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시편137,1).
“거기에” 시온을 생각하며 탄식과 눈물의 예배를 드렸던 곳으로,시인은 시공간적으로 유배 상황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암시한다.“생각하며”로 옮긴 히브리어는‘생각하다’외에도‘기억하다’,‘상기하다’,‘잊지 않다’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우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현대의 성경들은 과거형으로 ‘울었다’라고 옮기는데,이것이 오히려 시편의 역사적 상황과 더 잘 어울린다.이스라엘 백성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이 절은 나라와 성전을 잃은 참담한 심정을 말해주며,유배지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기를 원했던 신실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다.(이성훈2005,48).그들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나라를 잃은 서러움과 향수에 젖어 울었다.
시편137편의 전체적 의미:137편은 바빌론에 대한 저항과 예루살렘에 대한 헌신을 노래하며,파괴된 예루살렘의 가장 슬픈 시절을 직접 경험한 사람의 비애감을 담고 있다.본문에는 핵심어린 ‘예루살렘’(‘시온’포함)이 다섯 번(1.3.5.6.7절),‘생각하다(기억하다)’가 세 번(1.6.7절)나오며, 이 시편의 주제는 ’예루살렘을 생각(기억)하는 것‘이다.말하자면 예루살렘에 대한 백성들의 생각(1절),자신의 생각(6절)그리고 주님의 생각(7절)으로 내용의 흐름이 이어진다.
예루살렘은 그 기초까지 파괴되었고,시인은 유배라는 쓰라리고 처절한 고통의 체험으로 가득 차있다.그의 고통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느님께 예배드렸던 시온을 기억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다.이 시편은 유배와 유배 이후 시기에 가혹한 보복을 약속하는 예언자의 표현과 일치한다(이사13,16참조).시인이 저주를 기원하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그에게 하느님께서 조롱을 받으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이 시인의 원수에 대한 저주 기원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거슬린다.그래서 교회의 시간 전례에서는 7-9절을 빼고 기도로 바친다.그렇지만 이스라엘의 시인들이 원수들에게 심한 저주를 하면서도 하느님과 가까울 수 있었던 이유는,하느님께 죄 자체는 절대 용인될 수 없기에 이런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23-3 시편90-150편/전봉순 著/바오로딸)
지난주에 이어서,
제4장 인간과 인권
3.인간의 자유
인간이 선을 실행하거나 윤리에 맞게 선택하는 것은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자유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닮은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유 의지로 자신의 창조주를 찾으며 완성되도록 원하셨기 때문이다.따라서 인간은 분별없는 충동이나 순전히 외부 강박 아래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의식하고 자유롭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인간은 자유롭게 자신이 주도하여 개인의 삶과 사회생활을 이끌어가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또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로 외부 세상을 바꾸기도 하고 참된 선에 부합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한 인격으로 성장하고 사회 질서를 만들어 간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유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일까?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선과 악의 결정권자이신 하느님의 질서에 복종해야 하므로 그의 자유는 무한하지 않고 한계가 있다.인간은 자신이 진리 규범의 창시자나 절대 주인이 아님을 자각하면서 하느님께 결정하신 윤리법을 받아들일 때 완성된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모든 분야에서 지켜야 할 윤리 조건들이 무시하고 불의한 상황들이 도덕 생활을 짓누르면 “인간은 윤리 규범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손상시키고,자신을 속박하며,이웃에 대한 우애를 파괴하고,하느님의 진리를 거역하게 된다”(가톨릭 교리서 1740항).
인간은 진리에 복종할 때,곧 감히 자신이 진리나 윤리규범의 창시자나 절대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자유를 행사하여 개인과 사회에 이바지하는 선한 행동을 하게 된다(가톨릭 교리서1749-1756항).“인간의 자유는 선물로 준 것이며,마치 한 알의 씨처럼 받아들여 책임감을 가지고 키워내야 하는 것이다”(진리의 광채86항).그렇지 않을 경우에,자유는 인간과 사회를 파괴하면서 소멸한다.
(가톨릭 사회 교리 주제편42-45쪽 발췌)/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미덕에 관한 논의는 미덕을 본질적으로 중요한 가치라고 주장하는 종교와 필연적으로 맞닿아 있다.일부 도덕심리학자는 종교가 고결한 행동을 중시하는 것을 두고,미덕과 위험성에 대해 우려가 별개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가령 기독교에서는 ‘성경’에 적힌 대로 하느님께 무조건 복종하는 걸 미덕으로 여기고,하느님이 아브람에게 무고한 그의 아들 이사악을 자신한테 바치라고 명령하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그 대표적인 예로 제시한다.아들을 바치는 건 아브람에게 명백히 해로운 일이지만 이 이야기는 더 넓은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이자 철학자인 쇠렌 키르케고르는 저서‘두려움과 떨림’Fear and Trembling 에서 성경에 나오는 그 사건을 설명했다.‘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제목은 아브람이 하느님의 뜻에 복종할 때 마음 깊이 느낀 감정의 상태와 자기 손으로 아들한테 해를 가하는 일의 어려움을 나타낸 것이다.비기독교의 눈에는 아브람이 그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잔혹하고 냉담해 보인다.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무조건적 복종을 미덕으로 여기는 건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그리고 고통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노력에 관한 뿌리 깊은 믿음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유대교와 이슬람교도 마찬가지다)신자들은 신의 능력이“무궁하며”(시편147편5절)선하게 사는 길이라고 여긴다.아울러 잠언3장5~6절에 나오는“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찰함에 의지하지 말라.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를 포함한 성경의 여러 구절이 그 근거라고 생각한다. 즉, 기독교은 자신의 도덕적 직관이 허술하고 불완전하므로 자신보다 더 높은 존재, 더 많은 것을 아는 권위자의 판단을 따르는 것(가장 중요한 미덕)이 고통을 덜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길이라고 믿는다.
신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는 기독교인의 이러한 믿음을 단순히 ‘권위’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그보다 우리는 모두 각자 가진 정보를 토대로 추정해서 도덕적 판단을 내리므로,기독교인의 추정은 무신론자와 다르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기독교인은 자기 자신과 사회를 안전하게 지키려면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게 최선이라고 믿는다.이처럼 사람들이 위험성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면,그들이 내리는 도덕적 판단도 이해할 수 있다.(나와 당신은 왜 분노하는가272-273쪽/커트 그레이 著/김영사)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가톨릭 성경잠언3장5-6절)
(양주 순교성지 경당 내 05/31)
평소에는 생각이 많아야 한다
그러나 결단 앞에서는 단순해애 한다
진리는 언제나 복잡한 현실을 품고
가장 단순한 얼굴로 걸어가는 것이니
(박노해의 걷는 독서)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