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은 알아차림 하나면 됩니다
< 질문 >
관심 가는 몇 개의 글을 읽으면서 선생님은(누구인지는 전혀 모름) 정말로 깨달은 자라는 것을 단박에 알게 되었습니다. 대략 20여 년 전에 처음으로 불교를 접했고 그 후 위빠사나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관심이 있어 조금씩 스스로 명상을 했었으며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대략 7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기복이 조금은 있지만...)
많은 종교와 철학서적, 자기계발서, 다양한 정신세계를 접했으며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의문점들이 풀리면서 관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리고, 걸을 때는 내가 걷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고, 주변의 소리도 알아차리고, 어쩔 때는 내가 내는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하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덕스러운 생각과 느낌 감정들도 알아차리고, 집중을 하고자 하지만 정신 줄을 간헐적으로 놓치는 것을 보게 되고, 결국 일상의 생활이 잡았다 놓쳤다, 의 연속임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계속하다 보면 잡았다 놓쳤다 하는 순간이 사라지는지요? 사라지는 순간이 온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에 몇 시간 정도 정신 줄을 유지해야 하는지요?
그리고 살다보면 어떤 것을 결정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며 혹은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마음이 가는대로 그냥 내버려 두고 물끄러미 바라봐야 합니까? 결국 선택이라는 것은 이익형량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려 좋다, 라고 생각하는 대로 행하는 것인데 선택은 알아차림의 대상이 아니라 알아차림을 하는 주체의 행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주체가 무엇입니까? 대상이 있고 알아차림만이 있을 때 무아라 하셨는데 대상이 있고 알아차림만 있다면 의미 없음이 되고 대상이 있고 알아차림이 있고 거기에 주체성(창조성을 발휘하는 정신 이상의 것)이 있어야 의미 있음이 된다고 믿습니다.
수동적인 의미 없음의 세상보다 능동적인 의미 있음의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이러한 욕망마저 망념이라고 치부하지 마시고 저에게 맥점을 하나 짚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답변 >
알아차림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확신에 찬 믿음과 적절한 노력과 알맞은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경전을 읽거나 법문을 듣고 직접 수행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하루에 몇 시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알아차리는 힘이 있는 만큼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림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크게 나누면 좌선과 경행과 일상의 알아차림으로 구분합니다. 그래서 행주좌와를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팔만사천 법문이 모두 알아차리고 알아차림을 지속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능동적인 것을 원한다면 고요함을 얻는 사마타 수행을 하십시오. 그러나 지혜를 얻고 싶다면 수동적인 위빠사나 수행을 하십시오. 사실 위빠사나 수행도 능동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기 때문에 수동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이런 표현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대상에 개입해서 알아차리는 것은 사마타 수행이고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수행자는 상황에 따라서 두 가지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아니면 때에 따라서 한 가지 방법만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특별한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에 의한 것이고, 오온이 있어서 하는 것입니다. 주체라고 하면 변하지 않은 어떤 실체를 말하거나 모든 것을 주관하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현재 자신의 견해를 확신하지 마십시오. 수행을 계속하면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정신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침표를 찍지 말고 마음을 열고 계속해서 정진하십시오.
특별한 맥점은 없습니다. 수행은 알아차림 하나면 됩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을 강화하기 위해서 믿음과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과 지혜가 함께 해야 합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근기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바른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은 비밀이 없습니다. 법은 이미 와서 보라고 항상 드러나 있는데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