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레>(레이먼드 카버)
다이제스트: 한소희
굴레를 원래 있던 서랍 안쪽 구석에 넣는다. 이번에는 서랍이 열려있지 않도록 꼼꼼히 밀어 닫는다. 벗겨 놓은 침대시트를 들고 방을 나온다. 조리대에 침대시트를 내려놓고 가스레인지에 놓아둔 걸레 몇 장을 집어든 뒤 화장실로 간다. 샤워기를 틀어 대충 물을 뿌린다. 이미 화장실은 깨끗하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물을 끈 샤워기를 원래 자리에 놓고 물기를 닦아내기 위해 걸레질을 시작한다. 움직일 때마다 몸 여기저기서 땀이 흐른다. 마지막으로 세면대 쪽 벽에 붙어 있는 거울을 닦는다.가스레인지에 있는 나머지 청소용품들과 조리대의 침대시트를 손에 들고 다시 한 번,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던 거실을 둘러본다. 반짝이는 마룻바닥이 햇살을 받아 더 반짝인다. 조용히 몸을 돌려 17호 방을 빠져나온다.텔레비전은 다시 켜 있다. 할리는 내가 들어가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는 내 쪽을 쳐다보지 않는다. 나는 침대시트를 세탁물 통에 집어넣고 청소용품들을 제자리에 둔다.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있는 할리를 그 옆에서 보니 졸고 있다. 나는 텔레비전을 끈다. 역시나 그는 그 순간 눈을 뜬다.“보고 있는데 왜 끄는 거야.”나는 다시 텔레비전을 튼다.창가에 바짝 붙는다. 코니 노바와 스퍼즈는 여전히 수영장의 한쪽 끝에 누워 있다. 선글라스를 쓴 스퍼즈의 눈은 볼 수 없지만 왠지 둘 다 코니 노바의 라디오에 귀 기울이고 있는 듯 보인다. 아이들이 놀지 않는 수영장의 수면은 잔잔하다. 마룻바닥처럼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어디선가 꿈은 빨리 깰수록 좋은 거라고 말하던 베티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꿈속에 있는 듯 나는 수면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을 한참동안이나 본다. 뒤에서 할리가 숨을 깊게 마셨다 내쉬는 소리가 크게 들려 나는 퍼뜩 꿈에서 깨어난다.아까 정리해 놓은 청소용품들 앞에 다가가 선다. 17호에 올라갔을 때처럼 몇 개의 청소용품들을 든다. 할리가 앉아있는 근처로 다가간다. 그는 태평하게 고개를 옆으로 떨군 채 잠들어 있다. 이번에는 텔레비전을 끄지 않는다. 그대로 지나쳐 뒤쪽에 있는 화장실로 간다. 미뤄두고 있던 화장실 청소를 할 생각이다. 아파트의 난간이며 계단 청소도 할 것이다. 철솔을 손에 든다. 할리의 태도가 말하는 것처럼 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듯이 행동할 것이다. 누군가의 머리를 손질할 때처럼 청소에 신경을 집중한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나는 드라이기 옆에 앉아 손톱 가는 줄로 손톱 손질을 한다. 할리는 저녁 먹기 전에 잠시 했던 뒤뜰 손질을 마저 해놓고 거실로 들어온다. 그는 내 쪽으로 걸어와 나를 위해 만들어준 세면대에서 손과 팔에 묻은 흙이며 풀들을 닦아 낸다. 내가 그 행동을 싫어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를 흘끔 보고 고개를 돌린다. 창문에 콥 부인이 지나쳐 가는 모습이 보인다. 몇 시간 전 그녀의 남편인 스퍼즈도 그 앞을 지나갔었다. 그들 부부의 초대를 받아 함께 저녁을 먹었을 때 보여줬던 스퍼즈의 전 부인이 담긴 영상이 떠오른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 한참이나 손을 흔들던 모습. 한참이고 붙잡혀 그 영상을 보고 있어야 할 것 같았던 그때,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할리가 무슨 말을 했던가. 할리는 물기 묻은 손을 털더니 텔레비전을 끌고 방으로 들어간다. 피곤한 모양이다. 그가 스스로 텔레비전을 방으로 가지고 가는 경우는 드물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거실 한 구석에 놓아두었던 여행용 가방을 든다. 엄청 크지는 않지만 원래 거기에 없었던 것이라 주의를 기울인다면 눈에 띌 것이다. 할리는 보지 못했다. 지금 그는 방에서 텔레비전을 켜놓은 상태로 잠들어 있다. 나는 거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홀리츠의 사고 이후 아파트 사람들은 당분간 파티를 할 생각이 없나보다. 물속에 있는 듯한 고요함이 떠다닌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남기는 바람소리와 엔진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나는 가방을 든 손에 힘을 준다. 낮에 홀리츠 가족의 차가 했던 것처럼 주차장을 지나 프리웨이로 향한다.길목 중간에 돌아서서 아파트를 본다. 콥 부인과 홀리츠처럼 오랫동안 손을 흔든다. 고삐는 아직 17호의 서랍장 안에 있다. 혹시 모른다. 나중에 그것을 발견한 누군가가 나처럼 햇살에 비춰볼지.손을 내리고 다시 걷는다. 그랜트의 이마에 내 이름을 적어뒀던 오십 달러짜리가 이제 어디에 가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다음 주 이 시간에 내가 어디에 있을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라스베거스에 있을지도 모르고 마이애미나 뉴욕 시티를 거쳐 뉴올리언스에 있을지도 모른다. 소망이 있다면 그 어딘가에서 내 이름이 적힌 오십 달러를 건네 받아보고 싶다.나는 재갈을 물었다. 그것이 당겨졌다. 떠날 시간이 됐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어딘가로 가고 있다. 그뿐이다. 아무 일도 없었고, 또 아무 일도 없으리라.Copyrightⓒ 유용선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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