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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람서원 나눔

캄펜(Kampen) 신학교, 큰 캄펜(1854) 작은 캄펜(1945)

작성자고목사|작성시간23.03.23|조회수74 목록 댓글 0

캄펜(Kampen)이란 지명은 아마도 군인들이 친 캠프에서 유래한 듯하다. 캄펜은 지금 그 과거의 군사적 위치를 상실했지만, 네덜란드 신학의 중심지 중의 하나로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인구 5 만 정도의 도시에 국제적인 신학대학이 두 개나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아우더스뜨라트(옛 거리라는 뜻)에, 다른 하나는 부르더벡(Broederweg , 형제의 길이란 뜻)에 위치해 있다. 한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가는 데는 고색창연한 길을 걸어서 10분이면 충분하다.

캄펜 신학교하면 우리는 큰 캄펜, 작은 캄펜이라고 한다. 브루더벡이 작은 캄펜이다. 화란 개혁교회에서 해방파. 소위 31조파의 신학교이며(1945년 설립), 스킬더(Klaas Schilder: 1890-1652, Neo-Calvinist theologian)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클라스 스킬더는 헤르만 바빙크와 아브라함 카이퍼를 이어 네덜란드 신칼빈주의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하나이다. 

카이퍼의 신학에 비판적이었던 스킬더는, 1944년에 위트레흐트(Utrecht) 총회에서 카이퍼의 추종자들에 의해 목사직과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몇몇 교회들이 이 총회의 결정이 비성경적이라고 반발하면서 해방파(Gereformeerde Kerken vrijgemaakt, GKV)을 세웠고, 스킬더는 삶을 마칠 때까지 이 신학교에서 교의학과 윤리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2년 10월 12-19일, 10차 ICRC (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Churches, 국제개혁주의 교회협의회) 총회는 여성안수를 허용한 것에 의해서, 이 협의회의 창설 주체였던 네덜란드 개혁교회 해방파(GKV, 31조파)의 회원 자격을 최종적으로 박탈시켰다.

애통'(Doleantie)과 '분리'(Afscheiding).

1834년에 있었던 헨드릭 드 콕(Hendrik de Cock)목사와 윌룸(Ulum)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분리와 복귀의 운동의 결과로 네덜란드 국교회(NHK)에서의 '아프스케이딩(Afscheiding: 분리)'이 있었다, 헨드맄 드 콕 목사는 도르트 신경을 고수하였는데, 이로 인해 자기가 목회하고 있던 교회의 당회로부터 면직을 당한다. 결국 콕 목사는 1834년 10월 14일 분리를 선언했다. ‘분리 또는 복귀’의 선언은 네덜란드 신앙고백서를 따라서 주의 깊게 작성되었고, 여기에서 분리와 복귀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들은 지금은 ‘분리’하지만 국가 교회의 상황이 개선되면 ‘복귀’하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고백으로 ‘복귀’하려고 거짓 교회로부터 ‘분리’한다고 밝혔다. 드 콕 목사를 추종하여 '아프스케이딩'에 가담한 교회들이 제1차 총회가 열리기에 이르렀다. 그 뒤 1869년에 교단명을 '기독교 개혁 교단 (Chelljk Gereformeerde Kerk)'라고 정하게 된다. 1847년 이 교단 소속의 약 3000명의 화란인들이 국교회의 박해와 경제적 궁핍을 피해 미국의 미시간과 아이오와 주로 이민을 가게 되어 거기서 새로운 교단을 만든다. 이 교단이 기독 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es)로서 칼빈대학교 및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가 이 교단 소속 신학교이다. 

1880년에 영역주권을 주창하면서,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유대학교’(de Vrije Universiteit)를 세운 아브라함 카이퍼를 따르는 일단의 교회들이 1886년에 네덜란드 국교회를 떠나게 되며 이를 ‘돌레앙찌’(슬픔: Doleantie)라고 한다.

1886년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를 중심으로 네덜란드 국교회에서 제 2차 탈퇴가 있었다. 카이퍼는 이미 1880년에 삶의 전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미치게 하려면 단순히 교회를 위한 신학교로서는 불충분하고, 개혁주의 원칙에 따른 고등교육기관을 세워야 한다는 확신에서 '자유 대학(Vrije Universiteit)'을 암스테르담에 세웠다. 그는 교회는 국가와 돈과 교회 조직에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우선 그는 수세기 동안 교회의 명목상의 수장인 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뿐 아니라, 국가가 제공하는 돈이 아니라 믿음의 결실로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에 의존해야 하므로 국가의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며, 개혁되지 않은 기구로서의 교회 조직에서 해방되어 각 교회가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대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 대학도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했다. 카이퍼는 이전부터 화란의 기존 대학들이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기독교적 성격을 잃고 단지 국가의 소유물로 전락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독교 대학-여기서 신학부는 없어서는 아니 될 부분을 차지하는데-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그가 대학 이름을 '자유(vrij)'대학이라고 붙인 것은 이에 연유한 것이다. 이런 카이퍼의 사상은 네덜란드국교회와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1982년 국교회에서 2차로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카이퍼의 원대한 이상을 따라 신학과와 철학과와 다른 모든 학과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이상적인 종합대학을 만들이 위해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사립대학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대학 안에 '신학과' 가 있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몇몇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일반대학을 설립하고 거기에 신학과를 개설했으니, 몇 년이 지나면 신학생이 배출될 것이 아닌가? 그러자 기존의 '네덜란드 국교회(NHK)' 교단에서는 이 신학생을 목사로 받아야 하느냐 받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어떤 지역의 교회가 자유대학교 신학과 출신 졸업생을 목회자로 청빙해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 당시 여러 문제로 인하여 갈등이 있던 차에 이것이 교회 분열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1880년에 자유대학을 설립하여 교수가 되었고, 후에 화란의 수상이 되기도 하였다(1901-1905). 카이퍼가 정치에 참여할 때 목사가 아닌 장로로서 암스텔담 교회를 섬겼는데, 그때 카이퍼를 비롯한 암스텔담 교회의 당회는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금하였다. 이 일로 1886년 교회당국은 카이퍼와 다수의 장로들을 제명 처분하였고, 이 징계 파동으로 카이퍼를 중심으로 200여 교회가 국가개혁교회를 떠났다. 화란 교회사에선 이를 '돌레앙치(Doleantie : 분리, 반대, 애통)'라고 칭한다. 

그로부터 6년 후 먼저 탈퇴한 '아프스케이딩'교회와 '돌레앙치' 교회가 연합을 하게 되면서 화란 개혁 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흔히 GKN으로 약칭)'를 형성하게 되었다압스케이딩의 교회 가운데 기독개혁교회에 잔류할 것을 고수하는 일단의 교회들을 제외한 대다수 교회들과 돌레앙찌의 교회들이 연합하여, 1892년에 네덜란드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를 형성하게 되며, 이때부터 캄펜신학대학교와 자유대학교는 형제 대학의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이때 일차 탈퇴한 '아프스케이딩' 교회 가운데 일부가 연합을 반대하며 잔류하여 '기독 개혁교회 (Christelijke gereformeerie kerken)'란 명칭을 고수하였는데, 지금도 이 교단이 운영하는 신학대학이 아펠도른(Appeldom)에 있다. 

 

1945년 화란 개혁 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흔히 GKN으로 약칭)에서 다시 분리가 일어났다. 카이퍼에 의해 이루어진 교회의 다원성 문제, 일반은총 문제, 가정 중생설 문제가 1942년 총회에서 결정되었고 이를 반대한 흐레이다누스와 스킬더 등 많은 교수와 목사 장로들이 면직되면서 1944년 8월 새로운 교회가 분리된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자신의 신학, 특별히 일반은총, 영혼의 본질, 유아 세례, 중생 등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문맥에서 떨어진 성경본문을 증거 구절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점차 비판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카이퍼의 '언약론(곧 중생전제설)' 때문에 교회 안에는 실제로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언약에 의해 믿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이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교회 안의 젊은이들의 신앙생활이 나태해지고 교회출석이 해이해지는 등의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생겨났던 것이다. 이같은 점에 대한 비판은 제 2차 세계대전 전부터 심각하게 대두되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는 심각한 의견 충돌이 있었고 1944년에 교단 분열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스킬더는 결국 1944년 8월3일 우트레흐트(Utrecht)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교수직과 목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자 "이것은 부당하다. 이것은 총회가 교권으로 쫓아낸 것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항의하는 교회들이 약 200여개 생겨났다. 

그들은 총회가 스킬더를 해임하고 교수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은 불법이며 [교회헌법(Kerkorde)]제 31조에 의해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제 31조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다수의 표에 의해 결정된 사항은, 단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교회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조항인데, 종교개혁의 핵심이 되는 사상을 교회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수회'(노회나 총회)의 결정이 무조건 구속력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로마 가톨릭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러면 '교권정치' 가 되고 만다. 그러나 총회의 결정이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회중교회'처럼 되고 만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양자 사이에 균형을 취하여 총회의 결정은 성경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정상적인 경우에는 총회의 결정을 따라야 하지만, 만일 총회가 성경에 위배되는 결정을 한다면 그 결정은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 개개의 교회는 이 조항에 근거하여 그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논쟁의 핵심 인물들이었던 조직 신학자 스킬더(K.Schilder) 교수와 신약 교수 흐레이다누스(S.Greijdanus) 교수가 총회의 결정으로 타의로 교단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전체 교단의 십분의 일이 이들을 따랐다. 이들이 세운 교단은 기존 교단과 교단 명칭이 화란 개혁교회 (Gerefrmeerde Kerken in Nederland)로 동일하다. 따라서 이를 구분하기 위해 새 교단을 프레이허마크트(vrijgemaakt, '자유로워진') 혹은 '31조파', 기존 교단을 시노달(synodaal;총회)이라고 부른다. 

한편, 화란개혁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자유교단(프에이허막트)'은 교인수가 약 십일만 명 정도 되는데 (1990년 기준. 2000년 말에는 약 12만명 정도), 여기서는 철저하게 성경중심으로 행하고 있다고 한다. 거의 모든 교인이 주일 날 두 번씩 교회 예배에 참석하여, 모든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하려고 애쓰고 있다. 자기 자녀들을 자기의 신앙과 같은 선생밑에서 교육받게 하기 위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따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모든 교인이 별도로 기부금을 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기들의 신앙과 신학에 입각한 견해를 진흥시키기 위해 일간지(Nederlands Dagblad)를 발행하고 있고, 그 두 명은 의석수는 작으나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정당대표 연설을 통해 분명한 목소리를 네덜란드 사회에 내고 있다, 

이후 1968년에는 31조파 내에서 분리가 일어났다. 이들이 31조파에서 분리되어 나간 것은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개혁주의 교회 정치가 너무 엄격하다는 견해를 갖고 보다 여기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기를 원했다. 이에 따라서 이들은 면직되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이룬 교회를 '네덜란드 개혁교회'(De Nederlandse Gereformeerde Kerken, NGK)로 불렀다. 

이외에도 국가교회(NHK) 안에 별도로 구성된 보수주의 교회들의 연맹인 '개혁주의연맹'(Gereformeerde Bond)이 있다. 이들은 국가교회가 지향하는 신학을 반대하면서도 국가교회로부터 분리하지는 않고 남아 있으면서 별도로 연맹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함께 길을 가는 교회'(Samen op Weg;Together on Way)가 있다. 이 교회는 NHK, GKN (Synodaal), Lutheran 교회가 합친 교회이다.

Theological University Kampen HISTORY

The Theological University developed from a Theological Seminary that was founded on 6 December 1854 in Kampen.

In 1834, a group of believers was separated from the national Reformed Church in the Netherlands and formed a new ‘covenant of churches’ – the Christian Reformed Churches. The most important reasons for this ‘Secession’ (분리파, Afscheiding) were the rejection of state influence on the churches and disagreement with the dominant liberal theology in the ‘Nederlands Hervormde Kerk’.

At first the pastors for these new churches were trained in small local seminaries. In 1854 the Reformed churches decided to unite these different schools in the Theological School of Kampen, where ministerial and academic training were deliberately combined. In the course of more than 150 years the Theological school flourished in the historic Hanseatic city of Kampen and also became a strong stimulus for the local Reformed churches. The school gave a strong impetus to the development of the participation of the Reformed people in the political and social life in the Netherlands of the late 19th century. A good example was Maarten Noordtzij (1840-1915), professor of Old Testament, who was not only an outstanding academic, but also deeply involved in public and social life.

In 1882, the theological level of the School was strengthened by the appointment of Herman Bavinck (1854-1921) as professor. The plan and first edition of his magnificent Reformed Dogmatics came into existence in Kampen. In 1902 he was appointed at the Free University of Amsterdam, the new neo-Calvinist university of Abraham Kuyper. This led to a crisis of the Theological School in Kampen, as Bavinck took more than half of the students with him to the capital.

The Theological School recovered during the following decades. Its level of theological education and research rose with the work of well-known professors such as Jan Ridderbos (Old Testament), Saekle Greijdanus (New Testament) and Klaas Schilder (Dogmatics).

Another difficult period came just before and during World War II, when tensions in the churches led to a split in the churches. In this way the Reformed churches (vrijgemaakt – liberated) came into existence. This also resulted in a split in the Theological School. From 1945 on, two Theological Schools existed next to each other in Kampen. Due to a change in the Dutch legislation of Higher Education, both Schools officially received the status of ‘university’ in 1987, although they had just the one theological faculty.

In 2012 the Protestant University (Oudestraat) moved to Amsterdam and Groningen. Our Reformed Theological University continues its work in Kampen.

Students from many different countries and continents – USA, Australia, South Africa, Korea, India, Brasil, Hungary, Ukraine and many others – found and find their way to the Kampen University.

Today the university has about 140 students and a growing number of international students, who come to Kampen for BA, MDiv, MA or PhD studies. Our theological library is up-to-date and very well equipped, which makes the university attractive to national and international theologians and researchers.

Nowadays, the Theological University still strives to combine both ministerial training and academic excellence. This results in Reformed theological endeavors typically aimed at practical theological application for the churches. At the same time, our theology has an open eye for the surrounding world and our theologians are ready to interact with scientists and researchers from various disciplines.

The content and direction of our work is guided by the conviction that the Scriptures are the revelation of the living God. Some clear focuses are:

  • study of the Reformed and neo-Calvinist tradition in its historical context and its actual meaning for today – in the Netherlands, and also for other continents and cultures;

  • a lively interaction between biblical studies and systematic theology, in open conversation with the late-modern and Western context; a narrative salvation-historical approach in dealing with the biblical sources and the various forms of biblical spirituality and practi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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