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소설 다이제스트

<내가 데려다줄게>(천운영)

작성자글사람|작성시간13.02.05|조회수252 목록 댓글 0

<내가 데려다줄게>(천운영)

 다이제스트:  김지인


  내 죽음이 진실을 대신하리라. 사내는 망설임 없이 제 이름을 적은 종이를 양복 윗주머니에 넣었다. 농밀한 안개가 사내를 감싸 돌며 떠다녔다. 사내는 살아있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호흡을 멈춘 채 가만히 서 자신이 있는 곳을 가늠해보았다. 휴식처가 필요했을 뿐이다. 차가 비포장도로를 달리다보니 거대한 늪이 드러났고 저도 모르게 유서를 쓰게 된 것이다. 
  모든 게 안개 때문이다. 늪을 마주한 사내는 귀신과 맞닥뜨린 것 같았지만 차츰 온몸이 노곤하게 풀렸다. 안개 속에서 스윽, 치마 끌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내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팬티를 벗다 벗어놓은 옷가지와 팬티를 번갈아봤다. 옷가지들은 사내를 위해 누군가 개어놓은 것 같았다. 사내는 팬티를 꼭 쥐곤 늪을 향해 걸었다. 물은 융단처럼 보드랍고 따뜻했다. 보드라운 흙이 발가락 사이를 빠져나가고 물풀이 다리를 간질였다. 곧 사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침묵에 잠겼다.

  사내는 안개 속에서 알몸의 남자를 쫓았다. 남자를 불러 세우려 입을 벌리면 헝겊뭉치 같은 것이 목구멍을 틀어막아 소리 낼 수 없었다. 안개가 걷히고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사내가 다가가자 남자는 안개처럼 흩여졌다. 차갑고 축축한 초록 얼룩뱀이 사내의 몸으로 올라탔다. 또 다른 뱀이 올라타 초록 얼룩뱀들에게 둘러싸였다. 흙이 물속으로 꺼져가는 느낌, 몸의 한 부분 한부분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느낌. 순간 빛이 보였고 몸을 쓰다듬는 손길도 느꼈다. 바람에 몸을 비비는 마른 갈대 소리, 은빛 꽃가루, 요령소리. 사내는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살았다. 콧속으로 파고드는 쌀밥 냄새를 맡으며 눈을 떴다. 고봉으로 가득 채운 흰쌀밥에선 김이 났다. 사내는 밥 한톨 남기지 않고 밥그릇을 비운 후에야 웃음을 터트렸다. 죽자 하고 늪에 뛰어든 사람이 눈뜨자마자 밥그릇을 붙들고 앉은 꼴이라니. 사내는 자신이 벗어놓은 옷을 떠올리곤 서둘러 옷을 입었다. 방 안에는 가재도구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창호지 문으로 들어오는 빛도 비현실적이었다.

  사내는 문을 열어젖혔다. 빛을 등지고 선 계집애의 실루엣이 보였다. 이 아저씨 이제 일어났네. 당돌하고 거침없는 말투. 계집애 뒤로 탱자나무와 개들이 보였다. 계집애는 마른 진흙이 발목까지 허옇게 들러붙은 발을 흔들었다. 어른들은 어디 가셨니? 엄마에게 가볼까? 사내는 계집애를 따라 나섰다. 광대하게 펼쳐진 갈대가 보였다. 이것 좀 봐봐. 새끼 뱀이야. 머리부터 꼬리까지 온전히 다 있잖아? 어른 뱀은 이렇게 못하거든. 근사하지? 아저씨 그거 알아? 뱀들이 허물 벗을 때가 되면 눈이 뿌옇게 흐려져. 우리 할머니가 그랬어. 할머니는 뭐든 다 알거든. 아니면 노래하는 탑에 가도 되고.

  시야를 막는 갈대를 헤치며 가자 늪이 나타났다. 습지라기보단 초원 같았다. 계집애는 늪 가운데에 앉아 턱을 괴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여기 계셔? 응, 저기 오시잖아. 사내는 계집아이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물이 휘돌아가는 어느 지점이다.  가슴까지 오는 고무 옷에 머리엔 작은 바구니를 받쳐 이고 꼿꼿이 선 여자, 물여울만 남길 뿐 어떤 흔들림도 없는 여자가 물풀을 뚝뚝 흘리며 다가왔다. 사내의 인사에 여자는 안개 같은 미소만 흘릴 뿐 아무 말 않고 앞서 걸었다. 

  여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시간은 문제되지 않았다. 사내는 세 여자가 만드는 일상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여자는 늪에 가서 채워온 것을 팔고 밥상에 올렸다. 계집아이는 엄마를 맞으러 늪으로 갔고 사내는 툇마루에서 기다렸다. 노파는 주로 감나무 아래에 앉아 혼잣말을 했다. 들어볼 테냐, 학처럼 고운 처녀애 얘기. 여기 늪에 아주 고운 처녀애가 살았단다. 늪 건너엔 처녀애를 사모하는 총각이 살았지. 총각은 처녀애에게 노래하는 탑을 만들어줄 테니 결혼해달라 했지. 총각은 붉은 벽돌을 쌓기 위해 매일같이 늪을 건너 완성했지. 노래하는 탑. 문을 여는 순간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는 마법의 탑.

  여자가 물질 가는 소리에 깬 사내가 안개 속에 몸을 숨긴 채 길을 나섰다.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늪이었다. 늪을 지나면 또 늪이었다. 고요했다. 안개에 막혀 숨죽인 것이란 걸 사내는 몇 번의 새벽 외출을 통해 알고 있다. 이제 돌아가야겠다 생각했을 때 여자가 나타났다. 일찍 나오셨네요. 사내는 여자의 나긋나긋한 말소리가 듣기 좋았다. 장막이 드리우며 허물벗기 직전의 뱀 같은 기분이 들어 사내는 말을 얼버무리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과거와 같은 과오를 저질러서는 안됐다. 사내가 진실을 말할수록 그 말은 구차한 변명이 되었다. 충분히 나이가 찬 제자가 저 스스로 옷을 벗었다. 며칠 뒤 교내에 붙은 대자보로 사내는 성폭력 범죄자가 되었다. 사내는 빈손에 오물을 뒤집어쓴 더러운 알몸이었다. 

  사내가 서 있는 강독 옆으로 배 한척이 다가왔다. 사내는 노인에게 말을 붙였다. 여긴 뭐가 잡혀요? 잉어도 걸리고 그러지. 처음 보는데 어디서 오셨소? 탱자나무 울타리 집이요. 그 점쟁이 할망구네 집? 그 집서 살던 남자 그 할망구랑 여자가 작당해서 죽였다고. 시체를 갖다버리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어. 노인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사내는 무언가 된통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상의 반복이었다. 사내는 그 일상이 의심의 눈을 거친 친절은 계략이고 술수였으며 음모고 덫이라 생각했다. 소문일지도 모른다. 그저 평범한 여자들이라 생각하면서도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여자가 물질하러 가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여자의 뒤를 쫓았다. 당하기 전에 먼저 공격하리라. 
  두려움이 묻어나온 사내는 여자의 팔목을 비끄러쥐고 여자를 제압했다. 여자의 입을 틀어막고 다리를 짓이기며 제 몸을 쑤셔 넣었다. 그것은 욕정이 아니라 경고였다. 여자는 아무 저항 없이 사내를 안아주었다. 사내는 문득 자신이 남기고 온 유서가 생각났다. 사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일까? 힘과 권력과 지위를 전혀 쓰지 않았나? 여자의 품에 안긴 사내는 영영 깨지 않아도 좋을 것처럼 편안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저씨, 여기 또 누워있네. 그런데 아저씨는 왜 여기 왔어? 나도 잘 모르겠다. 진실을 밝히려고, 그랬다는구나. 진실이 뭔지도 모르겠는걸. 그럼 내가 노래하는 탑에 데려다줄게. 계집애가 사내의 손을 끌곤 안개 사이에 있던 탑으로 밀었다. 마술이었다. 사내의 옅은 숨소리에 반응하며 음악소리가 들렸다. 

  늪에 섰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사내에겐 진실도 대신할 진실도 모두 늪 안에 들어있을 것이다. 어디선가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옷을 벗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사내의 발목을 휘감을 뱀들을. 어디선가 곡성처럼 음산한 왜가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Copyrightⓒ 유용선 All rights reserved.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