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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다이제스트

<전태일과 쇼걸>(김영하)

작성자유용선|작성시간13.06.08|조회수742 목록 댓글 0

<전태일과 쇼걸>(김영하)

 다이제스트:  김미정

 
  그날 아침, 그 남자는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실론티를 든 채로 소파에 앉아 천천히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한겨레신문의 주주인 그는 그 신문이 창간된 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 신문을 보아왔지만,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일보도 함께 보고 있었다. 문화면에는 호주까지 날아가서 분신 장면을 완성시킨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화제가 되고 있다는 기사가 있었고, 또 한쪽에는 공연윤리심의위원회라는 단체와의 지난한 싸움 끝에 폴 버호벤 감독의 <쇼걸>이 드디어 막을 올렸다는 기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남자의 출근시간은 저녁 여섯시였으므로 영화 한 편쯤 볼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그 남자가 전태일이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6년이었다. 선배가 툭 던져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지은이도 없는 이상한 책 덕택에 그는 1970년에 사망한 한 청년의 일생을 접할 수 있었다.
  그 남자가 대학교 이학년이 되어 후배들에게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던져줄 처지가 되었을 때, 그녀를 처음 만났다. 고등학교 때 이미 읽었던 책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도전적인 눈초리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남자가 서울극장에 당도한 시각은 정확히 오후 세 시 오 분, 영화의 상영시각은 네 시 이십분이었다. 영화를 볼 수 없었다. <쇼걸> 역시 네 시. 그 남자가 <쇼걸> 매표소를 기웃거리는 사이 한 여자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표를 사고 있었다. 그 남자는 표를 사고 나오는 그녀 앞에 섰다.

  커피전문점에서 마주친 두 남녀는 한동안 말이 없다. 형. 그녀가 그 남자를 불렀다. 그때 형이랑 잤으면 어땠을까. 그때는 왜 그렇게 안 된다고 발버둥을 쳤을까. 별일도 아닌 것을. 그 남자는 다소 충격을 받았다. 그 남자 머릿속 그녀의 잔상은 전혜린, 또는 그 티를 아직 못 벗은 여자에 불과했다.
그녀가 삼학년이 되었을 때, 그녀의 선배들은 말 잘하고 인물 훤한 그녀를 어떻게든 잘 키워보려고 했다. 그 무렵 학생회에서 일하고 있던 그 남자도 그녀의 자유주의적 성격을 비난했다. 결국 그녀는 전혜린을 버렸다. 그것까지가 그 남자가 그녀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그녀가 전혜린을 버리는 순간, 그 남자는 그녀를 떠났다.
  현장에 들어갔었구나? 힘들었겠네. 그 남자는 애써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뇨, 정말 재밌게 보냈어요. 해고되지만 않았어도 더 할 수 있었는데 아쉬워요. 그 남자는 더욱더 그녀를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전혜린과 해고 노동자. 슈바빙의 가스등을 그리워하던 그녀. 방학이면 독일 문화원을 들락거리며 독일어를 배우던 여자. 그 남자에게는 그녀의 이야기가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꾸며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남자는 시계를 보았고 그 여자도 그 신호를 알아차렸다. 형, 가야 돼? 응. 학원에 가봐야겠어. 참 요즘도 시 보니? 아뇨, 요새는 소설을 봐. 아니, 소설보다는 영화 보기를 더 좋아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울극장으로 향했다. 참, 형. 쇼걸과 전태일의 공통점이 뭔 것 같아? 둘 다 혼자 보기에 좋은 영화라는 거야. 그 남자는 그 여자의 말에 동의했다.
  두 사람은 일주일 만에 만난 연인처럼 만났다가 내일 만날 사람처럼 헤어졌고 그 남자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기다렸다. 자, 이제 소설의 마지막은 그 남자가 아주 우연하게도 자신이 내려야 할 정류장 바로 직전에 잠이 깨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마치기로 한다. 사실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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