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기>(임철우)
다이제스트: 한소희
사람들은 곧 마을로 사라졌다. 숨이 끊어진 노파의 몸뚱이는 점점 차가워져갔다. 노란 하늘빛이 창백해진 노파의 얼굴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였다. 먼지를 가득 몰고 다니는 한 무더기의 바람이 무덤이라도 만들어줄 요량인 듯 노파의 늘어진 육신에 마른 흙을 연신 흩뿌렸다. 태양은 점점 더 질펀하게 불어터진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다. 노랗게 죽은 하늘 아래, 노란 얼굴로 죽은 노파가 있었다.알 수 없는 긴장감이 곳곳에 팽배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집으로 숨어들어 문틈으로 바깥 동태를 살폈다. 고요한 광장과 골목 여기저기에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숨통을 조여 오는 그 긴장감만은 생생하게 마을을 누비고 있었다. 사람들은 진저리를 쳤다. 하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의 구둣발에 무참히 밟힌 노파의 죽어가는 얼굴들을 저마다 떠올렸다.“그 노파, 생각을 잘못해도 단단히 잘못한 거라구.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한 남자는 아무렇게나 늘어진 이부자리에 몸을 누인 채 아내를 끌어 당겼다. 그는 아내의 젖가슴을 조몰락거리며 늘어진 하품을 했다. 어느새 마을에는 긴장감이 사라지고 언제나처럼 음흉한 욕망의 기운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눅눅하고 끈적한 내음이 집집의 조그만 균열과 틈을 비집고 슬며시 새어나와 죽어가는 하늘 밑, 먼지만 부유하는 공간에 펴져갔다. 그 어느 때부터인가 시작되었을 냄새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공기 중에 퍼트리고, 또 퍼트리고를 반복했다.나른함이 마을에 일렁였다. 저 멀리 어둠에 묻힌 성 쪽에서 아악, 소름끼치는 비명이 일었다. 비명은 공기를 힘없이 울렸다. 마을 전체를 뒤덮은 고집스런 침묵과 고요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 여린 비명을 퉁겨내었다. 사람들은 비명소리를 듣지 못하고 저마다의 욕망으로 젖어들었다. 그들은 조그맣게 들려오는 비명의 울림을 조금은 의식하면서도 애써 도리질을 쳤다.의미 없이 부풀어 오른 성욕을 허무하게 터뜨리고 거적때기처럼 허물어진 사람들과 야릇한 흥분이 감돌 밤을 기대하며 웅크린 몸뚱이 위로 깔깔깔 실성한 웃음을 짓는 사람들과 주름진 얼굴을 파르르 떨며 곤한 잠에 빠진 노인들 모두다 곧 다가올 더 큰 재앙을 깨닫지 못했다. 도리질은 사람들의 의식을 빼앗아 저 멀리로 던져버린 듯했다. 그들은 그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소리 없는 주문이 비릿한 냄새에 섞여 빠르게 마을을 휘감았다. 적막이 아무렇지 않게 먼지 구덩이 속을 굴러다녔다.죽어가는 노란 하늘 구석에서부터 점점 어둠이 차올랐다. 태양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려 대지로 뜨겁고 묵직한 액체를 뚝뚝 떨굴 것 만 같았다. 구석의 어둠은 몸을 부풀려 구겨진 부분을 펼쳐가고 있었다. 초저녁 하늘답지 않게 농도가 짙었으며 무언가를 감추는 두꺼운 장막처럼 은밀하고 조용했다. 어둠은 자신의 농도만큼 짙은 무게로 마을을 지그시 눌러 내렸다. 더욱더 값을 더한 침묵이 묵직하게 땅으로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그 침묵의 무게로 비명이 들려오던, 이제는 칠흑 같은 어둠에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는 언덕너머에서 마을 쪽으로 다가오는 몇 개의 엔진소리를 완전히 듣지 못했다. 그들은 집밖에 도사리고 있는 무서울 정도로 육중한 침묵과 어둠도 깨닫지 못했다.몇 대의 차가 마을 초입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노파의 집을 두 번이나 찾아갔던 앰뷸런스가 아닌, 무식해 보이도록 튼튼하게 생긴 군용 차량이었다. 신작로를 통과해 초입까지 다가오는 그것들의 모습은 마치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코뿔소 무리 같았다. 엔진을 멈춘 각각의 차 뒤편에서 하얀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무더기로 튀어나왔다. 그들은 검고 날렵하게 뻗은 몽둥이를 든 남자 앞에 열을 맞춰 섰다.“우리는 그동안 사회의 안녕에 해악을 끼치는 이단 무리들을 보호, 격리 조치하여 질서를 유지해 왔다. 적절한 치료와 보호, 교육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허나, 이곳의 이단적 사상은 그 뿌리가 너무 깊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해서 우리는 이 마을을 아예 없애버리자는 결론을 내렸다. 오늘밤 제군들은 사회를 위해 이단 마을을 물리치는 용맹한 일꾼이 될 것이다.”남자는 폭이 좁은 챙 아래로 드리워진 그늘에 두 눈을 감추고 한 마디, 한 마디를 힘주어 말했다. 그 앞에선 수십 명의 남자들은 턱을 세우고 등허리를 쭉 편 차렷 자세에서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또 한명의 남자가 건네주는 길고 두꺼운 막대기를 하나씩 손에 쥐었다. 막대기 끝에는 누런 천 같은 것을 둘둘 뭉쳐 인형만한 크기의 머리가 달려있었다. 막대기를 나눠준 남자는 이어 커다란 불씨를 만들었다. 곧 열 맞춰 선 그들의 머리 위로 벌건 불꽃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휘청였다. 짙은 어둠속에서 불꽃들은 그 모습을 더 또렷이 했다. 기괴한 모습을 한 불꽃들은 마을을 휘돌던 비릿한 냄새와 고요처럼 곳곳으로 퍼져갔다. 불꽃은 자신의 몸을 집집마다의 지붕에 마루에 옮겼다. 메마른 공기를 따라 순식간에 불꽃이 자신의 몸을 불려나갔다.각자의 집안에 있던 마을 사람들은 타는 냄새와 무언가 이글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무엇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불안한 느낌에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틈과 커튼 사이로 바깥을 숨죽여 내다보았다. 광장은 이미 붉게 물들어있었다. 분수도, 다른 집들도, 술집도, 한때 어린이집으로 쓰던 건물도 모두 다 붉은 화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우리 집은 아니겠지.”한 여자가 중얼거리며 방으로 뒤돌아 향했다. 마음 한구석이 쿵쾅거리고 불안했으나 다시 잠자리에 누워 두 눈을 꼭 감고 귀를 막았다.그렇게 마을은 서로의 손을 잡고 끌어안아 하나의 커다란 몸뚱이가 된, 거대한 화염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화염은 큰 덩치를 되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거렸고 제복을 입은 남자들을 태운 차량들은 저 멀리 다리 건너의 성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얇은 흙더미 속에 더없이 딱딱하게 굳은 노파의 육신은 미치광이 같은 화염의 춤을 묵묵히 지켜보았다.Copyrightⓒ 유용선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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