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세리 성당해설(성지해설자용)

작성자김창환|작성시간26.06.13|조회수23 목록 댓글 0

45 공세리 성당.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온 아산만에 인접한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지 · 성당은 일찍이 조선조 때 아산 · 서산 · 한산을 비롯해 멀리 청주 · 문의 · 옥천 · 회인 등 40개 고을의 조세(租稅)를 쌓아 두던 공세(貢稅) 창고가 있던 곳이다. 이 창고 건물은 1523(중종 18)에 개설되었다가 고종 때 폐지되면서, 80칸짜리 건물이 헐리고 1897년 그 자리에 공세리 본당 구() 성당 및 사제관 건물이 들어섰다.

공세리 본당의 오늘이 있기까지 초대 주임을 지냈던 드비즈(Devise, 成一論)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이 그 바탕을 이루었다. 드비즈 신부는 2대 기낭(Guinand, 陳普安) 신부가 1년 만에 전임하면서 초대에 이어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해 1930년까지 34년간 공세리 본당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발전의 터를 닦았다. 그 크고 화려함으로 건축 당시 아산 지방의 명물로 멀리서부터 많은 구경꾼을 불러왔던 현재의 성당 건물은 드비즈 신부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을 불러 지휘 · 감독하면서 지은 1922년도의 성당이다.

 

길에서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마치 순교의 현장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안내자처럼 길게 뻗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피땀이 범벅이 된 순교자의 발걸음을 묵상하면서 올라가면 한편으로는 성당이 자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유박해(1801)부터 병인박해(1866)까지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으로 순교한 32위를 모신 납골식 순교자 현양탑이 자리하고 있어 이곳이 성지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순교자들의 잠자리를 말없이 지켜보는 성모상이 건립되어 있다.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진 곳은 원래 1867년 정묘년에 순교한 박의서 사바스, 박원서 마르코, 세례명이 알려지지 않은 박익서 3형제가 나란히 잠든 묘소가 있던 곳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우리의 신앙 선조들 중에는 전국 곳곳에 이름도 채 남겨 놓지 못한 채 오직 천주를 모신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초개같이 목숨을 던진 무명의 순교자들이 많다. 이곳에 모셔져 있는 박씨 3형제는 겨우 그 이름과 몇 가지 행적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어떻게 살다가 죽어 갔는지 그리 상세하게 전해 내려오지는 않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다른 많은 순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병인치명사적11권에 보면 병인풍파를 당하여 3형제가 함께 잡혀 수원으로 올라가며 원서가 말하되 내 평생 천주 공경을 실답게 하지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노라하며 즐거워 동생 들어 보소. 우리 3형제 올라가 위주 치명하자하고 조금도 변함없이 3형제 수원으로 올라가니 라고 이들의 최후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공세리 성지 · 성당은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1998728일 성당과 옛 사제관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 성당과 옛 사제관의 원형 복원공사와 사제관, 수녀원, 예수마음 피정의 집, 성체조배실, 주변 정비사업 등을 시작해 2년 뒤인 20021013일 축복식을 가졌다. 20078월에는 박씨 3형제 순교자의 묘가 있던 자리에 순교자 현양탑을 세워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순교자 28위의 유해와 묘석을 봉안하고, 그 위에 도자기 테라코타 부조작품 ‘28위 순교자를 설치하였다. 그 후 추가로 발굴된 4위 순교자의 유해 또한 이곳에 모셨다. 200896일에는 옛 사제관을 개보수하여 내포지방 교회사를 중심으로 특화한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성당 옆으로는 한적한 오솔길도 마련되어 있는데, 이 길에는 예수의 수난을 묵상할 수 있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마련되어 있다. 십자가를 지고 피땀을 흘리신 예수와 같이 우리 선조들도 자신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시대가 가져온 험한 박해의 시기를 겪었던 것이다. 건축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해 온 성당 옆에는 오래된 거목이 한 그루 있다. 그 연륜을 알 수 없는 고목은 공세리 본당의 긴 역사를 그저 무심한 듯 말없이 증언해주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8629)]

 

박씨 3형제의 순교

박의서(사바스)

후덕한 인품과 굳은 신앙심으로 죽음이 두려워 신앙심이 흔들리거나 배교하려는 마음 없이 깨끗하게 주를 증거하고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다. 박의서 3형제가 수원 걸매리에 살았으며, 그 후손들이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에서 살고 있는 밀양 박씨 집안임을 알 수 있다. 이 후손들은 박해를 피해 일부는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으로, 일부는 충남 강경으로, 또 일부는 평택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이 후손들 중에서 박상래, 박성팔, 박노헌, 박중신 신부 등 네 분의 사제가 배출되었다.

 

박원서(마르코)

한국교회사 연구소에서 정리 중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3]에 의하면 그는 본디 태중 교우로되 마음이 우람하기로 수계를 잘못하고, 노름도 약간하고, 서털구털 지내므로 그 형님이 항상 걱정하며 살다가 병인년에 3형제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갈 때 말하기를, “내 평생에 천주를 공경함을 실답게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 하고 즐거워하며, 장차(將差)더러 나를 이번에 올려 가거든 갑작스럽게 하지 말고 바로 죽여주면 우리 주모께로 가서 살겠다.“하며, 오히려 그 형님과 아우를 권면하고, 기쁜 마음으로 순교하였다.

 

박익서(세례명 미상)

- 박상래 신부의 증조부

(비문) 천성이 곱고 순결하여 오로지 한 마음으로 천주를 공경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들 삼형제와 이 마리아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가 186738일 순교하였다. 시체는 그 당질 웅진씨 바오로와 양성우씨가 거두어 아산시 인주면 맹고개 선영에 안장하였다가 1988920일에 맹고개 묘지에서 공세리 본당으로 이장하였다.

 

밀양 박씨 집안의 순교자들(7)

- 이 마리아(박원서의 부인). - 박인서(박의서의 사촌동생). - 박제환 기천 베드로

- 박홍갑(박의서의 아들). - 조 모니카(박덕여의 부인). - 박화진 알렉산데르(박덕여의 아들)

- 이씨부인(박의서의 종제수)

 

박씨 외의 걸매리 지방 순교자들

- 김중백. 김지득. 이학습. - 김장복(박덕여의 생질)

- 김씨(김장복의 아내). - 오인악. - 장원심과 그의 아들 장팔보

- 김흥서 토마 : 지금의 수원교구 남양성당에 성지화

- 김 필립보(비리버)와 그의 아내 박 마리아 : 남양에서 순교

- 최사도 요한 [출처 : 공세리 성당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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