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했던대로 한다고 반드시 되지 않을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이때는 어떻게
그 질문은 수행의 매우 깊은 지점에 닿아 있습니다.
만약 응무소주를 이해하고, 관찰하고, 집착을 놓는 공부를 오래 했는데도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가(禪家)에서는 먼저 다음을 점검합니다.
1. '놓고 있다'는 나를 놓지 못한 경우
겉으로는 놓고 있는데 속으로는 내가 수행하고 있다.내가 비워가고 있다.내가 깨달아야 한다.는 미세한 주체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임제선사는"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라고 했는데, 이는 부처를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속에 붙잡고 있는 모든 관념을 놓으라는 뜻입니다.
2. 체험에 집착한 경우
수행 중에는 큰 평안,광명 체험,공허감,무아감 등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붙잡으면 거기서 멈춥니다.실제로 많은 수행자들이 이 단계에서 수십 년을 머무르기도 합니다.
3. 지혜와 삶의 통합이 부족한 경우
좌선 중에는 공한데 일상에서는 분노,욕망,두려움에 쉽게 휘둘린다면 아직 공부가 삶 전체로 스며들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종은 "평상심이 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래도 안 되면? 여기서부터는 역설이 등장합니다.
많은 선지식들은 "안 되면 더 이상 되려고 하지 말라."
고 말합니다.왜냐하면 마지막 장애가 바로 깨달아야 한다는 의지인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응무소주의 관점에서 보면 깨달음에 대한 집착도 머무름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수십 년 노력 끝에 얻고, 어떤 사람은 모든 노력을 내려놓는 순간 문득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 "안 되면 포기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수행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길입니다.
설령 완전한 견성에 이르지 못하더라도,괴로움이 줄고,분노가 줄고,탐욕이 줄고
자비가 늘어난다면 이미 수행의 열매는 맺히고 있는 것입니다.
노장사상과 선종의 깊은 가르침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묻습니다.
"깨달아야 하는 존재가 실제로 있는가?"
만약 끝까지 관찰했을 때, 깨달으려는 '나'조차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면, 그때는 "깨달음을 얻은 나"도 사라지고 "깨닫지 못한 나"도 사라집니다.
그 지점에서는 성공과 실패라는 구분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응무소주의 최종 단계는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 일어나는 근원까지 비추어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도 안되는 경우 여러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그 근본이유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수행자가 정말 성실하게 수행했는데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업장(業障)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 지혜가 부족해서라고 말하기도 하고,
- 집착이 미세하게 남아서라고 말하기도 하고,
- 수행법이 맞지 않아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이유를 한 단계 더 깊게 파고들면, 선종과 대승불교에서는 결국 하나의 근본 원인으로 귀결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근본 원인 : "참된 자기를 아직 객관화된 대상으로 찾고 있기 때문"
깨달음을 얻으려는 사람은 대부분 알게 모르게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 내가 깨달아야 한다.내가 공을 체험해야 한다.내가 본성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나"가 이미 전제되어 있습니다.
즉, 깨달음을 찾는 주체와 깨달음이라는 객체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선종에서 말하는 견성은 찾는 자와 찾는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것
입니다.그래서 아무리 수행해도 안 되는 사람은 사실 수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찾는 방식 자체가 이원적(二元的)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왜 이것이 가장 근본인가
분노도,탐욕도,두려움도,깨달음에 대한 집착도,모두 "나"라는 중심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선사들은 망상을 끊으려 하지 말고 망상을 일으키는 자가 누구인지 보라.
고 합니다.
임제선사의 표현
임제의현은"구하는 자가 곧 잃는다."라고 설했습니다.
찾으면 찾을수록 대상이 되고,대상이 되면 본래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눈이 자기 자신을 직접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가장 깊은 선사들은 의외로 간단히 답합니다.
"알아차리는 자를 알아차려라."
분노를 보는 자는 누구인가.
생각을 보는 자는 누구인가.
공을 이해하는 자는 누구인가.
깨달음을 얻고 싶어하는 자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관념적으로 답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끝까지 추적해 들어가면, 어느 순간 잡히는 실체가 없음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수행이 잘 안 되는 수많은 이유들의 뿌리를 하나로 압축하면,
**'깨달음을 얻으려는 미세한 자아가 끝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마지막 관문을 "무엇을 더 얻는 것"이 아니라,
"깨달으려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화두로 돌려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진정한 응무소주는 단순히 대상에 머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머무르지 못하는 주체마저 비추어 보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