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이청준)
다이제스트: 박윤식
“내일 아침에 올라가야겠어요.”밥을 먹던 아내와 노인이 밥알이 목에 걸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아니, 온 지 얼마나 됐다고···.”노인이 밥을 푸던 숟갈을 내려놓고 작은 불만을 토해냈다. 눈빛이 마치 내게 매달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나는 얼른 대답했다.“예, 내일 이참에 올라가겠어요. 방학을 얻어온 학생 팔자도 아니고, 일하는 사람이 마냥 놀 수만은 없으니까요. 또 급하게 맡아놓은 일도 여럿 있기도 하고.”내가 생각해도 소름 끼칠 정도로 기계적인 대답이었다. 나는 이렇게나 이곳을 빨리 뜨고 싶어 했던 것인지 나 자신조차도 아연실색해졌다. 국을 뜨던 아내의 눈빛이 맹금류의 그것처럼 날카로워졌다. 나는 그런 아내의 시선을 어색하게 피했다.“그래도 조금 더 쉬다 가지 그러냐. 나는 또 네가 이런 더운 날 찾아 와서, 오래는 아니어도 조금 더 쉬다 갈 줄 알았더니 말이다. 게다가 이번엔 너 혼자도 아니고···.” 노인의 눈빛이 나와 아내 사이에서 격하게 흔들렸다. 아내를 구실 삼아 나를 조금 더 붙들어놓고 싶은 모양이지만 내 마음은 이미 서울로 가 있는 상태였다.“저, 더운 날, 추운 날, 가려 쉴 만큼 잘난 놈 아닙니다. 게다가 찻길이 좀 나아졌다지만, 아직도 여기서 서울 가는 데는 천릿길만큼이나 멀지 않습니까.”나는 숟갈을 내려놓고, 물 컵을 비우는 것으로 이 대화의 끝을 알렸다. 노인은 그런 내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어떤 것인지 몰라도 서운한 표정을 애써 감추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그래, 일이 많다는데 할 수야 없지. 서울서 바쁘게 사는 자식 놈, 붙들어 놓을 만큼 나도 모진 에미는 아니니까.”일종의 체념이었다. 사실은 여기에 있는 모두가 노인이 모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동시에 그것이 노인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체념의 일환이라는 사실 또한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그래도 말이다. 나도 너희들이 항상 바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에미랍시고 멀리서 찾아온 자식 놈들, 따뜻한 곳에서 재우지 못한 게 미안해서 그런 거니까, 너무 신경 쓰거나 하지 마라.”노인은 말을 끝마치고선 장죽 끝에 풍년초를 꾹꾹 쑤셔 넣기 시작했다. 아내의 눈초리가 더욱 더 사나움을 더하고 나는 거북해진 분위기에 못 이겨 방을 나섰다.짜증이 솟구쳤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을 정도로 담담하고, 무연스러운 노인의 표정이 오히려 내 화를 더욱 더 돋게끔 만들었다. 애초에 이딴 집구석, 오는 것이 아니었다.장지문 밖 마당에 작은 치자나무 한 그루가 한낮의 땡볕을 견디고 서 있었다.노인의 무연하고 덤덤한 기운과 표정은 나에게로 하여금 항상 불안함을 안겨다 주었다. 나와 노인 사이에서는 절대로 있을 리가 없는 채무 관계, 노인의 표정은 항상 내가 당신에게 마치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말하는 듯 했다. 나는 그 표정을 두려워했고, 노인은 그런 나를 우롱이라도 하는 듯 항상 그 표정을 고수했다.“이가 다 빠지신 것 같은데, 틀니라도 하시는 게 어때요?” 노인의 빚 독촉이 두려워진 내가 언제 한 번 그렇게 먼저 제안한 적이 있었다. 노인은 내 질문에 고개를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나도 이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런 짓을 하냐.”언제는 또, 치질이 심하게 나 치질 수술을 권해보았더니 이번엔 약간 화를 내셨다.“이제 갈 날이 얼마 안 남았고, 성한 데 하나 없는 늙은이라곤 해도 나도 아녀자다. 어디 남 앞에서 함부로 수치스러운 곳을 보일 수 있겠느냐.”노인의 그런 부정적인 대답들은 내게 큰 희망을 주었다.‘그래, 내가 노인에게 빚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술버릇이 고약했던 형이 집을 날리고, 땅을 팔면서부터, 그리고 남아있는 처자식을 모두 나에게 맡기고 세상을 떴을 때부터, 나와 노인 사이에 빚 따위는 없는 것이었다. 그걸 노인이 누구보다 제일 잘 알고 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그런 노인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에 노인의 눈치가 수상했다.“집집마다 모두 도당 아니면 기와를 얹는단다.”남의 일처럼 넌지시 꺼낸 그 얘기가 나로 하여금 다시 빚에 대한 불안을 심어주었다.“하지만 이놈의 집구석이란 게, 그런 걸 얹을 만큼 튼튼할 리가 없지. 그래서 동사무소에서 나온 그 제의를 거절했단다.”노인의 말은 칼처럼 내 목을 천천히 감싸 안았다. 나는 애써 노인을 무시했다. 하지만 그런 내 태도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아내가 노인에게 물었다.“어머, 어머님은 그런 거에 욕심이 없으실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나는 아예 무시하기로 작정을 했다. 이불을 펴고 거기에 누워 눈을 감고 딴 생각을 피기 시작했다.“이 나이에 욕심은 무슨, 허나, 나 죽고 너희들이 내 장례를 치룰 때, 마을 사람들이 와서 도란도란 얘기 나눌 수 있는 방 한 칸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말년에 운이 다 해 이렇게 거지 신세가 됐지만, 이 마을 사람들에게 흠 한 번 안 잡히고 살아온 나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을 위해 방 한 칸 따로 만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런데 다 부질없는 짓이지 뭐.”노인이 장죽을 입에 물었다. 아내가 결국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누워있는 나를 때리고 꼬집기 시작했다.“여보, 일어나서 말 좀 해봐요! 당신도 뭐라고 말 좀 해보라고요!”아내의 목소리에 울먹거림이 섞여있었다.“아서라, 피곤해서 일찍 자는 사람을 왜 깨우냐.”피를 토하며 나를 깨우는 아내를, 노인은 작게 면박을 주었다.‘빌어먹을!’목에 걸린 사탕을 집어 삼키듯 거북하게 들어찬 욕설을 마음속으로 삭였다.“그저 노망 난 노인네의 투정이다. 왜, 늙으면 다 애가 된다고 하지 않느냐. 나도 그런 거지 뭐. 그러니까 괜히 너도 힘들게 사는 아범한테 무리주거나 하지 마라. 못난 에미 만나서 힘들게 살아온 아이다. 알겠냐?”방이 곧 조용해졌다. 밤의 침묵이 우리 모두를 감쌌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그저 나는, 이거면 된 거야···.”장죽에서 텁텁한 풍년초의 연기가 흘러 나왔다. 시간을 따라, 그 풍년초의 연기 향은 노인의 체념을 싣고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갔다.Copyrightⓒ 유용선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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