를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죽산에서는 부자와 부부를 함께 처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었다.
이들이 죽산 도호부에서 심문을 받고 끌려가 순교한 처형 장소는 ‘잊은터’로 불리던 곳으로, 오늘날 죽산 순교성지가 자리한 그 일대이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이진(夷陳)터’였다. 고려 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죽주산성(竹州山城)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쳤던 자리로,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 하여 그런 이름으로 불려 왔다.
그 후 오랑캐의 피로 더럽혀진 이곳에는 사람들이 살지 못하게 되었고, 조선 시대에도 임진왜란 때 오랑캐들이 진을 쳤던 곳이기에 죄인들의 사형터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병인박해를 겪으면서 이진터는 순교터가 되었다.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하여 ‘잊은터’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가족도 친지도 한 번 끌려가면 영영 볼 수 없는 곳, 순교자들의 참담한 비극이 그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죽산에는 또 ‘두둘기’라는 곳이 있다. 죽산 읍내에서 서쪽으로 15리쯤, 지금은 삼죽면 소재지로 제법 큰 마을이지만, 옛날에는 인가가 드문 곳에 작은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름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설이 있다. 지형이 조금 도드라져서 그렇게 불렀다고도 하고, 땅이 진흙이어서 신을 땅에 두드려 패지 않으면 신발 바닥에 붙은 진흙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순교자 묘역 가운데 야외제대가 있고, 그 아래로 묵주기도 길 묵주알이 보인다.하지만 두둘기 마을은 병인박해 때 교우들의 애절한 사연이 담긴 한 많은 땅으로 변했다. 용인 · 안성 · 원삼 등지에 사는 교우들이 포졸에게 잡혀 가는 호송 길에 이 주막은 잠시 쉬어 가는 곳이 되곤 했다.
포졸들은 신자들을 줄줄이 묶어 끌고 가다가 주막에 들러 술을 마신 뒤 툭하면 갖은 트집을 잡아 심하게 두들겨 패곤 했다. 또 뒤쫓아 온 가족들은 교우들이 무참히 맞는 것을 보고 땅을 두드리며 원통해 했기에 마을 이름이 두둘기로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래저래 ‘두둘기’는 두들겨 맞는 곳으로 전해져 왔다.
이렇게 두들겨 맞고 죽산 도호부에 끌려와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이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거룩한 순교성지에 변변한 기념비 하나 제대로 세울 수 없어 안타까워하던 죽산 성당 신자들은, 그동안 포도를 팔아 모은 돈으로 죽산 도호부와는 약간 떨어져 있으나 ‘잊은터’로 불리며 처형지로 사용되었던 곳의 땅을 확보하여 성지 개발을 시작했다.
죽산 순교성지는 개발 단계부터 계획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신심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성체 · 성모 · 순교자 신심을 고양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풍스러운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순교자 묘역까지 성지를 한 바퀴 돌면서 묵주기도를 할 수 있도록 커다란 돌 묵주알들이 놓여 있다. 이 묵주기도 길은 바로 성모 신심을 통해 ‘땀의 순교’를 체험하는 순례길이다.
성지 중앙에는 무명 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양쪽에 날개 모양으로 순교자 현양탑과 병인박해 순교자 묘 24기가 좌우 12기씩 나란히 모셔져 있다. 이 순교자들은 모두 죽산으로 끌려와 순교한 이들로 한치수 프란치스코, 김 도미니코, 여정문 일가 등 24명만 “치명일기” · “병인치명사적”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등에 그 행적이 남아있을 뿐 나머지 100여명의 순교자들은 이름조차 알 길이 없다. 순교자 묘역은 순교자 신심을 통해 ‘피의 순교’를 체험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병인박해의 여파로 196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이곳에서 순교한 박경진 프란치스코(1835-1868년)와 오 마르가리타(?-1868년) 부부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가운데 무명 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좌우에 병인박해 순교자의 묘 25기가 자리하고 있다.
순교자 묘역 바로 위에는 십자가상이 조성되어 있고, 십자가상 뒤에는 ‘예수 부활상’(예수성심상)을 중심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후광 모양처럼 예수 부활상을 감싸 안듯 꾸며져 있다.
그리고 성지 맨 위편에는 성체조배를 할 수 있는 소성당이 자리하고 있고, 대성당은 순교자 묘역 옆 돌담 건너편에 건립되었다. 땀과 피가 한 덩어리가 된 순교의 결정체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기쁨과 은총을 만끽하고 정화되는 거룩한 장소가 바로 죽산 순교성지이다.
2013년 6월 6일에는 죽산 순교성지 바로 옆에 평신도 봉사자 양성의 요람이 될 수원교구 영성관이 완공되어 축복식을 가졌다. 그리고 2016년 9월 28일에는 죽산 순교성지에서 3.5km 거리에 있는 ‘죽산 도호부 옥사 순교성지’ 선포 및 축복식을 거행했다. 죽산면사무소 입구 약 60㎡ 넓이의 시유지에 조성된 죽산 도호부 옥사 순교성지에는 1968년 9월 28일 죽산에서 순교한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와 동료 순교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모습의 성상(최영철 바오로 작)도 세웠다. 그리고 순교자 현양비와 성지를 설명한 비석도 설치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1월 17일)]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1835-1868년)
1835년에 태어난 박경진 프란치스코는 장성한 다음 오(吳) 마르가리타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 그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사 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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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프란치스코는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동생인 박 필립보와 맏아들 박 안토니오에게 소식을 전하였는데, 특히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가 들어 있었다.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천주님을 공경하고, 천주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여 나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여라.”
이 편지는 집안에 남아 있던 성물과 함께 박해 중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복자 오 마르가리타(?-1868년)
오(吳) 마르가리타의 출생지와 천주교에 입교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고, 뒷날 박 프란치스코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그들 부부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사 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오 마르가리타와 박 프란치스코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이었다.
김 도미니코(?-1866년)
순교자 ‘김 도미니코’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에 숨어 평온히 주님께 의존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안 마을 사람 10여명이 찾아와 열일곱 살 난 그의 딸을 겁탈하려고 딸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힘이 센 김 도미니코의 둘째 아들이 누이동생을 데리고 산으로 피하며 따라오는 사람은 돌로 쳐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순교자 김 도미니코에게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을 데리고 와서 너희 가족을 몰살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래서 순교자 김 도미니코는 여러 가족을 생각하여 할 수 없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딸을 그들 앞에 내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갖은 모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수하다가 마침내는 순교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여기중(?-1866년)과 여정문(?-1867년)
순교자 여기중은 한 가족 3대가 한 자리에서, 순교자 여정문은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한날 한 자리에서 순교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국법으로도 부자를 한 날 한 시 한 장소에서 처형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죽산 순교성지에서는 부자가, 부부가 한 날 한 장소에서 처절하게 처형되었습니다. [출처 : 이상 죽산순교성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