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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 확정
-주후 325년 니케아[Nicaea]공의회에서-
324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그의 정적인 리키니우스를 이기고 정권을 장악했을 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문제를 둘러싸고 생겨난 아리우스 논쟁 때문에 분열의 위기에 놓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 분쟁이 국가적 차원에서 분열이 조장될 것을 걱정하여, 황제 자신의 주선으로 그 당시 황제의 거주지인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케 했는데, 여기서 결정된 것이 바로 니케아신경이다. 이 신경의 특징을 나타내는 단어는 ‘호우시우스’인데, 그 의미는 성자(聖子)는 성부(聖父)와 본질이 하나라는 것이다. 그 당시 교회의 쟁점이 된 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는 것이었다.
* 니케아 회의는 기독교의 세계적인 회의의 효시(嚆矢)로서, 당대의 최고 사건이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분기점이다. 특별히 이것은 교리적인 논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비슷하지만 기독교가 아닌 것과 기독교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니케아 논쟁은 한마디로, 기독론에 기초한 삼위일체 논쟁이라 하겠다.
이 회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派)를 이단(異端)으로 단죄하여, 분열된 교회를 통일시키고, 로마제국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즉, 아리우스(Arius) 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정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을 ‘유사본질’(Homoiousios)이라고 주장하는데 반해, 아다나시우스(Athanasius)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본질(΄ομοουσιος:Homoousios-one Substance )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니케아 신조를 선포했다.
"아버지는 창조주시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나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개체성(신성)과 아버지와의 일체성을 확인해 주는 '삼위일체 교리'였던 것이다.
이후 니케아 신조는 기독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신앙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니케아 공회의 이후에도, 아리우스주의의 도전은 계속되었으나,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데오도시우스1세의 황제에 의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풀 공의가 소집되어,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함으로써. 이 회의를 통하여 아리우스주의는 완전히 정죄받고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틴 회의에서의 니케아 신조, 즉 삼위일체 교리의 확인으로, 325년부터 381년동안 무려 50여년을 끌어온 삼위일체의 논쟁이 일단락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Council of Constantin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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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소집, 안티오키아의 주교 멜리티우스가 주재했다. 150명의 동방정교회 정통파와 36명의 이단 주교들이 참가했다. 삼위일체의 교리(敎理)에 관하여 논의되었으며, 특히 성령의 신성함을 옹호하였다.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 공의회의 합의를 공인하였다. |
니케아 지도[콘스탄티노플리스 남동쪽 니코메디아 남서쪽]
니케아 성벽-1
니케아 성벽-2
니케아 성벽-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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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295~373]
| 요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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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출생으로, 그곳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젊었을 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가까이 하여 그리스적 교양을 쌓았다.
319년 부제(副祭)가 되었는데, 325년에 주교 알렉산더를 따라 니케아 공의회(公議會)에 참석하여, 아리우스의 이단설(異端說)을 매섭게 논파함으로써 명성을 얻음오로써, 이듬해 알렉산더 주교가 죽자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누스 대제 등 동로마제국의 보호를 받던 아리우스파는 황제정권과 결탁하여 그를 괴롭혔으므로, 5번이나 교구장직을 박탈당하고, 17년 동안 이나 유배생활을 하였다.
339~346년의 제2차 추방 때는 로마의 율리우스 1세에게로 피신하여, 로마 교회와 아타나시우스설(說)이 결합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교리사적(敎理史的)인 의의는 삼위일체설(三位一體說)과 로고스 그리스도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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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바라는 자는 누구든지…”라는 라틴어원문 ‘퀴쿰케…’를 따, 퀴쿰케신조라고도 한다. 본문은 40개조로 되어 있는데, 내용은 ‘칼케돈신조’의 삼위일체론을 더욱 명백히 한 것이다.
이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사건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니케아신경’ ‘사도신경(사도신조)’과는 그 형식이 또 다르다.
이 신조는 7세기 이후 알렉산드리아 주교인 성(聖) 아타나시우스의 것으로 알려져 그의 이름을 붙여 불러 왔으나, 최근의 연구로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와 아를의 대주교 성 카에사리우스의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그 저작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5세기경까지 갈리아 남부지방에서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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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출생으로, 안티오키아에서 신학을 배우고 젊었을 때 메리티오스의 교회 분열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파문(破門)당했으나, 후에 사면을 받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사제(司祭)가 되었다.
스승 루키아노스의 설을 이어받아 그리스도의 피조성(被造性)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321년 알렉산드로스 주교(主敎)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에서 또 파문당하고, 친구인 니코메디아의 주교 에우세비오스에게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도 다시 자기 주장을 펴다가,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논쟁에 패하고, 정식 추방당하여 일리리쿰으로 유배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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