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 <아무도 아닌 사람>
출처: 시집 『리스본行 야간열차』
집도 절도 없는 사람친구 하나 없어친구 집도 없는 사람제 등짝으로 비를 막으며 뇌까린다세상에서 제일 나쁜 엄마는죽은 엄마젊어서, 아주 젊어서 죽은 엄마세상에서 제일 나쁜 아버지는죽은 아버지동전 한 닢 안 남기고 죽은 아버지(나이가 몇이오?)평생일터도 없이사랑도 미움도 없이아무도 아니게 진작 삭은 삶눈 코 입으로짜고 쓴 액체가 걸쭉하게 흘러나온다죽은 엄마, 죽은 아버지쓰고 짠 하늘염전회색 구름들 침침한 웅덩이들내려온다, 가라앉는다.* * *삶은 존재만으로 이미 충분히 쓰고 짜다- 황인숙 ‘아무도 아닌 사람’이성으로 분석하며 읽는 것보다 그냥 감성으로 받아들이며 읽어야 제 맛이 나는 시이다. 툭 툭 던지듯 내뱉는 말이 아슬아슬 넋두리로 떨어지지 않고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러한 호흡과 문체는 황인숙 시인의 장기이다.이 시에서 화자가 중얼거리며 되뇌며 떠올리는 것은 돌아가신 부모이다. 젊어서 죽은 엄마는 바꾸어 말하면 내가 어릴 적에 돌아가신 엄마이고, 동전 한 닢 안 남기고 죽은 아버지는 마땅히 이루어놓은 게 있어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남기지 못한 채 돌아가신 아버지이다. 화자는 허리를 구부리고 있다. 그 모습을 제 등짝으로 비를 막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무덤 앞에서 절을 하며 떠올렸으리.일과 사랑, 이 두 가지야말로 인생의 대부분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 시 속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평생 / 일터도 없이 / 사랑도 미움도 없이’ 살았다. 적어도 자식인 화자가 보기에는 그렇다. 그래서 ‘아무도 아니’라 했다. 그런데? 아무도 아닌 그 두 사람 때문에 몸이 반응한다. 짜고 쓴 눈물이 눈 코 입으로 흘러나온다. 그 눈물의 기원은 하늘이다.세상에서 제일 나쁜 엄마보다 더 늙어버린 나는 살아 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아버지보다 부자인 나는 살아 있다. 세상에 아무도 아닌 부모는 없는 것이어서 죽은 부모는 자식의 마음속에서 썩지도 않는다. 죽은 부모를 염장한 하늘이 자꾸만 자꾸만 내 앞으로 내려온다. 삶은 존재만으로 이미 충분히 쓰고 짜다고 귓전에 대고 속삭인다. 쓰고 짠 줄 알아야 구수하고 단 줄도 알 수 있다고 해질녘 잿빛 구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웅얼거린다.Copyrightⓒ by 유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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