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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다이제스트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김연수)

작성자글사람|작성시간13.02.12|조회수122 목록 댓글 0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김연수)

 다이제스트: 배진희, 이사라

 
  1. 짧은 시간에 척척

  석 달 조금 못 되게, 불멸의 밤을 보내면서 그는 곤충들이 부럽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네는 다리 열 개를 잃고도 그냥 도망간다. 베짱이는 다른 포식자에게 자기 몸이 씹히는 와중에도 열심히 먹이를 먹는다. 교미가 끝난 수컷 사마귀는 암컷에게 머리가 먹힌 뒤에도 사랑에 열중한다. 
  “그것들에게는 통증이 없기 때문이지. 그걸 단순히 통증이라고 할 순 없겠지. 그건 고통이라고 불러야만 해.”
  그가 생각하는 고통이란, 곧 부처가 말한 생로병사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생로병사가 고통이 되는 건 인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생로병사는 그의 몸으로 인연 따라 모였다가 인연 따라 흩어지는 괴로움의 궤적이었다. 
  잘 수 있을 것 같아 침대에 눕는 순간 방문 저편에서 코끼리 한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펼치는 순간 바로 잠들만한 책을 찾아 서가를 뒤적이다 <암환자를 위한 생존전략>이라는 책을 찾아냈다. 그는 책을 뒤적이다가 Y씨를 발견했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아요. 하지만 산책을 한 날은 금방 잠들 뿐만 아니라 숙면을 취할 수 있더군요. 집안일도 짧은 시간에 척척 해치우게 된답니다.”
  짧은 시간에 척척. 그가 산책을 시작한 이유는 바로 그 문장 때문이었다.

  2. 코끼리도 재울 수 있으며

  그날 밤 당장 집 밖으로 나섰다. 막상 걸어가려고 보니 어쩐지 힘이 들었다. 그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한 걸음을 내디딘 뒤 자신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함. 매일 밤 그를 깨우는 심장 통증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부터 그는 약속을 잡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여동생부터. 그날 저녁 그는 생각보다 오래 잠을 잘 수 있었다. 어쩌면 잠을 잔 것은 그 사건 이후로 늘 자신의 심장에 발을 올려놓고 있는 코끼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두 눈을 감고 아프다고 생각하는 부위를 바라보세요. 통증이 보이나요? 이제 그 통증이 공이라고 생각해봅시다. 농구공부터 시작해봅시다. 그게 농구공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그 공을 하늘로 던져보세요. 한 3미터 정도.

  3. 침대에서는 잠만 자고 섹스만 하고

  그는 걱정하는 일들의 목록이 적힌 A4용지를 뒤집어 거기에다가 친구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었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산책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들떴다. 처음 전화를 받은 친구는 금융감독원위원회에 근무하는 고등학교 동기생이었다.
  “집으로 좀 와줬으면 좋겠어.”
  “이사했니?”
  “아니. 침대를 옮겼어. 작은 방으로. 침대에서는 잠만 자고 섹스만 하라는 게 의사의 처방이야.”
  초인종 소리를 듣고 몸을 열었더니 친구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친구의 팔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병원에 갔었니?”
  “응, 불면증 때문에.”
  “교통사고 후유증인가? 뭐라고 하지. 외상후증후군? 다 정신적인 문제 아닌가?”
  “실제로도 몸이 아픈 거야. 정신이 아픈 게 아니라.”
  밤의 거리는 눈물이 맺힌 눈망울로 바라보는 풍경처럼 형형색색의 불빛이 서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걸어가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들은 어깨를 부딪혀가며 이렇게 북적대고 요란스러운 길을 걸어서 결국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예의 침대로. 거기서 그들은 혼자 잠들 것이었다. 저마다 하나씩 꾸는 꿈들. 꿈이라고 좋기만 한 건 아니다. 그가 비몽사몽간에 보는,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그 코끼리처럼. 그로서는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던, 그녀의 고독했을 밤처럼.
 “뭐, 타키온 같은 것도 있는데.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빛의 속도보다 빠른 입자. 증명할 방법이 있대도 요원해.”
 “있다고 생각하는, 하지만 증명할 수 없는 입자. 그러니까 나의 코끼리처럼 말이구나.”
 “그렇지. 너의 고통이 만들어낸 그 코끼리처럼, 사실은 없는 거지.”

  4. 결국 혼자서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며

  마지막으로 산책한 친구는 분당에 사는 건축사였다. 건축사가 탄 택시가 멀어지자마자 한쪽 골목에서 코끼리가 나타나더니 그의 심장에 슬며시 한쪽 발을 올려놓았다. 언제 힘을 줄지 예상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갑자기 코끼리가 발에 힘을 줬고, 그는 멈춰 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없어도 걸어갈 수 있는, 차라리 지네나 베짱이나 수컷 사마귀 같은 것이었다면. 결국 그는 그녀처럼 죽게 될 것이었다. 자기 안에서. 혼자서.
  그가 중얼거렸다. 조금만이라도 좋으니까 잠깐만 이렇게 서 있자.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잠깐만 이렇게 서 있자고? 코끼리도 가만히 고개를 젖히고 중얼거렸다. 언젠가 크게 싸우고 난 뒤에 이제 끝이라며 혼자 걸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를 가로막고 서서 그가 했던 말이었다. 후회하는 거야? 코끼리가 말했다. 후회하는 거냐고? 마찬가지로 가만히 서서 그가 말했다.

  5. 거리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될 것이다

  그와 Y씨는 한 시간째 걷고 있었다. 아홉 번째 친구와 산책을 한 뒤 그는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를 들여다보며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사람들은 호의적으로 도와주려고 했다. 그는 “우리 좀 걸을까요?”라고 말한 뒤 상대방의 눈치를 살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산책에, 그냥 걷는 일에 굶주려있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내부에는 그의 코끼리와 같은 것이 하나씩 존재해 사람들은 혼자 산책하는 일을 두려워하는지도 몰랐다. 오랑우탄이나 코뿔소, 토끼, 어쩌면 매머드나 티라노사우르스 같은 것들 말이다.
  그는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저자를 통해 쉰한 살에 폐암 선고를 받았던 Y씨와 연결될 수 있었다.
  “영화감독이라고 하셨죠? 어떤 영화를 찍으셨나요?”
  그는 잠시 생각해봤다.
  “어떤 영화를 찍었다기보다는 어떤 여자를 찍은 거죠.”
  “돈이 많은 모양이네요.”
  “그래서 지금은 코끼리 한 마리만 남기고 빈털터리가 됐어요.”
  두 사람은 고궁을 빠져나와 고궁 앞 광장을 가로질렀다. 혼자서 걷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곳에서부터 걷기 시작해 결국 함께 걷는 법을 익혀나간다. 그들의 산책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과 하는 산책과 같았다.
  그들의 눈앞에 버스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4차선 도로를 봉쇄한 경찰들이 보였다. 어디선가 함성이 요란했다. 열을 맞춰 앉은 경찰들과 뒤쪽에 대기하는 살수차, 2미터 정도 위로 지나가는 바람과, 함성과, 또 함성과, 또 다른 함성과……, 고통. 지네와 베짱이와 수컷 사마귀와, 또 오랑우탄이나 코뿔소, 토끼, 어쩌면 메머드와 티라노사우르스 같은 것을.
  “조금 더 걸어볼까요?”
  Y씨가 그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래요, 이 거리, 제가 좋아하는 거리니까.”
  그리고 그녀와 꼭 붙어서 다니던 거리니까.
  걸어가는 그들을 향해 결찰 하나가 두 팔로 X자를 만들어 보인 뒤, 오른손을 뻗어 길 뒤쪽을 가리켰다. Y씨와 그는 경찰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바라봤다. 또한 코끼리와 지네와 베짱이와 수컷 사마귀와 함께.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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