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한 생활>(김애란)
다이제스트: 김지영 외 여럿
내가 살던 시골마을엔 음악학원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처음 배운 것은 도를 짚는 법이었다. 첫 번째 음이니까, 첫 번째 손가락으로 도. 내가 건반을 누르자, 도는 겨우 도- 하고 울었다. 신중하게 고른 단어를 내뱉듯 작게, 중얼거렸다. 도... 나는 덩치 크고 내성적인 악기가 처음으로 낸 소리, 완고하고 편안한 그 도-의 울림을 좋아했다. 건반에 손을 얹는 법은 단순한 듯 어려웠다. 손에 힘을 풀고 뭔가 부드럽게 감아주는 모양을 만들어보라는 것이었는데 그때 나는 힘을 주지 않고 무엇인가를 움켜쥘 수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만두집을 했던 엄마가 어떻게 피아노를 가르칠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욕심이거나 뭔가 강요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때 엄마는 어떤 ‘보통’의 기준들을 따라가고 있었으리라.
엄마는 내게 피아노를 사줬다. 읍내에서부터 달려온 파란트럭이 집 앞에 섰을 때, 엄마는 무척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나는 오후 내내 가게에 붙어 피아노를 연주했다. 학원에는 피아노를 잘 치는 애들도 많았고, 못 치는 애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 나는 피아노를 배우는 게 재밌었다. 손가락 관절 아래서 돋아나는 음의 운동도 즐거웠고, 내 뱃속의 어떤 것이 출렁여 그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좋았다. 이상한 것은 그런데도 ‘잘’치고 싶은 마음이 들진 않았다는 거다. 나는 피아노를 적당히 치고 싶었다. 그리고 꼭 그때문은 아니지만 엄마가 피아노 할부금을 다 부었을 즈음 음악학원을 그만 뒀다. 싫증이 난 것이 아니라 그만하면 만족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나는 서울권 대학에 합격했다. 4년제 대학의 컴퓨터학과였다. 컴퓨터에 관해서라면 고작 자판치는 것밖에 몰랐지만 졸업하면 취직이 잘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아빠가 이중보증을 서고 2개의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우리 집은 망했다. 엄마는 차압딱지가 붙기 전, 값나가는 물건을 팔아버리자고 했다. 열심히 고가품을 찾던 우리는 1-분도 지나지 않아, 값나가는 물건이 피아노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는 고민하더니 다시 피아노를 팔지 말자고 했다. ‘나 때문이라면 괜찮다’고 했지만 엄마는 일단 피아노는 가지고 있자고 한다. 가만히 두면 차압딱지가 붙으니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언니 집으로 가지고 가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피아노를 가지고 반지하인 언니네 집으로 피아노를 가지고 갔다. 언니는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피아노를 방안으로 옮기고 나와 언니는 엄마가 싸주신 만두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언니는 취업이 잘된다는 말에 치기공과에 서둘러 원서를 쓴 게 후회된다고 말했다.
"학교 선배가 그러는데, 요즘 계급을 나누는 건 집이나 자동차가 아니래. 피부하고 치아라더라. 좀 징그럽지 않니? 이빨이 계급을 표시한다는 게."
그러다 언니는 남자친구 얘길 꺼냈다. 며칠 전 헤어진 그 남자가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술에 취해 집에 찾아 왔었단다. 그는 현관문을 열자 바닥으로 고꾸라졌고, 살짝 벌려진 입안으로 보이는 치아를 보는 순간 서글퍼졌다 한다.
얼마 후 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학원교재나 시험지를 만드는 일이었다. 지층단면도를 따라 붙이고 오탈자 확인하랴, 영어에 한자 표기까지 정신이 없다. 100년 전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진보적인 기계 앞에서, 내 등은 네안데르탈인처럼 점점 굽어갔다.
언니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 올 시간이 다 되었을 때 즈음 만두 사람을 먹으며 TV를 보던 나는 리모컨이 축축함을 느꼈다. 물이 차고 있었다. 허둥지둥 언니에게 전화 했지만 언니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걸레로 닦아내면 된다고 했다. 일단 걸레로 닦아내고 상쾌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니 물기를 닦아 낸 곳에 다시 물이 고여 있다. 다시 언니에게 전화했다. 훌쩍이며 언니에게 언제 올 거냐고 물으니 언니는 곧 갈 테니 그때까지만 참으라고 나를 타이른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보니 물이 발목까지 차올랐다. 큰일이다 물을 현관 쪽으로 퍼내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려왔다. 언니일 것이라는 생각에 반가움이 앞서 현관을 뛰어나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어떤 남자가 서있었다. “미영아.”
언니의 이름이었다. 그 사람이다. 언니의 전 남자친구는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런. 물을 퍼내야 되는 현관에 누워있는 그를 질질 끌고 피아노 의자에 올려놓았다. 한동안 그를 쳐다보다가 그의 치아가 보고 싶어졌다. 그의 입술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는 불편했는지 돌아누웠고 나는 손을 거뒀다. 빗물은 무릎까지 차올랐다. 피아노가 물에 잠겨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건반 위에 가만 손가락을 얹어보았다. 아무 힘도 주지 않았는데 어떤 음 하나가 긴소리로 우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도-"
물에 잠긴 페달에 뭉덩뭉덩 공기 방울이 새어 나왔다. 음은 천천히 날아올라 어우러졌다 사라졌다. 검은 비가 출렁이는 반지하에서 피아노를 치고, 사내는 발목에 물이 잠긴 채 어떤 꿈을 꾸는지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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