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남방제 성지
남방제 성지는 충남 아산시 신창면에 자리 잡고 있는 박해 시대의 교우촌 자리이다. ‘남방제’라는 말은 제방 둑이 ‘ㄱ’자로 굽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주변에는 200여 년이 넘는 버드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아주 오래전에 형성된 듯하다. 남방제 성지는 그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 아니라, 이곳에 살았던 수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이 죽음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낸 곳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 가운데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분은 한 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신앙인이 태어나고 양육되어 영광된 순교의 관까지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곳에서 순교하지 않았지만, 병인박해(1866년) 당시 순교한 성 조화서 베드로는 이곳에서 성가정을 이루고 아들 성 조윤호 요셉을 키웠다. 또한 교우촌 안에서 함께한 교우들의 도움으로 최양업 신부의 사목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성 조화서 베드로는 1815년 수원 도마지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1839년 기해박해 때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홀어머니를 모시고 신창 땅으로 이사하였다. 신창 남방제에서 한 막달레나와 결혼하였고, 1848년 아들 조윤호 요셉을 낳았다. 하지만 아들 조윤호 요셉을 낳고 한 막달레나가 죽었고, 홀아비로 있다가 다시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그의 성격은 쾌활하면서도 겸손하고 양순했으며, 신자의 본분을 충실하게 지켜 신자다운 몸가짐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성 조 베드로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 겸 마부로 선교 활동을 도와 전국의 신자촌으로 모시고 다녔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가 포졸들에게 잡혀 갇혔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마친 다음, ‘베르뇌 주교’(한국이름 장경일)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다. 그 길에 최양업 신부가 과로에 장티푸스까지 겹친 아주 위급한 상황에 부닥쳤고, 성 조 베드로가 푸르티에 신부에게 이를 알려 병자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 후 1864년 성 조 베드로는 가족들을 이끌고 전주 소양면 성지동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조용하고 착실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1866년 12월 5일 저녁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옥에 갇힌 성 조 베드로는 갇혀 있던 다른 신자들을 격려하며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하도록 준비시켰다고 한다. 전라 감사는 성 조 베드로를 회유하기 위하여 온갖 협박과 함께 배교를 강요하였지만 “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죽은 뒤 내 곧 새 세상에 가서 살게 될 것이요.”라고 응수하여 더욱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성 조화서 베드로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세찬 칼을 세 번 받고 장엄하게 순교하였다.
성 조화서(趙~) 베드로(1815-1866년)
성 조화서 베드로(Petrus)는 수원 지방의 도마지에서 태어났고, 1839년에 순교한 조 안드레아(Andreas)의 아들이다. 부친을 잃은 뒤에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신창 땅으로 이사하여 몇 년 간을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 겸 마부로 일하였으나, 최 신부가 선종함으로써 1864년에 다시 전주 소양면 성지동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조용하고 착실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한 막달레나(Magdalena)를 아내로 맞아 아들 조윤호 요셉을 낳았는데, 얼마 후 부인 한 막달레나가 죽자 홀아비로 있다가 다시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그의 성격은 쾌활하면서도 겸손하고 양순했으며, 신자의 본분을 충실하게 지켜 신자다운 몸가짐을 잃지 않았다.
1866년 12월 5일 저녁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붙잡힌 조 베드로는 자기 집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놀란 그의 며느리가 달려 나가 자기 남편인 조윤호 요셉에게 집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하였다. 자기 아들 요셉이 집으로 들어오자 아버지는 “너는 여기에 들어와선 안 된다. 어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였으나 아들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면서 자기 아버지 방으로 들어가 함께 체포되었다. 이렇게 하여 부자가 함께 묶여 전주로 향하는 도중에 여러 가지 수모와 혹심한 천대를 받았으며, 주막에서 며칠을 묵어가며 목적지인 전주에 도착한 후 곧이어 다른 신자들과 함께 심문을 받게 되었다.
조 베드로는 감옥에 갇혀서도 함께 있는 다른 신자들을 격려하여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하도록 준비시켰다. 또한 그는 죽인다고 협박하며 배교를 강요하는 원님에게 “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죽은 뒤 내 곧 새 세상에 가서 살게 될 것이요.”라고 응수하여 더욱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윽고 그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사형장에 도착한 조 베드로는 침착하게 죽을 준비를 한 다음 희광이에게 “이곳 처형장에서까지도 흉포한 그대여! 천주교를 좀 믿어보시오. 우리는 죽으면서도 천주교를 신봉할 것입니다”라고 한 후 성호를 긋고 나서 세찬 칼을 세 번 받고 장엄하게 순교하였다. 때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성 조윤호(趙~) 요셉(1848-1866년)
성 조윤호 요셉(Josephus)은 조화서 베드로(Petrus)의 아들로 충청도 신창에서 태어났고, 부친을 따라 1864년경부터 전주 성지동으로 이사하였으며, 박해가 일어났을 때에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부인과 함께 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깊은 신심과 세심하리만큼 성실한 수계생활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 또 젊은 조 요셉은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과격하고 용감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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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 감사 앞에 불려나간 요셉은 먼저 문초를 받은 아버지가 배교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배교하라는 감사의 말에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가 처리하실 줄 압니다. 저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배교할 생각이 없으니 통촉하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감사가 성교회의 도리를 가르쳐 준 사람과 서양 책을 어디에다 숨겼느냐고 묻자 그는 “성교 도리를 가르쳐 준 분은 1839년에 치명하신 할아버지이며, 책은 가진 것이 한 권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후 감사는 다시 한 번 이 젊은이를 배교시켜 보려고 시도했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포졸들은 사형장으로 향하는 긴 여행 중에서까지 배교하면 잃어버린 재산을 모두 다시 찾아주겠다고 하면서 그를 꾀어보았다. 그러나 “나의 생사를 결정짓는 것은 당신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말은 그만 두십시오” 하고 거절했다. 1866년 12월 23일 포졸들은 그에게 큰 칼을 씌워 먼 길을 뛰어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바람에 그는 기진맥진하였다. 형장에 도착하자 관리가 사형 선고장을 그 앞에 가져다 놓자 그는 태연하게 서명한 후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했다. 이에 기가 질려버린 감사가 음식 맛이 어떠냐고 묻자, 요셉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음식이라 무척 맛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감사는 바지를 벗기고 엎드리게 하였다. 손을 머리 위로 묶고 양쪽에 서서 곤장을 교대로 치기 시작하였다. 곤장은 수없이 부러져 나갔고 얼마를 쳤는지 친 사람도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렇게도 빳빳하던 고개가 드디어 푹 숙여졌다. 이를 본 사람들은 요셉이 죽은 줄 알았다. 그러나 요셉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뒤늦게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안 포졸은 장터로 모여든 거지 떼를 시켜 밧줄로 목을 매고 양쪽에서 당기니 숨을 거두었다. 조 요셉의 장한 순교로 그의 집은 연 3대의 순교자 가문이 되었다. 때는 1866년 12월 23일이요,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