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수상한 근황> (김경욱)
다이제스트: 최윤선
폭설입니다. 오후 들어 집중적으로 내린 눈으로 이 시각 현재 서울 시내 대부분의 간선도로가 극심한 교통 체증을 빚고 있습니다. 특히 강변북로 서강대교에서 마포대교 사이 구간은 눈길에 미끄러져 전복된 차량 때문에 교통 흐름이 꽉 막힌 상태입니다. 신속한 처리가 요구되지만 뒤엉킨 주변 차량 때문에 구조팀의 접근이 지체되고 있습니다…….당신이 눈먼 보험금을 타내고자 한다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속이고 조상을 만나면 조상을 속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속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속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속여야 한다. 무엇보다 내 눈을 속여야 한다. 빙고. 눈 밝은 당신의 짐작대로 눈먼 보험금을 주머니에 넣으려는 자들을 색출하는 일로 나는 입에 풀칠한다.보험에 가입하는 이유는 둘 중 하나다. 미구에 닥칠지 모를 궂은 날을 대비하기 위함이 그 하나이고 일부 파렴치한 자들이 그러하듯 부정하게 돈벼락을 맞기 위함이 나머지 하나다. 만일 당신이 보험을 복권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나와 맞닥뜨릴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남을 속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자들을 상대하는 것이 내 직업이니까.“악몽을 꿨어.”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내였다. 아내는 바쁠 때만 전화하곤 했다.“당신이 거대한 풍선을 타고 날아가는 거야. 뛰어내리라 소리치려 했지만 말을 할 수 없었어.”“이번엔 풍선이야? 난 떠나지 않아. 꿈은 현실과 반대라는 거 몰라?”아내의 우울증은 6년 전에 당한 사고 때문이었다. 사고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지금도 그것이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주위 사람들은 운이 나빴을 뿐이라 위로했지만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운이 나빴다 하기엔 잃은 것이 너무나 뼈아팠다. 무엇보다 그 사고가 발생하기까지 덧칠해진 우연에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차라리 그때 나는 죽어버렸어야 했다. 그러나 사고다발지역이라 함부로 추월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리하게 액셀을 밟았던 나는 무릎과 팔꿈치에 가벼운 타박상만 입었다. 조수석에 탄 임신 8개월이던 아내의 머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사고 두 달 후 태어난 아이는 여태 말을 하지 못했다.어두워진 하늘은 금방이라도 뭔가를 쏟아 부을 듯 도시의 스카이라인 가까이 음울하게 주저앉았다.그날도 낮게 드리워진 어두운 하늘은 사물들의 경계를 되레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바람 쐬러 강화도에 가는 길이었다. 외길 차선을 가로막은 승합차가 앞길이 훤히 뚫렸는데도 서행했다. 배가 부른 아내가 옆자리에 타고 있던 터라 과속할 수도 없는 처지였지만 승합차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천천히 주행했다. 욕지기가 절로 나왔다. 몇 차례 경적에도 꿈쩍 않던 승합차가 길가 쪽으로 바짝 붙으며 미등을 깜박였다. 추월하라는 신호였다. 그곳은 급하게 커브를 이루는 구간이었지만 30분 넘게 승합차 꽁무니만 바라보던 터라 무심코 핸들을 꺾고 액셀을 밟았다.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승합차가 갑자기 속도를 높이는가 싶더니 맞은편 차선에서 승용차가 튀어나왔다. 필사적으로 핸들을 길가 쪽으로 꺾으며 똑똑히 보았다. 맞은편에서 달려온 차를 몰던 사내가 눈을 질끈 감고 있던 것을. 그 사고로 추간판탈출증 진단을 받은 사내는 네 곳의 보험사로부터 도합 20억 원의 보험을 탔다. 승합차 운전자도 한패였을 것이다.아이가 언어장애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사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을 할 수 없다는 뜻이냐고 반문했다. 의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내는 아이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다 까무러치곤 했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보험금을 노린 계획적 범죄였단 항변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기 잘못을 남에게 덮어씌운다며 비겁한 놈이라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증은 확고했으나 물증은 전무했다. 업무부에 근무하던 나는 보험사기 범죄를 다루는 조사지원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원이었다. 작년부터 아내는 수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중앙선 침범에 의한 교통사고 건에 관한 클레임 자료를 볼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입이 아닌 손가락을 놀려 아이에게 해줄 말이 아직 없었다.크리스마스이브의 도시는 난생처음 데이트 신청을 받은 사춘기 계집아이처럼 들떠 있다. 구두쇠 팀장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팀원 모두에게 즉석복권을 나누어주었다. 한 번도 복권이라는 것을 사본 적 없는 나는 빠닥빠닥한 종잇조각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피보험자는 목동에 사는 삼십대 여자였다. 공교롭게도 대학 시절 사귀었던 여자애와 이름이 같았다. 이름만 같은 게 아니라 헤아려보니 나이도 동갑이었다.“박수연. 흔한 이름이네요.”박은 관련 파일을 건네며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보험에 가입한 지 일주일 만에 사고를 당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내가 아는 박수연은 유난히 자존심이 강했다. 남에게 책잡힐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욕실에서 넘어져 코뼈가 부러졌다는 금방 들통 날 거짓말로 보험금을 청구하거나 할 타입이 아니었다.박수연는 집에 있었다. 내가 아는 박수연이었다. 그녀는 코뼈가 무너져 깁스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하지 못했다. 지난 세월이 만만치 않던 것일까. 시원스런 이목구비는 여전했지만 잔주름이 자글자글했고 눈 밑에는 그늘이 선연했다. 코에 깁스를 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애써 짓는 미소로도 지울 수 없는 어둠이 얼굴에 자리 잡은 지 오래인 듯했다. 나는 깜박하고 있었다는 듯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내가 알던 박수연은 지난 일 돌아보는 것은 자존심에 어긋나는 짓이라 생각하던 여자였다. 설령 욕조에서 샤워하다 코뼈가 부러졌다 하더라도 당당해야 했다. 거실에는 커다란 상자가 널려있었다. 탁자 위 약 봉투에는 목동약국이라 적혀 있었다.안방과 작은방 사이에 위치한 욕실은 여느 아파트의 그것과 다름없는 구조였다. 문을 열면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 대형 거울이 붙박여 있고, 바로 밑에 세면대와 변기가, 오른쪽에는 욕조가 설치되어 있었다. 물방울무늬의 샤워커튼이 욕조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샤워를 하다 미끄러졌어.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지다 욕조에 코를 박고 말았던 거야.”샤워커튼은 멀쩡했다. 욕조에서 미끄러져 코가 깨질 정도라면 본능적으로 붙들었을 텐데 어느 한 곳 뜯기거나 늘어난 흔적 없이 말끔했다.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아 탐문조사에 착수했다. 아랫집 여자의 말에 의하면 박수연의 집에서는 부부 싸움 하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고 했다. 여자는 감정이 좋지 않았던 듯 묻지 않은 말까지 풀어놓았다. 남자가 도박 중독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했다. 인상 험한 사내들이 들락거리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는데 빚 독촉 하러 온 사람들이었을 거라 했다. 최근에 싸운 적 있냐고 묻자 사흘 전 밤에도 크게 싸웠다고 대답했다. 사흘 전이라면 박수연의 코뼈가 부러진 날이었다.지하철역 근처에서 목동약국을 어렵지 않게 찾았다. 약국이 있는 건물에 정형외과가 있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정형외과에서 박수연의 진료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구타에 의한 코뼈 함몰. 진료 카드를 카피했다. 아랫집 여자의 진술이 정확하다면 부부 싸움 도중 남편에게 얻어맞았을 것이다. 거짓말로 보험금을 청구하라고 남편이 협박했을까? 빚 갚을 돈이 필요했겠지.회사 쪽으로 차를 몰았다. 진료 기록을 첨부해서 보고서를 올리면 그녀는 회사로부터 한 푼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박수연은 내 첫사랑이었다.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라고 서둘러 퇴근한 모양이었다. 나는 박수연에 관한 보고서를 꼼꼼하게 작성해나갔다. 완성한 보고서를 다시 검토한 뒤 담당자 란에 서명했다. 보고서를 팀장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사무실에서 빠져나왔다.막상 사무실을 빠져나왔지만 가야 할 곳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딱히 가야 할 곳 없는 나는 얼어붙은 도로 위를 힘겹게 헤쳐 나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해 교차로가 나타날 때마다 멈칫거렸다. 더듬더듬 나아가다 주위를 돌아보니 어느덧 강변도로 위였다.휴대전화가 울렸다.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려는 순간 핸들이 흔들리면서 차가 한쪽으로 쏠렸다. 브레이크를 급히 밟았다. 그게 더 화를 불렀다. 차는 제자리에서 빙글 돌다 인도의 턱에 걸려 벌러덩 뒤집혔다. 하늘이 주저앉더니 땅이 솟구쳤다. 하늘과 땅이 속절없이 자리를 바꾸는 모습을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몸이 문 쪽에 쏠린 탓에 손잡이를 잡은 팔에 온전히 힘을 실을 수 없었다. 안전벨트 덕인지 크게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자동차 천장에 머리가 눌리지 않게 하기 위해 안전벨트를 꽉 조였다. 뒤집힌 차에 거꾸로 매달려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119에 전화를 걸어 구조를 요청했다. 피가 머리로 몰려 눈알이 시큰거리고 목이 뻑뻑했지만 비명을 지르거나 혼절할 정도는 아니었다.구조팀은 소식이 없었다. 갑자기 쏟아진 눈으로 바쁘겠지. 옆자리에 누군가 있었으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하고 문득 생각했다. 주머니에서 뭔가가 툭 떨어졌다. 팀장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돌린 즉석복권이었다. 달리 도리가 없다는 듯 손톱을 세워 복권을 긁기 시작했다.휴대전화가 울렸다. 집이었다. 전화를 받았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전화를 끊으려다 수화기를 귀에 바짝 붙였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어떤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숨소리였다. 어느 먼 곳으로부터 아득히 들려오는 북소리처럼 뭔가를 애써 호소하는 듯한 소리였다. 그것은 딸아이의 숨소리였을 것이다. 전화기에 대고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오는 것은 의미를 헤아릴 수 없는 소리뿐이었다. 오래지 않아 전화는 끊어졌고 나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애써 참으며 복권을 마저 긁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Copyrightⓒ 유용선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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