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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觀念)과 실재(實在)

작성자환공(桓公)|작성시간20.04.15|조회수327 목록 댓글 0

 

 

관념(觀念)과 실재(實在)

 

 

 

차례

 

1. 관념과 실재에 대한 이해

 

2. 명상을 할 때의 관념과 실재

 

3. 관념이란 무엇인가?

 

4. 실재란 무엇인가?

 

5. 세간의 법 팔풍(八風)

 

6. 출세간의 법 팔정도(八正道)

 

 

관념(觀念)과 실재(實在)

 

1. 관념과 실재에 대한 이해

 

관념과 실재라는 말은 철학용어 같아서 복잡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또 관념과 실재라는 말을 들어도 무슨 뜻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설령 이 말의 의미를 얼마간 알았다고 해도 생각으로 안 것이라서 들을 때뿐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여서 자기의 견해로 삼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관념과 실재에 대한 것은 지금까지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새로운 정신세계의 견해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 관념의 세계이기 때문에 관념과 실재가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의 진실과 이 세상을 사는 자신의 실재를 안다는 것은 하나의 깨달음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관념과 실재는 철학을 뛰어넘는 진실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일반적 견해는 모두 관념이라서 있는 그대로의 실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이 깨달음을 이루려는 구도의 과정에서 관념이 아닌 실재를 발견합니다. 관념은 설정된 개념이지만 실재는 통찰지혜를 얻게 하는 사실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관념을 뛰어넘는 실재에 관한 것은 지혜가 난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알 수 있습니다. 관념이 세간의 질서라면 실재는 출세간의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세간을 사는 사람이 더 높은 정신세계를 향해서 가려면 반드시 관념이 아닌 실재의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야 존재하는 것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관념은 주관적 견해로 본 생각들이 하나의 진실처럼 통용되고 있는 개념입니다. 이 세상은 저 스스로의 진실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그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완전한 지혜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굳어진 것을 하나의 통념으로 알고 그대로 따릅니다. 이것은 진실과는 다른 습관적인 것입니다.

 

실재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입니다. 실재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생기는 사실입니다. 관념으로 보면 실재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것을 볼 때는 관념이 배제됩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생각 안에 함께 있으면서 각자의 지혜에 따라 나타나는 견해입니다.

 

관념과 실재에 대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래 전에 제가 미얀마에서 수행을 할 때 제 방에 저와 함께 사는 곤충들이 있었습니다. 이 곤충들 중에 저에게 이로운 곤충은 도마뱀과 거미였고 해로운 곤충은 모기와 개미였습니다. 창에 붙어있는 도마뱀은 모기를 잡아먹기 때문에 이롭게 여겨 우호적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거미도 방안에 거미줄을 치고 모기를 잡아먹기 때문에 우호적입니다. 그러나 모기와는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미얀마에는 일 년 내내 모기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조심해도 물리는 일이 빈번합니다. 개미는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방안에 먹을 것이 있을 때는 금방 시커멓게 떼를 지어 달려듭니다. 그래서 항상 방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개미는 좌선을 할 때 깜짝 놀랄 정도로 몸을 물기도 합니다.

 

이 중에 도마뱀과 거미에게는 불편한 마음이 없지만 모기와 개미에게는 늘 불편한 마음이 있습니다. 더욱 심기가 불편한 것은 이 곤충들이 왜 내 방에 들어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를 위해 새로 지은 건물인데 초청하지도 않은 모기와 개미가 들어와 주인을 괴롭히니 불청객에 대해 우호적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곤충과 함께 지내면서 수행을 하다가 어느 날부터 이 방이 내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당초에 모기와 개미를 위해서 집을 짓지는 않았지만 어떤 건물이 되었건 곤충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자연 현상계 안에는 내 집과 네 집이 없고, 단지 함께 거주하는 공간이 있을 뿐입니다.

 

내가 쓰는 방은 나에게 할당된 방이어서 나 혼자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만든 권한이라서 인간의 관념입니다. 곤충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권한에 상관없이 이 방이 공동의 주거장소입니다. 이것이 실재입니다. 내 시각에서 보면 내 방이지만 곤충의 시각에서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에 불과합니다. 관념으로 보면 모기나 개미가 문제지만 실재하는 현상으로 보면 이런 일은 현상계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진리란 보편타당해야 하므로 특정인에만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내 방이라는 것은 나의 관념입니다. 또 내 방뿐이 아니고 지구는 인간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지구를 파괴하는 주범은 인간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한생산을 하여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지구를 파멸로 이끄는 탐욕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방에 대한 시각이나 지구에 대한 시각이나 내 것이라는 관념으로 보는 인간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이런 자각이 일어난 뒤에 해로움을 주는 모기나 개미에 대해서도 관대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관념이 아닌 실재를 알았기 때문에 스스로 일으킨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을 때는 자아가 있었지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니 단지 정신과 물질만 있었지 내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관념이 아닌 실재를 통해서 얻은 진실입니다.

 

이 결과로 이익을 본 것은 저 자신입니다. 곤충에 대해서도 자애로운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저를 괴롭히는 곤충을 끌어들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적대적인 감정은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곤충뿐만 아니라 인간이나 모든 생명에 대해서도 똑같은 자애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모기나 개미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생명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들도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을 안 뒤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피해를 입지 않도록 조심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작은 모기나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않는 제 마음은 평화로웠습니다. 이것이 실재를 통해서 본 곤충과의 동거였습니다.

 

또 한 예가 있습니다. 어느 날 미얀마의 다른 한 명상원에서 얼마간 수행을 하다가 외부와 단절된 곳으로 들어가 수행을 했습니다. 이곳을 영어로는 사일런스 빌딩(silence building) 이라고 합니다. 긴 복도에 독립된 방이 하나씩 연결되어 있는 이층 목조건물입니다. 이곳은 개인이 자기 방에서 묵언수행을 하는 곳으로 외부와 차단되어있습니다. 수행처는 항상 정적에 쌓여있지만 수행자들이 복도에서 걷는 수행을 할 때 내는 삐거덕 거리는 바닥 소리만 있습니다.

 

식사도 새벽 5시와 오전 11시에 두 번 날라다 주면 먹습니다. 밥을 날라다 주는 사람이 외부와의 유일한 통로입니다. 수행자끼리 대화를 하지 않아 서로 눈을 마주치지는 않지만 동질감을 느끼는 은근한 눈빛은 교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제 옆방의 수행자가 바닥에 눕지 않고 앉아서 수행을 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다가 탈진하여 업혀나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곳 묵언실은 명상원의 끝자락에 깊은 언덕 아래에 있어서 지형적으로도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독립된 공간입니다. 묵언실의 긴 건물 바로 앞에 역시 긴 울타리가 있어서 명상원의 건물과 밖에 있는 숲의 소유가 분명하게 구별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무가 울창한 이 넓은 숲은 명상원 소유가 아니지만 묵언실 수행자들이 항상 내려다볼 수 있는 매우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높은 나무들과 푸른 숲은 이곳 수행자들을 위해 펼쳐진 한 폭의 그림이었습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한 테 어우러진 숲은 언제나 마음을 싱싱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쪽으로는 나무가 없는 빈 공간도 있어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아울러 내 소유가 아닌 남의 소유의 숲을 내 소유처럼 볼 수 있다는 것도 참으로 행복이었습니다. 사실 숲은 소유자의 것이 아니고 보는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묵언실은 누구도 간섭하지 않아 수행시간이 자유로운 공간이지만 갇혀 지내는 압박감을 함께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런 압박감을 울창하고 푸른 숲이 해결해 주었습니다. 수행자는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하지만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압박감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숲을 보면서 울타리 너머는 자유고 내가 있는 곳은 자유가 없는 곳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다람쥐가 숲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울타리 위를 뛰어다니다가 울타리 너머에 있는 야자수 나무로 가서 오르곤 했습니다. 저는 울타리로 인해 밖에 있는 숲으로 갈 수 없었지만 다람쥐는 항상 자유롭게 이쪽저쪽을 오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숲에는 아침부터 저녁이 되도록 많은 새들이 날아와 노래하다가 또 날아가곤 했습니다. 자연의 소리만 있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도 각종 새들은 줄기차게 노래를 했습니다.

 

저는 갇혀있었지만 다람쥐와 새들에게는 인간이 만든 경계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인간이 만든 소유의 관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람쥐와 새들을 통해서 관념이 아닌 실재를 보았습니다. 이때의 다람쥐와 새들은 제 마음이었습니다. 저도 그들처럼 이쪽저쪽을 자유롭게 오가고 또 새들처럼 노래하면서 숲 위를 자유롭게 날았습니다. 이때의 제 마음에는 울타리라는 관념이 없었고 남의 숲이라는 관념도 없었습니다. 제 마음이 그들과 함께 자유로운 것이 실재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을 통하여 내 땅, 네 땅이라는 인간이 만든 관념의 무서움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이런 속박 속에서 신음하고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쪽저쪽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다람쥐처럼, 왔다가 떠나고 떠났다가 또 찾아오는 많은 새처럼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인간이 만든 관념의 전형적인 산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자신의 내면을 통해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얻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외부의 경계로 인해 속박을 받는다면 자신의 내부에서 자유를 얻는 길이 유일한 해방이었습니다.

 

그런 얼마 뒤에 저는 전에 경험하지 못한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보았습니다. 어느 날 푸른 숲을 지켜보고 있는데 한순간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세계가 보였습니다. 거기에는 내가 본 지금까지의 숲이 아니고 그냥 거기에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숲이 보였습니다. 이때의 숲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숲과 경계를 이루는 울타리고 그냥 하나의 현상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보니 거기 세상이 있다’였습니다.

 

이때는 모든 감정이 차단된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보였습니다. 숲을 즐기거나 새들을 반기지도 않았습니다. 다람쥐를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 이거였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실재였습니다. 이때 저는 고요했고 그리고 마음은 깨어있었고 아무 흔들림 없이 평온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관념을 벗어버린 실재는 참으로 청정하고 자유로웠습니다. 이것이 관념이 아닌 실재를 본 하나의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2. 명상을 할 때의 관념과 실재

 

명상은 앉아서 좌선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걷고, 서고, 앉고, 눕고, 말하거나, 말하지 않는 것이나 모두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은 내 몸, 내 마음이라는 시각으로 보지 않고 그냥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한 것입니다. 내 몸,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집착을 하게 되어 몸과 마음이 가진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법의 성품을 보지 못합니다. 법의 성품을 보지 못하면 집착을 끊을 수 없어 괴로움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만약 알아차림 없이 내 몸과 마음을 보았다면 불만족과 근심걱정이 생깁니다. 알아차림 없이 보면 내 몸과 마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가 호흡의 일어남과 꺼짐을 알아차릴 때 오직 일어남과 꺼짐에 집중하면 내 호흡이라는 관념이 사라집니다. 호흡의 실재는 일어남 꺼짐이며 부풀었다가 수축하는 바람의 요소입니다. 걸을 때 오른발, 왼발을 알아차리면 내 발이라는 관념이 사라집니다. 발의 움직임의 실재는 들 때 가벼움과 내려놓을 때 무거움입니다. 수행자는 이렇게 알아차리면 모든 발걸음을 내발이라고 알면서 걷지 않습니다. 단지 대상과 아는 마음과 알아차림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출발이자 기회입니다. 적어도 이 순간은 나라고 하는 자아가 없기 때문에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없습니다.

 

오직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는 이 순간을 청정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청정해진 마음이 고요해지면 다음에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라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뒤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밖에 없다는 지혜가 납니다. 이처럼 대상의 실재를 단순하게 알아차리면 단계적 과정의 지혜가 성숙됩니다. 이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이때 관념이 아닌 실재를 알아차려야만 법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때 마음이 밖으로 나가면 이런 실재를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마음이 밖으로 나가면 즉시 내가 본다는 견해를 가지고 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보지 못합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무상을 느낄 수도 있지만 이때의 무상은 상당히 감상적인 무상이라서 지혜로 본 무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본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보아서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내가 본다는 선입관 없이 보아야 하기 때문에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다 보면 내 몸과 내 마음이라는 관념 없이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 때문에 선입관을 가지고 보아서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내가 본다는 선입관 없이 보아야 하기 때문에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처럼 수행자가 처음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내 몸과 마음이라는 관념 없이 보게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궁극의 목표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가지고 있는 진실한 성품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가지고 있는 성품은 무상, 고, 무아입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존재하는 것이 불만족이며, 여기에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궁극의 깨달음입니다. 그래야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오랜 윤회의 여행을 끝낼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처음부터 이런 궁극의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을 하지는 않습니다. 출발은 최고의 지혜를 얻으려는 사람이나 그냥 심심해서 호기심으로 수행을 해보려는 사람이나 가는 길이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에는 자신의 의도나 마음가짐과는 상관없이 똑같이 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의 마음은 모두 다르지만 기차를 타고 떠나는 것은 모두 똑같습니다. 이것이 법을 얻는 기차의 여정입니다. 나는 깨달음 같은 것은 생각도 안합니다, 라고 해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행의 시작은 깨달음을 향해서 떠난 것입니다.

 

무상, 고, 무아는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가장 분명한 진실입니다. 모든 생명은 이것 이상도 이하도 없습니다. 이것이 생명이 가지고 있는 진실의 전부입니다. 이러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념이 아닌 실재를 보아야 합니다. 물론 관념의 과정을 거쳐 실재를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실재를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관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관념이 아닌 것은 모르고 살기 때문에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다만 궁극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관념이 아닌 실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관념이 아닌 순간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관념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운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때 내 몸과 마음이라는 것 없이 그냥 알아차리면 다음에 남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때도 똑같이 단지 대상으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때 나라거나 너라고 하는 분별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남자라거나 여자라거나, 젊다거나 늙었다는 것 없이 그냥 사람으로 보게 됩니다. 이것이 관념이 아닌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 몸과 마음이 가지고 있는 진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예쁘다거나 밉다고 본다면 공연한 느낌을 만들어 탐욕을 일으키거나 성냄을 일으킵니다. 아무런 소득도 없는 일에 이런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이런 때의 마음을 발정한 코끼리와 같다고 합니다. 이는 발정한 코끼리가 욕망을 가지고 이곳저곳에서 코를 휘두르며 간섭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쁘고 밉다는 것은 자신이 만든 관념입니다. 실재는 그냥 사람일 뿐입니다. 무엇에 비해 예쁘고 무엇에 비해 밉습니까? 사랑하는 자기 자식은 얼굴에 상관없이 모두 예쁩니다. 그리고 하는 짓이 미우면 얼굴이 아무리 예뻐도 미워 보입니다. 이것도 자신이 만든 관념입니다.

 

예를 들면 수행자가 자신의 가슴에 바위처럼 큰 돌덩어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독한 관념입니다. 우리가 무심히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의 피해가 아주 큽니다. 사실 가슴에 큰 돌덩어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수행자가 단지 이렇게 느낀 것입니다. 이때 바위 같다거나 크다거나 돌덩어리가 같다는 것은 모두 자신이 만든 관념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엇 같다는 것은 이미지로 자신이 만든 표상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만약 자신이 이렇게 이미지를 만들면 스스로 만든 표상으로 인해 더욱 힘들게 됩니다. 사실은 가슴의 느낌이 단지 답답하고 무거운 느낌일 뿐인데 바위처럼 큰 돌덩어리라는 관념의 표상을 만들어서 키우면 오히려 없는 병이 더 생깁니다. 이것이 관념이 일으킨 피해의 실상입니다. 모르고 말하면 말의 지배를 받아서 그대로 따르면서 삽니다. 자신이 관념으로 만든 부정적인 표상으로 인해 자신에게 부정적인 것을 투사해서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한 것입니다. 이것이 실재가 아닌 관념이 가져오는 결과입니다.

 

크다는 것은 자신이 만든 기준입니다. 무엇에 비해 크고 무엇에 비해 작습니까? 크고 작은 기준은 어디서 생긴 것입니까? 이때 막연하게 자신의 괴로움을 키워서 과장한 것입니다. 이런 관념이 아닌 실재는 그냥 가슴에 무거움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면 하나의 느낌에 불과하지만 관념으로 보면 없는 바위와 큰 돌덩어리가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관념이 만들어낸 하나의 창작입니다. 그래서 이런 관념으로 인해 스스로를 더욱 가혹하게 채찍질합니다.

 

제가 어느 날 스승과 인터뷰를 할 때 몸에서 나타난 현상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좌선을 하는 중에 오른쪽 팔에서 강한 전율이 일어나서 위쪽으로 사라지는 현상이 거듭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스승께서는 “아니다, 위로 옮겨가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연속되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다시 “아닙니다. 분명하게 아래쪽에서부터 위쪽으로 강하게 옮겨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이것이 제가 가진 관념이었습니다. 저는 제 몸이라서 제가 제일 잘 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이렇게 우겼지만 그러나 스승은 실재를 말하였습니다. 저는 당시에 스승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지혜가 조금 성숙한 뒤에 이 말의 뜻을 알았습니다.

 

몸에서 일어난 모든 느낌은 일어난 곳에서 1mm도 벗어나지 않고 일어난 순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집니다. 이런 느낌이 위로 옮겨간 것이 아니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빠르게 연속되었을 뿐입니다. 몸이 그런 것처럼 마음도 똑같이 빠르게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이것이 실재를 본 무상의 지혜입니다. 저는 이렇게 안 뒤에 스승의 말씀을 부정했던 때를 기억하고 항상 스승의 말씀을 더욱 경청하였습니다.

 

이때 제가 본 시각은 단지 관념적인 현상에 불과했지만 스승은 느낌의 실재를 보고 무상을 발견하도록 말한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들이 호흡을 코에서부터 배까지 내려가면서 알아차리지 않고 한 곳에서 알아차리는 것은 무상을 알기 위한 수행방법입니다. 한 곳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볼 때 무상의 지혜가 성숙합니다. 만약 하나의 느낌이 옮겨가는 전 과정을 계속해서 알아차린다면 집중을 위한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지혜를 얻는 효과는 없습니다.

 

수행자가 경험하는 과거나 미래는 모두 관념입니다. 실재하는 현상은 항상 지금 여기에 있는 몸과 마음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라서 관념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서 관념입니다. 실재는 지금 이순간의 현재에만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 과거나 미래에서 삽니다. 지금 이 순간에 여기에 있는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지 않는 한 현재에 머물지 못합니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지만 후회와 아쉬움뿐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서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실재하지 않는 관념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오직 수행자만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실재하는 행복은 현재에만 있습니다.

 

인간은 내가 없는데도 내가 있다고 생각하여 꿈속에서 삽니다. 여기에 더하여 과거나 미래에 살면서 현재를 모르고 사는 사람도 관념으로 사는 것이라서 꿈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실재하는 않는 세상은 꿈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꿈속에 살면서 또 허황된 꿈을 꿉니다. 불필요한 욕망이 꿈과 같은 것이라면 그렇지 않아도 꿈속에서 사는데 또 꿈을 꾸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기루를 잡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모르고 사는 백년보다 알고 사는 단 하루가 더 낫다고 합니다.

꿈속에서 또 꾸는 꿈은 관념이지 실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관념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예술세계가 현실이고 실재로 살고 있는 현실은 꿈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관념과 실재가 전도된 정신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재하는 진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일생을 살면서 단 한순간이라 진실한 현재에 머무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이렇게 사는 것을 모릅니다. 과연 언제 조용히 자신의 호흡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현재에서 진실의 실마리를 잡은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만이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서 고요한 행복을 얻습니다.

 

진실은 지금 이순간의 현재에만 있습니다. 오직 현재만이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는 실재하지 않는 관념입니다. 관념의 상태에서는 지혜의 불이 타오르지 않습니다. 과거나 미래는 생각이라서 결코 지혜가 생길 수 없습니다. 오직 현재의 실재하는 마음에서만 법을 보는 불이 타오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은 행복을 만드는 기초입니다. 현재를 아는 마음이 있을 때는 깨어있는 상태라서 어떤 번뇌도 침투하지 못합니다.

 

만약 마음이 과거로 갔다면 “지금 과거를 생각하고 있네”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마음이 미래로 갔다면 "지금 미래를 생각하고 있네“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이래야 관념이 아닌 실재로 돌아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현재라고 하는 순간에 현재는 과거가 됩니다. 그리고 현재라고 하는 순간에 현재는 없어지고 미래로 갑니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현재에 머물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수행자들은 현재의 양을 키워가면서 삽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바로 현재에 머무는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이 많을수록 정신이 각성이 되어 번뇌가 들어오지 못하고 고귀한 법을 발견합니다. 근심걱정이 많고 흐린 마음으로는 결코 법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현재에 있을 때가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관념은 보는 자의 시각에 따라서 설정된 것입니다. 한 나라의 독립투사가 적군을 죽였다면 자기 나라에서는 열사입니다. 그러나 상대편 국가에서 보면 살인자입니다. 관념으로 보면 열사가 맞습니다. 그러니 실재를 보면 살인도 맞습니다. 과연 무엇이 옳은가요? 여기에 무엇이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어느 쪽의 시각으로 보느냐 하는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재를 추구하는 세계에서는 살생을 하지 않습니다.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궁극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인간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직 불교에서만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불교도가 불교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했다면 실재를 아는 수행자가 아닙니다. 실재에서는 내 나라, 네 나라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관념이 있다면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래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조국이라는 것은 관념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오직 정신과 물질이 있을 뿐입니다. 내 종교, 내 사상, 내 나라, 내 고향, 내 학교, 내 집, 내 가족, 내 몸과 마음은 모두 관념입니다. 이것들은 있지만 내 것이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것입니다. 이것들을 모두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영원히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도자들은 오히려 이런 것을 부추겨 복종과 충성을 요구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스스로의 우월감을 위해 자신을 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인해 실재를 아는 지혜는 점점 더 멀어집니다.

 

여기서 내 것이 필요 없으니 무조건 부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괴로움을 여의기 위해서 깨달음을 얻으려는 사람에게는 이런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에 사로잡히면 비교우위를 점하려는 마음으로 인해 욕망과 성냄이 일어나 마음이 평화롭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행복이 없고 사회가 더욱 혼란해 집니다. 이 세상을 모두 부정해서는 안 되지만 진실을 알아서 알맞게 대처하는 것이 지혜가 있는 자의 행동입니다. 세간의 질서를 존중하면서 출세간의 질서를 지향해야 합니다. 세간을 부정하면 그 순간부터 존립이 무너지기 때문에 세간의 바탕위에서 출세간을 향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3. 관념(觀念)이란 무엇인가?

 

우리말로 관념이라고 할 때는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말합니다. 또는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어 생각에 잠기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관념은 이런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관념의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서는 빨리어의 어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관념을 빨리어로 빤냐띠(paññati)라고 합니다. 빤냐띠라는 뜻은 표명(表明), 서술(敍述), 가설(假說), 명칭(名稱), 이름, 개념(槪念), 가정(假定), 시설(施設) 등을 의미합니다.

 

표명(表明)은 드러내서 명백하게 밝힌다는 뜻입니다. 서술(敍述)은 차례를 쫓아 말한다는 뜻입니다. 가설(假說)이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설정한 것입니다. 명칭(名稱)은 사물을 부르는 호칭이나 이름을 말합니다. 개념(槪念)은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요소를 추상하여 종합한 하나의 생각입니다. 이 말을 영어로는 컨셉(concept)이라고 합니다. 가정(假定)은 임시로 정한다는 말입니다. 가설(假說)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이상의 뜻을 종합해보면 관념이란 것은 실재가 아닌 것으로 단지 말하기 위한 것이나, 혹은 부르기 위한 명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라한은 명칭이라서 관념입니다. 아라한은 부르기 위한 명칭일 뿐입니다. 아라한의 실재는 욕망과 집착이 끊어진 마음입니다. 명칭은 부르기 위한 호칭이므로 내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된 자는 없고 아라한의 지혜는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내가 아라한이 되었다 말하면 관념이고 그냥 아라한의 정신적 지혜만 있다고 말한다면 실재입니다. 그래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스스로 도과를 얻은 것을 밝히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관념이 아닌 실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관념은 일상적인 관용어로 표현되는 개념입니다. 무엇을 부르기 위한 명칭이나 습관적으로 말하는 것의 일반적 개념일 뿐입니다. 관념은 사람, 나, 너, 남자, 여자, 동물, 아름다움과 추함, 크고 작음 등으로 사물을 부를 때 그것을 지칭하는 명칭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명칭을 통하여 존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존재라는 것도 관념입니다.

 

그러나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 사용되는 용어가 오래되면 하나의 사실처럼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나’라는 것이나 ‘너’라는 명칭입니다. ‘나’는 자신을 부르기 위한 명칭이지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실재는 정신과 물질의 결합물입니다. 이것이 다섯 가지 무더기인 오온(五蘊)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라고 하거나 ‘너’라고 합니다. 이때 나와 너라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부르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하는 명칭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견해로 인해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아(個我), 자아(自我)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바로 이런 점이 관념의 사용으로 인해서 생기는 착각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알기 전에는 내가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깨달은 자에 의해 이런 진실이 밝혀지고 비로소 무아를 알아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장미꽃은 부르기 위한 명칭이라서 관념입니다. 장미꽃의 실재는 부드러운 꽃잎과 향기입니다. 만약 장미꽃을 가시꽃이라고 새로 명칭을 붙여도 가시꽃은 여전히 부드러운 꽃잎과 향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명칭이 갖는 한계를 알아 실재를 파악해야 합니다. 이런 명칭이 진실로 통용되면 진실은 숨어버리고 잘못된 견해만 남습니다.

 

자동차는 많은 부속이 조립되어서 만들어집니다. 이때 자동차는 이런 부속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을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 관념입니다. 그러므로 핸들이 자동차가 아니고 엔진이 자동차가 아니고 바퀴가 자동차가 아닙니다. 핸들은 핸들이고 엔진은 엔진입니다. 그러므로 자동차는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 관념이라서 실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물질적인 부속물들의 조합니다.

 

인간도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 관념입니다. 인간의 실재는 정신과 물질의 조합물입니다. 정신은 여러 가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몸은 무수한 장기들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런 결합이 인간이라고 부르는 존재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도 관념이고 여기서 이것을 소유하는 자아도 없으므로 나라고 하는 것도 관념입니다.

 

이처럼 관념에 실재가 없으면 관념이 지배하게 되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이것은 어리석음이라서 우리의 눈을 가리어 사물을 왜곡합니다. 이것의 피해는 온전하게 자신이 당해야 합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본다면 없는 것을 있다고 알게 되어 세상을 살면서 많은 괴로움을 겪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관념이 부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관념은 여전히 관념으로써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를 나라고 부르지 않고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관념을 사용하면서 실재하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면 됩니다. 그래서 관념은 관념으로 알고, 실재는 실재로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관념을 속제(俗諦)라고 하며 세속적 진리, 또는 관념적 진리라고 말합니다. 관념이 없는 실재는 없고, 세간이 없는 출세간은 없습니다.

 

관념은 사마타 수행의 대상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대상의 실재하는 성품을 알기 위해서 하는 수행이 아니고 고요함을 얻기 위해서 하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관념을 붙잡고 근본집중을 해서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통찰지혜수행이 아니라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정기간 사마타 수행을 한 뒤에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궁극의 열반에 이릅니다.

 

사마타 수행의 덕목은 자비입니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의 덕목은 지혜입니다. 자비는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측면이 있어 수행자에게 필요합니다. 지혜는 지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이 있어 수행자에게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조화를 이룰 때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정서만 강조되어서는 지적이지 못해 선한 바보가 됩니다. 지적인 것만 강조되면 정서가 없어 냉혹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관념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관념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관념이라고 말할 때는 실재를 말하기 위해서 관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관념은 실재를 향해서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관념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관념이라고 해서 무조건 배재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념은 관념으로써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관념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관념에 의해 실재가 숨어버립니다.

 

수행을 할 때 처음부터 대상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경우에는 관념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이럴 경우에 처음에는 관념의 중앙에 강하게 고리를 걸어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야 합니다. 이렇게 붙잡기 쉬운 관념을 대상으로 붙잡고 열심히 알아차리면 차츰 실재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 말은 처음에는 사마타 수행을 해서 대상을 강력하게 붙잡은 뒤에 열심히 알아차리면 나중에 차츰 위빠사나 수행의 실재가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 수행과 실재를 대상으로 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병행할 경우에는 먼저 관념을 알아차리고 나서 차츰 드러나는 실재를 알아차리는 방법도 하나의 수행과정입니다. 관념이 강하면 실재가 약해지고 실재가 강하면 관념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우선은 어떤 방법이 되었건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지면 지혜를 얻는 쪽으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은 다양한 방법이 있으므로 반드시 스승의 지도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이 어려운 것은 법을 따르지 않고 먼저 나를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수행을 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수행은 내가 알고 있는 정신세계가 아닌 새로운 정신세계를 계발하는 것이라서 관념적인 나를 내세우면 안 됩니다. 법을 보고자 할 때는 나의 기준이 아닌 법의 기준에 따라야 합니다. 자아를 가지고 있으면 수행을 시작하기도 어렵고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계속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승들은 수행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판단은 내가 한다. 너는 알아차리기만 해라.”

 

 

4. 실재(實在)란 무엇인가?

 

실재는 사실로써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실재는 가설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실입니다. 실재는 관념과 대비되는 뜻입니다. 실재를 빨리어로는 빠라마타(paramattha)라고 합니다. 빠라마타의 뜻은 최고의 의미, 최상의(最上義), 승의(勝義), 실재(實在), 성품(性品)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재란 실재하는 것, 자연적인 것, 자연적인 것의 성품입니다.

 

최고의 의미는 인간이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얻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최고로 옳은 뜻이라는 의미로 최상의(最上義)라고 합니다. 승의(勝義)는 실재를 통해서만이 승리에 이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실재(實在)는 자연이나 현실에서 사실에 입각한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을 영어로는 리얼리티(reality)라고 합니다. 성품(性品)은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인 고유한 특성을 말합니다.

 

빠라마타에 법(法)을 붙이면 빠라마타 담마(paramattha dhamma)가 되는데 이 말은 근본법(根本法), 최승의법(最勝義法), 궁극적 진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궁극적 실재의 세계입니다. 궁극적 진리라는 말은 일의 이치가 마지막까지 이른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것이 최고의 진리라는 뜻으로 최승의법이라고 합니다.

 

빠라마타 담마라는 말이 뜻하는 용어는 실로 최상의 호칭이 모두 망라되었습니다. 이것 외에는 최고의 진리는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법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최고의 법은 비밀스러운 것도 아니고 신묘한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최고의 예찬이 주어졌다고 해서 근본법이 결코 특별한 법이 아닙니다. 근본법은 네 가지인데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 열반입니다. 근본법은 인간의 정신과 물질을 의미하며 여기에 열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리에 남이 모르는 법은 없습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몸과 마음이 바로 진리를 아는 근본바탕입니다.

 

근본법은 네 가지 인데 이 중에 세 가지인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은 오온(五蘊)을 말합니다. 오온은 몸과 마음의 다섯 가지 무더기를 뜻합니다. 세 가지 중에서 마음은 아는 마음으로 오온의 식(識)입니다. 마음의 작용은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오온의 수(受), 상(想), 행(行)입니다. 물질은 몸을 말하는 오온의 색(色)입니다. 이상 세 가지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유위법(有爲法)이란 특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만 네 번째가 열반입니다. 열반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가 불타서 이르게 되는 정신적 상태입니다. 이 열반이 수행자의 마지막 목표입니다. 열반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끝난 무위법(無爲法)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인간이 지향하는 최상의 길은 오직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정신과 물질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정신과 물질의 실재를 알아차릴 때 궁극의 열반에 이르러 윤회가 끝나는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이런 최상의 용어가 붙여졌습니다. 이제 인간이 추구해야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이며 이 가치의 진실을 알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습니다. 인간이 가진 최상의 가치는 바로 정신과 물질이며, 이 정신과 물질의 실재를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열반에 이르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이것이 행복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과제입니다.

 

이제 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추구하는 정신세계의 기본도(基本道)인 12연기가 오직 인간의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고,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자가 알아차려야 할 대상도 정신과 물질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정신과 물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바로 정신과 물질을 통해서 얻어야 합니다. 이러한 정신과 물질의 법은 항상 와서 보라고 실재의 법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 누구나 지금 여기에 드러나 있는 실재를 알아차려서 열반을 성취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실재는 인류역사가 생긴 이래 겁을 통하여 한분씩 출현하는 역대의 붓다에 의해 똑같이 밝혀집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실재의 법이 사라지고 다시 관념의 시대가 흐릅니다. 붓다는 이천 오백년 전에 관념뿐인 세계에서 실재를 통하여 존재하는 것의 본질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정신세계에서는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사상이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니체, 까뮈, 사르트르 같은 분들에 의해 제기된 실존주의입니다. 그리고 이미 붓다에 의해 밝혀진 마음에 대한 분석이 프로이드에 의해 일부분이 밝혀졌습니다. 진리가 있어도 이토록 시간이 걸리고 또 만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선한 인연이 있는 사람은 쉽게 만나서 받아들이고 이를 실천하여 행복을 얻습니다.

 

인간이 눈으로 볼 때는 물질의 세계가 있습니다. 귀로 들을 때는 소리의 세계가 있습니다. 코로 냄새를 맡을 때는 냄새의 세계가 있습니다. 혀로 맛을 볼 때는 맛의 세계가 있습니다. 피부로 접촉을 할 때는 접촉을 해서 대상을 경험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이때 대상의 모양이나 관념을 보지 않고 대상이 가지고 있는 실재를 보는 것이 근본법의 세계입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부딪쳐서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이 있는 것은 모두 실재이지만 이 실재가 계속해서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육근이 육경에 부딪쳐서 육식을 하는 것도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눈으로 볼 때 보이는 세계는 일어난 순간에 사라지고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마음도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이때 보이는 대상이나 보는 마음은 계속되지 않고 순간에 일어나서 순간에 사라지는 현상만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들은 모두 무상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에 자아는 없습니다. 이렇게 실재를 통하여 최종적인 법을 보는 것이 근본법입니다. 이렇게 알 때가 일의 이치가 마지막에 이르러서 얻을 수 있는 실재입니다. 이것을 고귀한 진리라고 하고 궁극적 진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진리를 통해 모든 욕망이 사라지고 집착이 끊어져서 다시 태어나는 갈애가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아는 것의 마지막 결과입니다. 만약 진리를 바르게 알지 못했다면 갈애가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최종적 결과는 갈애가 끊어져 윤회가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괴로움이 되풀이 되지 않는 최상의 선택입니다.

대상의 실재를 알아 마지막의 근본법에 이른 수행자는 지혜가 난 성자입니다. 그러나 근본법을 모르면 무지한 범부입니다. 범부는 오랫동안 잘못된 견해로 인해 괴로움을 겪습니다. 바로 무상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불만족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무아를 모르기 때문에 괴로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성자는 무상, 고, 무아의 법을 발견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이 세상의 이치를 보고  무상, 고, 무아의 진리를 알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해서 무상, 고, 무아의 진리를 알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아는 두 가지는 진리를 아는 것에서는 같으나 사물의 참된 성품을 파악하여 깨달음을 얻는 데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이 세상에 드러난 것을 보고 무상을 알 수도 있겠지만 이때 내가 본다는 자아를 가지고 보기 때문에 대상의 참 성품을 보지 못하고 개념에 머물고 맙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할 때만이 내가 본다는 견해로 보지 않아서 바르게 봅니다. 이렇게 해서 내 몸이 아니고 내 마음이 아니라고 아는 지혜가 나야 비로소 괴로움을 끊을 수 있습니다. 이 수행을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실재는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입니다. 실재는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느낌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고요함을 얻어 번뇌를 억누르지만 위빠사나 수행은 통찰지혜를 얻어 번뇌를 말립니다. 억누른 번뇌는 잠재해 있지만 말린 번뇌는 다시 일어날 종자가 사라져 소멸됩니다.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은 모두 알아차림을 하지만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방법에 따라 나뉩니다. 사마타 수행은 근본집중이지만 위빠사나 수행은 찰나집중을 해서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위빠사나 수행으로 알아차릴 때라야 궁극의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몸, 느낌, 마음, 법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의 모양을 알아차리지 않고 실재하는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야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분리해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느낌은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관념과 달라서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알아차림이 찰나집중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발견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도 표상으로 알아차리지 않고 코에서는 들어갈 때의 차가움과 나올 때의 따뜻함을 알아차립니다. 배나 가슴에서 일어나는 호흡은 부풀고 꺼지는 바람의 요소를 알아차립니다. 호흡의 모양을 알아차리거나 명칭을 붙이는 것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부풀고 꺼지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은 실재입니다.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도 모양을 알아차리지 않고 발을 들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발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알아차립니다. 서있을 때는 바닥의 단단함이나 부드러움이나 차가움이나 따뜻함을 알아차립니다. 이때 발의 모양은 관념이고 이러한 느낌은 실재입니다.

 

통증을 알아차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증은 관념입니다. 통증의 실재가 마음에서는 싫어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입니다. 통증의 실재가 몸에서는 찌르고, 당기고, 욱신거리고, 화끈거리는 느낌입니다. 이때 이런 현상을 통증이라고 알면 괴롭습니다. 그러나 통증이 가지고 있는 실재하는 성품인 찌르고, 화끈거리는 것을 알아차리면 이런 아픔은 견딜 만합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에 있는 실재하는 현상을 통해서만이 무상, 고, 무아의 법을 알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에 개입하여 대상을 바꾸려고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의 알아차려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알기 위해서 하는 수행입니다. 이렇게 할 때만이 지혜가 나서 괴로움뿐인 고해의 바다를 건너 피안으로 갈 수 있습니다. 개입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개입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로 진행되기 때문에 개입을 한다고 해서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아는 지혜만이 문제의 본질을 알아 번뇌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5. 세간의 법 팔풍(八風)

 

세간은 관념의 세계입니다. 세간에는 세간의 법이 있습니다. 세간은 인간이 살아가는 하나의 질서가 있는 세계입니다. 이것을 세간법이라고 합니다. 세간의 법에는 팔풍(八風)이 있습니다. 팔풍은 세간의 여덟 가지 조건들입니다. 이러한 세간의 법을 바르게 닦아야 출세간의 법으로 가는 길이 열립니다.

 

세간의 여덟 가지 법은 이익과 손실,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입니다. 세간에서는 이 여덟 가지 조건들이 바람처럼 왔다 갔다 합니다. 이 조건들은 마치 시계추처럼 이쪽저쪽으로 끊임없이 왕복을 합니다. 이것이 세간을 사는 사람들의 법입니다. 세간의 여덟 가지 경계에서 흔들림이 없이 알아차릴 때만이 세간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낙천주의자에게는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염세주의자에게는 세상이 고통스럽게 보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아름답지도 괴롭지도 않게 보는 중도적인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게 보입니다. 이것이 좌우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사는 방법입니다. 인간이 세간을 살면서 어떤 시각을 갖느냐 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세간에서도 중도적인 견해를 가져야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게 삽니다.

 

첫째, 이익과 손실입니다. 이익에는 언제나 손실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이익은 없습니다. 이익을 얻게 되면 항상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한 욕망이 생깁니다. 그러면 사물을 바르게 보는 판단력이 흐려져 오히려 손실을 입게 됩니다. 또 이익을 얻으면 자기만족에 빠져 노력을 하지 않게 되어 손실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이익을 얻었을 때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손실은 손실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손실은 없습니다. 손실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손실이 이익을 위한 전단계가 될 수 있습니다. 손실을 입으면 현실을 보는 바른 시각이 생깁니다. 그래서 손실을 통해서 오히려 지혜를 얻습니다.

 

이익을 얻었을 때 자만하지 말고 손실을 입었을 때 괴로워하지 말고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이익과 손실은 양면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항상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익과 손실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알 때 세간의 법에서 출세간의 법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익과 손실은 그 순간의 마음이 경험한 것이지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둘째, 명예와 불명예입니다. 누구나 명예를 원합니다. 그러나 명예는 그냥 얻는 것이 아닙니다. 명예를 얻을만한 바른 노력을 했을 때 명예가 따릅니다. 하지만 명예는 언제나 불명예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명예는 없습니다. 명예를 얻게 되면 항상 더 많은 명예를 얻기 위한 욕망이 생깁니다. 그러면 사물을 바르게 보는 판단력이 흐려져 오히려 불명예를 당합니다. 또 명예를 얻으면 자기만족에 빠져 노력을 하지 않게 되어 불명예를 당합니다. 그래서 명예를 얻었을 때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불명예는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명예는 자기가 한 행위대로 따라 오기 마련입니다. 불명예는 불명예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불명예는 없습니다. 불명예가 불명예로 그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명예가 명예를 위한 전단계가 될 수 있습니다. 불명예를 당하면 현실을 보는 바른 시각이 생깁니다. 그래서 불명예를 통해서 오히려 지혜를 얻습니다.

 

명예를 얻었을 때 자만하지 말고 불명예를 얻었을 때 괴로워하지 말고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명예와 불명예는 양면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항상 알아차려야 합니다. 명예와 불명예가 나의 것이 아니라고 알 때 세간의 법에서 출세간의 법으로 갈 수 있습니다. 명예와 불명예는 그 순간의 마음이 경험한 것이지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셋째, 칭찬과 비난입니다. 칭찬과 비난은 인간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세간의 법입니다. 칭찬을 들었을 때 기분이 좋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칭찬에 취하면 교만해 집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칭찬을 들었을 때 의기양양하지 않습니다. 칭찬에는 아첨이 있기 마련이므로 이런 때는 칭찬에 취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진실한 칭찬에서는 힘을 얻어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지만 가식적인 칭찬에 속으면 자신을 퇴보시킵니다. 진실한 칭찬이면 알아차려서 더욱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첨이 섞인 칭찬이면 알아차려서 단지 소리로 들어야 합니다.

 

비난을 받았을 때 기분이 나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비난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어 오히려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난을 오히려 자기를 향상시키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난을 받았을 때 알아차려서 괴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실한 비난은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상대의 무지로 인한 비난은 단지 소리로 들어야 합니다. 남이 나를 비난할 때 깨진 종처럼 반응하지 않으면 이미 성자에 가까워진 사람입니다.

 

칭찬을 들었을 때 자만하지 말고 비난을 들었을 때 괴로워하지 말고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칭찬으로부터 자유로우면 비난으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칭찬과 비난은 양면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항상 알아차려야 합니다. 칭찬과 비난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알 때 세간의 법에서 출세간의 법으로 갈 수 있습니다. 칭찬과 비난은 그 순간의 마음이 경험한 것이지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넷째, 행복과 불행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자신의 마음이 만듭니다. 행복과 불행은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생긴 느낌입니다. 이 느낌을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느낌은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므로 행복과 불행도 조건에 따라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한순간에 불행이 될 수 있습니다. 불행을 알아차리면 한순간에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자신이 바라던 것을 성취했을 때 오는 만족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바라는 것이 성취되었다고 해서 적당히 멈추지 않습니다.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욕망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오히려 불행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간에는 네 가지의 행복이 있습니다. 누구나 네 가지 행복을 갖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첫째는 소유의 행복입니다. 건강, 재산, 장수, 지위 등을 소유한 행복입니다. 둘째는 이렇게 얻은 것을 누리는 행복입니다. 어리석으면 얻고도 누리지 못합니다. 셋째는 빚에 쪼들리지 않는 행복입니다. 빚이 있으면 감옥에 갇혀있는 노예와 같습니다. 넷째는 비난을 받지 않는 행복입니다. 행실을 바르게 해서 자신이나 남에게 유익한 일을 해야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불행은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상속되어서 내려온 어리석음과 욕망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불행을 겪어야 합니다. 불행의 시작은 행복을 바라는 과도한 마음 때문입니다. 앞서 밝힌 네 가지 행복이 충족되지 못해서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과 불행은 항상 함께 있으면서 조건에 따라 나타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한순간에 일어나서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이러한 행복과 불행은 나의 느낌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관념으로 보면 나의 느낌이지만 실재하는 현상으로 보면 단지 순간의 마음이 경험하는 느낌일 뿐입니다. 느낌은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무상하고 괴로움입니다. 이런 행복과 불행이 자기 의지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무아입니다. 그래서 행복과 불행을 있는 그대로 보면 모두 법입니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행복한 느낌과 불행한 느낌을 알아차리면 단지 느낌이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나의 느낌이 됩니다. 나의 느낌이 아닌 것을 나의 느낌으로 알거나, 한순간의 느낌을 계속되는 느낌으로 알면 느낌의 노예가 되어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행복할 때 자만하지 말고 불행할 때 괴로워하지 말고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행복할 때 자유로우면 불행할 때도 자유롭습니다. 행복과 비난은 양면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항상 알아차려야 합니다. 행복과 불행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알 때 세간의 법에서 출세간의 법으로 갈 수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그 순간의 마음이 경험한 것이지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6. 출세간의 법 팔정도(八正道)

 

출세간은 실재의 세계입니다. 출세간에는 출세간의 법이 있습니다. 출세간은 인간이 윤회하는 연기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질서가 있는 세계입니다. 이것을 출세간의 법이라고 합니다. 출세간의 법에는 팔정도가 있습니다. 팔정도는 여덟 가지 바르게 살아가는 조건들입니다. 이러한 출세간의 조건들에 의해서만이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팔정도는 고집멸도 사성제 중에서 도성제에 해당하며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러한 도성제에 의해 열반에 이르는 멸성제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지고의 행복인 열반에 이르는 길은 오직 이 길 하나입니다. 팔정도는 지성을 나약하게 하거나 도덕적 품성을 퇴보시키는 양극단에서 벗어나게 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 길을 중도라고 하며 계정혜(戒定慧)라고도 합니다. 팔정도를 실천하는 방법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팔정도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입니다. 이상의 팔정도를 계정혜라고 하는데 계율을 지키는 계에는 정어, 정업, 정명이 있습니다. 고요한 마음의 집중을 뜻하는 정에는 정정진. 정념, 정정이 있습니다. 지혜를 뜻하는 혜에는 정견, 정사유가 있습니다.

 

팔정도의 정(正)을 빨리어로 삼마(samma)라고 하는데 바르다는 뜻과 함께 적절하게, 정확하게, 철저하게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 분명하게 말하면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이 있는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른 것은 알아차림이 있을 때 분명하게 확립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팔정도는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으로 시작할 뿐만 아니라 여덟 가지가 모두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또 팔정도의 정념(正念)은 위빠사나 수행의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정(正定) 중에서 찰나집중은 위빠사나 수행의 집중입니다. 그러므로 팔정도를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합니다.

 

첫째, 정견(正見)입니다. 정견은 바른 견해입니다. 바른 견해는 지혜를 말합니다. 바른 견해는 고집멸도 사성제를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인간이 정신과 물질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괴로움이 있다는 진리와,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이라는 진리와, 괴로움은 소멸될 수 있다는 진리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팔정도라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최고의 지혜입니다. 정견은 팔정도를 이끄는 가장 수승한 덕목입니다.

 

둘째, 정사유(正思惟)입니다. 정사유는 바른 사유를 뜻하지만 빨리어의 정확한 뜻은 바른 의지, 또는 결심을 말합니다. 바른 의지는 지혜로써 잘못된 관념을 제거하게 합니다. 그래서 지혜에 속합니다. 정사유의 또 다른 의미는 바른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는 행위입니다.

 

정사유는 세 개의 범주로 구분하는데 이욕, 무진, 무해입니다. 이욕(離慾)은 세속적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을 갖는 결심입니다. 무진(無瞋)은 미움과 성냄을 버리고 자애를 갖는 결심입니다. 무해(無害)는 잔인함을 버리고 동정심을 갖거나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는 결심입니다.

 

이상의 정견, 정사유 두 가지는 팔정도의 계정혜 중에서 혜(慧)에 속합니다. 지혜는 어리석음을 끊는 역할을 합니다.

 

셋째, 정어(正語)입니다. 정어는 바른 말입니다. 정어는 앞서서 이끄는 정견과 정사유에 의해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정어는 거짓말, 비방, 거친 말, 경솔한 말을 삼가는 것입니다. 삼가는 것은 절제하는 것으로 계율을 뜻하는 말입니다.

 

넷째, 정업(正業)입니다. 정업은 바른 행위입니다. 정업은 살생을 삼가는 것과,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는 것과,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입니다.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는 것은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행위를 말합니다.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은 부적절한 남녀의 관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째, 정명(正命)입니다. 정명은 바른 직업입니다. 정명은 바른 생계수단을 갖는 것으로 무기, 인간, 고기, 짐승도살, 알코올 및 유독물질 거래를 삼가는 것입니다.

 

이상의 정어, 정업, 정명 세 가지는 팔정도의 계정혜 중에서 계(戒)에 속합니다. 계율은 절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막아서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여섯째, 정정진(正精進)입니다. 정정진은 바른 노력입니다. 정정진은 일어나지 않은 악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일어난 악한 마음을 사라지게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나지 않은 선한 마음은 일어나도록 노력하고, 일어난 선한 마음은 더욱 커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정념(正念)입니다. 정념은 바른 알아차림입니다. 바른 알아차림은 몸, 느낌, 마음, 법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인 사념처입니다. 팔정도가 위빠사나 수행이므로 바르게 알아차릴 대상도 역시 위빠사나 수행의 네 가지 대상입니다.

 

여덟째, 정정(正定)입니다. 정정은 바른 집중입니다. 바른 집중은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집중에는 근접집중, 근본집중, 찰나집중이란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근접집중과 근본집중은 사마타 수행의 집중이고, 찰나집중은 위빠사나 수행의 집중입니다. 집중은 알아차림의 지속으로 이루어집니다. 집중은 고요한 마음의 집중을 의미하는데 마음이 대상에 오래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노력과 알아차림이 지속되면 집중이 되고 찰나집중을 하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어 지혜가 열립니다.

 

이상의 정정진, 정념, 정정 세 가지는 팔정도의 계정혜 중에서 정(定)에 속합니다. 정 중에서 찰나집중은 지혜를 얻게 하는 중요한 덕목입니다.

 

이상이 깨달음으로 가는 출세간의 여덟 가지 바른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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