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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다이제스트

<99%>(김경욱)

작성자글사람|작성시간13.02.09|조회수112 목록 댓글 0

<99%>(김경욱)

 다이제스트:  최윤선

 
 단것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쓸 만한 아이디어 하나 건지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꼬박 샜을 때, 내가 콘셉트를 잡은 광고기획안 프리젠테이션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릴 때, 참을 수 없이 궁금한 것이 생겼을 때 내 머릿속 난쟁이는 악다구니를 써댄다. 단것을 달라고. 그럴 땐 초콜릿이 효과만점이다. 입 안에서 녹아내린 초콜릿의 달콤함이 심장을 달구고, 달궈진 심장이 피를 힘차게 펌프질해 뇌 구석구석까지 퍼 올리면 머릿속 난쟁이도 거짓말처럼 온순해진다. 초콜릿 중에서도 아몬드가 씹히는 것을 좋아한다. 씹히는 맛도 맛이려니와 견과류가 두뇌활동을 촉진한다지 않는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도 머릿속의 난쟁이는 단것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누군가를 대면했을 때 초콜릿 생각이 간절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광고계의 떠오르는 마이다스, 자본주의의 심장 미국에서 잔뼈가 굵은 국제통…… 평소 아랫사람 칭찬에 인색한 사장의 언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상찬에 낯이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사장 곁에 선 그는 긴장이라고는 한 줌도 찾아볼 수 없는 당당하고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시원시원하면서도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도회적이고 스마트한 인상을 풍겼다. 사장은 대처에서 공들여 데려온 전학생을 소개하는 교장처럼 들떠 있었다. 나를 교실에 데려가 학생들에게 인사시켰던 G시의 고등학교 교장이 떠올랐다.
 전학 간 학교는 탄탄한 재정을 바탕으로 인근의 우수 학생을 스카우트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B시에서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고를 수석으로 입학한 나에 대한 각별한 기대를 교장은 학생들 앞에서 숨김없이 드러냈다. 교장이 직접 전학생을 소개하는 것도 이례적이었던 데다 교장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칭찬의 말이 너무 찬란해 나 자신도 고개를 들기 어려울 정도였다.
 스티브 킴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같은 인사말을 건네며 내게도 손을 내밀었다. 그와 악수하는 순간 뜻밖의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혹시 전에 만난 적 있나요? 그는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글쎄요. 제가 워낙 평범한 인상이라 종종 그런 얘기를 듣곤 합니다만. 그가 희고 가지런한 치아를 살짝 드러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거울을 보며 수천 번 연습해서 얻었을 것 같은, 흠잡을 데 없는 미소였다.
 그날 오후 열린 제작회의에 그가 얼굴을 내밀었다.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고문이 회의에? 출근 첫날 아닌가! 회사 분위기를 빨리 익히고 싶어서 들어왔습니다. 그가 좌중을 일별하며 말했다. 컵라면 광고 콘셉트를 잡기 위한 회의였다. 두 시즌째 맡고 있는 건인데 매출이 지지부진해 다음 시즌에는 광고회사를 갈아치울 거라는 첩보가 입수돼 비상이 걸렸다. 전에 없이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전학 간 고등학교의 교장이 소개할 때 나를 쳐다보던 학생들의 뜨거운 선망과 싸늘한 경계가 깜박깜박 명멸하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특히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눈빛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창가 열 맨 뒷자리에 앉은 녀석이었다. 째진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형형한 눈빛은 영역을 침범당한 수컷의 적의와 자신의 것이 아닌 찬사에 대한 질투로 서늘했다. 내가 전학 오기 전까지 전교 1등을 도맡던 녀석으로 이름은 태만이었다. 김태만.
 그가 제안한 컵라면 광고시안은 광고주를 매료시켰다. 프리젠테이션도 그가 직접 챙겼다. 해외 로케에 대한 부담 때문에 회사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광고주는 흔쾌히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세계인이 함께하는 우리의 매운맛’이라는 카피에 감동 먹었다는 후문이었다.  세계투어 시리즈라면 대여섯 시즌은 끌고 갈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 도미했다던데 한국말 아주 잘하시네요.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갔는데도 한국어 돌아오니 말이 어색해서 고생했는데. 유학파임을 자부심의 근거로 삼는 디자이너 강이 말했다. 어느 초등학교 다니셨죠? 내가 물었다. 그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학교 입학하자마자 이민 가서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미국에 도착했을 땐 시차 때문에 말 그대로 머리가 텅 비어버렸죠. 이 대목에서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 의구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승승장구했고 내 의심의 눈초리가 닿지 못할 곳으로 훌쩍 날아올라 찬란히 빛났다. 그는 신화의 주인공이 되어가고 있었다. 세계적인 다국적 컨설팅 회사에 다니던 사람이 불현듯 피를 끓게 한 애국심 때문에 기왕 일군 것들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귀국했다는 것이 석연치 않았다. 물론 그의 능력은 남달랐다. 특히 장애물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무섭게 번뜩였다.
 새로 제작한 우유 광고를 시연하는 자리였다. 광고주의 표정이 신통치 않았다. 명색이 우유 광곤데 젖통이 저리 소박해서야……. 광고주가 소낙비라도 맞은 것처럼 중얼거리며 자리를 떴다. 무거운 침묵이 회의장을 짓눌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입을 열었다. CG로 손질합시다.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달려가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꺼냈다. 태만은 없었다. 내가 전학 온 이후 전교 1등은 더 이상 태만의 것이 아니었다. 낡은 앨범을 뒤져 태만의 얼굴을 기어이 찾아냈다. 고등학교 1학년 소풍 때 찍은 단체사진. 교실에서처럼 맨 뒷줄 가장자리에 있었다. 째진 눈, 뭉툭한 코, 각지고 돌출된 턱. 여드름이 만발한 얼굴은 볕에 그을린 듯 까무잡잡했다.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회의 도중 나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쌍꺼풀 진 시원스런 눈매, 오롯한 콧날, 날렵한 턱선,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 그리고 남성잡지의 화보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세련된 분위기와 탄탄대로만 달려온 자만이 거느리는 당당한 여유까지. 태만이 갖지 못한 것으로 빚어진 사람이 있다면 그일까 싶을 정도로 태만과 그 사이에 공통점이라고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철저하다 싶을 정도의 상반성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태만이 나에게 처음 말을 건 것은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고향에 가기 위해 탄 배 갑판 위에서였다. 태만이 먼저 알은체했다. 복도에서 가끔 마주칠 때도 짐짓 모른 체하던 태만이 전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처럼 살갑게 굴었다. 태만의 곁에는 여자가 서있었다.
 해변에서 태만과 서울내기 여학생은 준비해온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영복이 없던 나는 파라솔 밑에 누워 그들을 지켜보았다. 멋진 요트지. 태만이 내 곁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태만은 요트를 지그시 바라보며 어떤 영화에 대해 떠들어댔다. 질투와 복수심, 그리고 살인에 대해, 비천한 태생의 멍에 때문에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던 어떤 젊은이의 어두운 운명에 관해. 잊히지 않는다는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수중에 넣는 순간 요트의 닻에 걸려 떠오른 친구의 시체에 대해. 닻에 걸린 시체가 떠오른 순간 눈물을 흘렸다고도 했다. 태만이 말했던 그 영화를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나도 보게 되었다. 시체는 닻이 아니라 스크루에 걸린 채 딸려 나왔다. 태만의 착각이었다.
 셋이서 밤의 해변에서 술을 마셨고 난생처음 술을 입에 댄 나는 어느 순간 정신을 놓고 말았다. 눈을 뜬 곳은 추레한 여관방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 쑤석거렸다. 곁에는 서울내기 여학생이 자고 있었다. 알몸인 채. 태만은 보이지 않았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닻이었다. 배꼽 밑 거웃이 시작되는 언저리에 새겨진 닻. 배꼽을 정박하기 위해 검은 수초 깊이 드리워진. 이미지는 한동안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학교에서 우연히 태만을 볼 때마다 심연에 가라앉았던 닻이 불쑥 떠올랐다. 태만의 속살에도 새겨져 있을 게 분명한 닻 말이다.
 송별회 술자리는 자리를 옮겨 가며 밤새 마셨다. 새벽녘 가라오케에서 나올 때는 다섯 명만 남았다. 그도 함께였다. 싸우나 박이 시계를 보더니 사우나를 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빠지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한사코 등을 떠밀었다. 돌연 술기운이 확 가셨다. 뜻밖의 기회였다. 심장이 벌떡거리고 손에 식은땀이 났다. 
  주머니를 뒤져 초콜릿바를 꺼냈다. 촌스럽게 아몬드 초콜릿이 뭐야? 이걸 먹어보라고. 그가 주머니를 뒤지더니 초콜릿을 건넸다. 포장지에는 카카오 함량 표기가 금색으로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99%. 포장을 뜯고 한 조각 떼어내 입 안에 넣었다. 혀 위에 올려놓은 채 녹기를 기다렸다. 초콜릿이 녹아내리면서 씁쓸한 맛이 갈수록 지독했다. 연필심을 맛보는 기분이 드는가 하면 브랜디를 삼킨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끝 맛은 달콤할 텐데.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사우나실에서 그의 아랫도리를 가리고 있는 목욕타월을 내내 흘깃거렸다. 목욕타월은 배꼽을 가릴 정도로 추켜올려진 채 단단히 여며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우나실을 나갔다. 냉탕에서 열기를 식힌 후 온탕에 자리를 잡았다. 욕탕 출입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그가 문을 밀고 들어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마침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허리에 질끈 동여맸던 목욕타월을 내던진 채. 눈으로 흘러들어온 땀 때문인지 온탕에서 피어오르는 김 때문인지 눈앞이 뿌옇다. 깜박거렸다. 눈앞이 조금 선명해졌다. 몽실몽실 떠다니는 희뿌연 김 너머로 거뭇거뭇한 그의 거웃이 보였다.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카카오 함량이 99퍼센트라는 초콜릿의 씁쓸함이 새삼 입 안 가득 퍼졌다. 혀로 입 안 구석구석을 탐색한다. 그가 말한 달콤한 끝 맛을 찾아내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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