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소설가>(조성기)
제15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원작
1이곳은 소설가가 살 만한 동네가 아니다. 레스토랑 따위가 주택가 깊숙이 파고들어 바로 만우씨 집 코앞까지 들어차 있는 형국이었다. 주민들은 새로운 용도에 맞게 새 건물을 짓느라, 난리법석을 피웠지만 만우씨는 옛집 그대로 지켜내고 있었다.2조간신문이 떨어진 자리에 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광고들이 실려 있는 하단부가 물에 젖어 버렸고, 상단부도 물기가 배어들어 흐늘거렸다. 만우씨는 신문이 물러 터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들고 들어와 마루에 펼쳐놓았다. 먼저 물에 푹 젖은 하단부를 손으로 뜯어내었다. 이제야 신문다운 신문이 된 것도 같았다. 만우씨는 신문의 상단부를 챙겨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거기가 《염소의 노래》라는 소설을 쓴 강만우 씨 댁 맞습니까?”“네,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그 소설을 사서 읽었습니다.”“아, 감사합니다.”“감사할 것까지는 없소. 내가 전화를 건 건 환불해 달라고 걸었으니까.”3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만우씨를 말뚝에 박았다. 만우씨는 오랏줄을 풀려고 버둥거려 보았다. 오랏줄은 책 다발들로 변해, 만우씨가 지금까지 쓴 열 권 가량의 소설책들이, 반품되어 온 것들이라면서,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염소의 노래》책들은 아예 목을 휘감고 조르기 시작했다. 낯선 얼굴이 만우씨를 올려다보고 외쳤다.“이래도 환불을 해주지 않겠느냐?”극심한 공포로 전신이 떨려왔지만, 눈을 질끈 감고 말을 뱉었다.“환불해주지 않겠다.”그 사람이 섶에다 횃불을 갖다 대었다. 만우씨는 이 시대의 작가의 자존심을 위해 분신도 불사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불길이 목구멍으로 넘어오자 목이 타는 듯하여 물을 찾았다. 만우씨는 말뚝에서가 아니라 방바닥에서 눈을 떴다. 머리맡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 간신히 일어나, 서재의 전화기 코드를 뽑아버렸다.만우씨는 문예지에 넘길 중편 원고를 다듬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제목은 <말의 섶>이었다.세르베투스를 재판하는 장면으로 넘어갈 차례였다.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여보, 손님이 찾아왔는데요.”만우씨는 방을 나와 현관께로 나가보았다.“아, 강만우 선생님이십니까?”운을 떼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만우씨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3천 5백 원 환불만 하면 깨끗이 끝날 일이 아닙니까.”“환불해줄 수 없다는데! 이 사람이. 그만 돌아가시오.”책상에 앉았으나, 이미 글을 쓸 수 없는 마음 상태가 되어 있었다. 만우씨는 오늘 써야 할 원고량을 다시 계산해 보았다. 신문 연재 원고는 일주일 치를 우송하였으므로 며칠 동안 문제될 것이 없었다. 원고 독촉이 있는 중편 하나를 넘기는 일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었다.“씨펄 놈.”그 작자는 상습적으로 그런 식의 협박을 하여 교묘하게 돈을 뜯어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책 내용을 꼬치꼬치 캐물어, 그의 사기성 여부를 들추어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비로소 안정이 되어 다시 책상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그대는 저작물 《삼위일체의 오류》로 로마 교회뿐만 아니라 종교개혁파도 그대에게 화형을 선고하려 한고 있음을 아는가?”“알고 있습니다.”“그런데도 그대는 칼빈이 교회를 맡고 있는 이 제네바로 와서, 칼빈이 설교하는 시간에 교회로 들어왔다가 체포되었는가?”“칼빈이 어떻게 사이비 교리와 거짓말로 사람들을 후리는가 직접 확인하러 갔을 뿐입니다. 칼빈이 주장하는 교리가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 밝혀 보이겠으니, 칼빈을 이 법정에 불러내어 나와 논쟁하게 할 것을 요구합니다.”이것으로 오늘 작업은 끝내야 할 것 같았다.4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만우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우씨는 담고 있던 말을 끄집어내었다.“내가 당신을 만나 내 소설을 과연 읽었는지 몇 가지 시험을 해보겠으니 어디서든지 만납시다.”두 사람은 다음 날 명륜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우씨는 밤을 새우면서 초고 뭉치와 씨름을 하였다.칼빈이 세르베투스를 면회하러 가 다시금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세르베투스는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세르베투스는 세워진 십자가에 달렸다. 그가 저술한 책들이 묶여져 있었다. 그는 책으로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고, 책 속에 파묻힌 것 같았다. 불길이 책으로 옮겨 붙었다. 책이 타면서 세르베투스의 몸도 타들어갔다. 검은 연기와 불길이 알베강 위를 가로지르며 천천히 태양을 가렸다.그 가려진 태양을 응시하는 듯 고개를 들며 만년필을 놓았다. 만우씨는 의자에서 일어나 책장에서 《염소의 노래》를 찾았다. 눈에 띄지 않았다. 여기 저기 인사치레를 할 사람들에게 부쳐 정작 작가인 자신에게는 한 권도 없는 것이었다.“염소의 노래? 그런 책 없는데요. 《염소의 배꼽》이라는 책은 있는데요. 구라하쉬라고 내가 볼 땐 완전 사이비 교준데 글쎄 한국 사람들은 그 작자 책을 많이들 사본단 말이오. 재미는 있습디다. 골치 아프지 않고.”만우씨는 몇 군데 서점을 들러서야 간신히 《염소의 노래》를 한 권 살 수 있었다.5그 사람은 책 표지를 열어 민준규라는 이름 세 글자를 보여주었다. 얼마든지 물어보라는 식으로 당황하거나 긴장한 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만우씨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염소의 노래》주인공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었다. 엉거주춤 손가방에서 책을 끄집어냈다.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그 책은 《염소의 배꼽》이었다.“좋소, 당신이 내 책을 읽었는가 하는 것도 더 이상 따지지 않겠소. 이제 환불을 요구하는 근거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시오.”“이제는 책에 대한 관념을 바꿀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책도 하나의 상품으로 경제구조 속에서 유통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소비자의 권리가 강화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그 비슷한 이야기는 전에도 한 것 같소. 요는, 내 작품이 불량 상품이라는 거 아니오.”“제목부터가 동화적이라서 원래의 중후한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습니다. 작가의 말에 보니 희랍 전통 비극 작가들의 작가 정신을 본 받아 이 시대의 비극적인 상황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그런 제목을 붙였다고 하는데, 그러려면 그대로 <비극>이라는 제목으로 붙였어야 하지 않습니까. 염소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희랍 제사의식을 알지 못하는 한국 독자들에게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게 느껴질 거란 말입니다.”“알고 있었소. 하지만 제목을 <비극>이라고 했을 때 누가 그 책을 사서 보려고 하겠소.”“바로 그 점이 문제란 말입니다. 독자들 눈치나 보고 잘 팔릴 제목을 고르는 거 말이오. 그런 비겁한 자세가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다 이겁니다. 작품을 관통하는 작가의 확고한 인생관·세계관이 있어야 총체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만우씨는 민준규씨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같은 책을 읽고 저리 큰소리를 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내가 말하는 총체적이란 말과 루카치가 말한 총체성하고는 다른 말이오.”“당신의 작품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거요? 건져낼 건더기가 하나도 없단 말이오. 또 다른 이유들을 대어볼까요?”민준규의 목소리는 재판석에서 언도를 내리듯 준엄한 어조로 바뀌어 있었다.“당신말대로 나의 작품이 실패했다고 해두고 이만 일어납시다.”“그럼 환불해주시오.”“환불해주지 않겠소.”6만우씨는 혼자 명륜당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대문을 잠그고 아내를 찾았다.“누가 초인종을 눌러도 나가보지 말어.”“왜 그러세요?”“그놈이야, 전에 찾아왔던 그 미친놈 말이야.”“알겠어요. 신문사에서 신문 소포 왔어요.”만우씨는 연재소설을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교정할 부분은 고치고 화가가 그린 삽화도 살펴보았다. 스크랩을 하다 말고, 지난달 간밤에 비가 왔던 날 아침이 생각났다. 지금 신문들도, 만우씨가 연재소설 부분을 잘라냄으로써 상단부와 하단부가 갈라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연재소설은 신문의 배꼽 부위에 가로 걸려 있는 셈이었다. 형이상학이 형이하학으로 되는 그 지점에.만우씨는 문득, 그 사이비 교주가 썼다는 《염소의 배꼽》이 읽고 싶어졌다.삐이삐이 삐또 초인종 벨이 울렸다.Copyrightⓒ 독서학교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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