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 <아무도 아닌 사람> - 삶은 존재만으로 이미 충분히 쓰고 짜다

작성자글사람|작성시간13.01.25|조회수115 목록 댓글 0

황인숙 <아무도 아닌 사람>

 출처:  시집 『리스본行 야간열차』

집도 절도 없는 사람
친구 하나 없어
친구 집도 없는 사람
제 등짝으로 비를 막으며 뇌까린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엄마는 
죽은 엄마
젊어서, 아주 젊어서 죽은 엄마
세상에서 제일 나쁜 아버지는
죽은 아버지
동전 한 닢 안 남기고 죽은 아버지
(나이가 몇이오?) 
평생
일터도 없이 
사랑도 미움도 없이 
아무도 아니게 진작 삭은 삶
눈 코 입으로
짜고 쓴 액체가 걸쭉하게 흘러나온다 
죽은 엄마, 죽은 아버지
쓰고 짠 하늘염전 
회색 구름들 침침한 웅덩이들 
내려온다, 가라앉는다.

* * *

  삶은 존재만으로 이미 충분히 쓰고 짜다 
   - 황인숙 ‘아무도 아닌 사람’ 

 
  이성으로 분석하며 읽는 것보다 그냥 감성으로 받아들이며 읽어야 제 맛이 나는 시이다. 툭 툭 던지듯 내뱉는 말이 아슬아슬 넋두리로 떨어지지 않고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러한 호흡과 문체는 황인숙 시인의 장기이다. 
  이 시에서 화자가 중얼거리며 되뇌며 떠올리는 것은 돌아가신 부모이다. 젊어서 죽은 엄마는 바꾸어 말하면 내가 어릴 적에 돌아가신 엄마이고, 동전 한 닢 안 남기고 죽은 아버지는 마땅히 이루어놓은 게 있어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남기지 못한 채 돌아가신 아버지이다. 화자는 허리를 구부리고 있다. 그 모습을 제 등짝으로 비를 막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무덤 앞에서 절을 하며 떠올렸으리. 
  일과 사랑, 이 두 가지야말로 인생의 대부분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 시 속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평생 / 일터도 없이 / 사랑도 미움도 없이’ 살았다. 적어도 자식인 화자가 보기에는 그렇다. 그래서 ‘아무도 아니’라 했다. 그런데? 아무도 아닌 그 두 사람 때문에 몸이 반응한다. 짜고 쓴 눈물이 눈 코 입으로 흘러나온다. 그 눈물의 기원은 하늘이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엄마보다 더 늙어버린 나는 살아 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아버지보다 부자인 나는 살아 있다. 세상에 아무도 아닌 부모는 없는 것이어서 죽은 부모는 자식의 마음속에서 썩지도 않는다. 죽은 부모를 염장한 하늘이 자꾸만 자꾸만 내 앞으로 내려온다. 삶은 존재만으로 이미 충분히 쓰고 짜다고 귓전에 대고 속삭인다. 쓰고 짠 줄 알아야 구수하고 단 줄도 알 수 있다고 해질녘 잿빛 구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웅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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