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심법
사소하게는 의식만이 현현하는 그 깨어있음 입니다.
깨어 있는 것이 크게 두 가지로 본다면 하나는 태양처럼 온 누리에 비치는 광휘 같은 것이고 또 하나는 상황 파악하는 지혜의 현명함이나 심층의식의 흐름을 아는 것들을 말하는 것이 있는데 다른 글들에서 이론적인 천착을 하고 법계현시는 광휘의 깨어 있음을 주로 뜻하는 의미고 심층의 보는 것은 관심법인데 거기에 실행까지 하는 것을 현심법이라고 하며 이걸 써볼까 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멈추고 그저 의식만이 있는 것에 익숙하면 이 의식을 변형시키게 됩니다. 내적인 방향으로 해서 고요히 있거나 외부로 발산하는 듯 확대하거나 주위전체로 넓게 퍼트리거나 또는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고 흘러 다니기도 합니다. 그냥 의식만의 이런 저런 변형으로 결코 생각하지도 뭘 느끼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러한 의식만의 활동을 알게 되면 사후에 천원계나 어떤 차원에서나 공간에서도 존재하는 방식을 이해하게 됩니다.
황홀하게 말하면 법계, 또는 정토에 사는 것입니다. 극락정토가 죽어서 가거나 다른 차원이나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이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이, 여기가, 이렇게, 우린 정토에 있습니다. 진여의 세계에 사는 것이지요.
글이 불교를 많이 인용해서 설명하는데 이런 정도의 수준을 보이는 법이 딱히 없어요. 내가 별로 다른 수도법을 보지를 못해서 그럴 수도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도장이나 단체에서는 당연히 이런 것을 가르치지 않는 듯 하구요. 차이나의 도교 수련서는 서점에 있는 것을 본 게 다인데 거기에도 나타나지 않아 보이구요. 유교에선 양명학 같은 심학이 비슷한데 이 얼음법의 과정은 없는 거 같고 실천적인 일상에서의 사건들에 더 집중하는 것 같구요. 불교의 선종 같은 것에 비슷할 거 같습니다. 도교에서도 분명 있을 거 같긴 한데 도장경을 다 볼 수 없는 것이라 확인 할 수는 없습니다.
유교적으로 말하면 태극의 분화되는 그 간극을 열어 태극이전의 무극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 되겠죠. 이러면 태극과 무극을 시간의 선후관계로 보는 것 같은데 우리 마음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 되어 음에서 양이 되거나 정이 동으로 되면서 변화하는 것을 말하는데 음이 양으로 넘어가는 그 틈을 잡고 지니는 것이며 정에서 동으로 가는 그 간극에서 자신을 위치시키고 잡는 것입니다. 즉 음과 양 사이, 정과 동 사이죠. 중용의 이발미발이 됩니다. 이발이 동이면 미발은 정이죠. 이렇게 둘 사이의 공극을 찾아 잡는 것입니다.
천태학의 화법4교 중에 원圓교의 수자의隨自意삼매나 각의覺意삼매와 비슷한데 거기선 4운심을 말합니다. 대충 해석하면 미발과 욕발과 발과 이발로 더 세분되어 있는데(발하기 전과 발하고 싶은 것과 발하고 있는 것과 발한 것, 미념, 욕념, 념, 이념) 이런 것은 이 얼음법에서 더 나아가 현실 상황에 대처하는 자신의 심층을 보는 것으로 두 가지를 다른 공부법으로 분리해서 써야 할 정도로 불교에선 개념차이를 드러내는 심화된 수행이지만 유교에선 별다른 구분이 안 되는 거 같기도 합니다. 유교에서 이런 것을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면 불교를 흉내 내거나 차용한 거 같기도 하는데 그런 건 자세하게 말 못하겠습니다.
난 수행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지 비교분석을 하는 것은 잘 못하니까요. 즉 중용의 경우는 실생활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 같고 얼음법이나 관심법문은 그 전단계로 마음으로 도의 경지를 획득하는 방법을 먼저 공부 한다는 의미도 되겠죠. 더 친절한 수행과정이라고 봅니다.
마음에 물이 있어야 그것이 물로서 비로소 존재한다는 것이 있는데 이렇듯 본성에 이치가 있거나 여래가 있거나 이미 갖추어진 것으로 뭐가 다 된 듯한 것처럼 하는 여러 학설들은 이론으로만 치닫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의 흐름을 보는 것은 단순히 마음이 부처이거나 이미 우리 마음에 선善이 있거나 덕성이 갖추어져 있거나 무극이라거나 하는 식의 것이 아닌 마음의 흐름에 따른 다양한 내적인 상황을 보아야 하고 그때마다 다른 감정이 또는 마음이 있는 것이며 외부적으로도 어떤 사물이 오고 내가 그 사물과 대상에 어떠한 마음자세로 대하느냐에 따라 그 사물이나 대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나아가 얼마나 존재로서 대상화나 사물화 되는지의 정도나 농도 역시 다르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에 있어야 물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얼마나 있는가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내재적인 본체관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발현상태에서만 우린 부처이고 하늘이라는 것입니다.
내재가 곧 발현이기도 합니다. 안에 있다면 그건 드러날 것이며 드러나지 않는다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늘이나 무극이나 도가 여래가 있다면 그것이 드러날 것이며 드러난 그것을 보고 도행이고 보살행이고 하늘행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아닌 있기만 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이 수행법입니다. 드러내기 위한 발심이 얼음법이며 드러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현심법입니다. 오연과 파연적인 설명입니다.
다시 말해 본체개념이 우리에게 함양된 것인 양 한다고 될 것이 아니라 실재의 실천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발현하고 증거를 보이느냐의 실재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개는 마음의 흐름에 주목합니다. 천태학의 4운심이나 중용의 이발미발이나 심층의 다양한 성찰과 자기관찰을 말하는 것이 이러한 것을 하는 것이고 넓게는 내관이나 좌선이나 자아실현이나 회광반조나 어떠한 공부나 도의 방법도 이것이 목적이 됩니다.
즉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안다는 건 지금 마음이 어떠한 상태이고 어디로 흘러가고 어디서 흘러온 것이며 어떻게 끝날 것인지 그러한 것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자신에게나 외부의 사람이나, 사물에게나, 세상에게 대하는 자세와 태도이며 이건 시시때때로 변하고 외부의 조건과 신체의 여러 생리활동들로 인해 수시로 변화하는 것으로 이걸 점검하고 이해해 가면서 살아가는 그 자기 돌봄이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그 감정들이나 자천의 경지에 따른 알게 되고 보이게 되는 자기의 심층의 흐름들에 관심 가지고 그런 심층의 원인이나 결과를 시간을 거슬러가고 공간을 넘어가서 다양한 각도에서 파악하고 이해하면서 사건과 상황에 따른 판단을 현명하게 하며 더 나아가 뜻과 의지를 세운 그것을 위한 심층의 작용을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시작은 감정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부터 하고 어떤 감정에 어떤 행동으로 반응하게 되는지 자기행위를 살피며 그렇게 감정과 감정에 따른 행위를 보면서 자신을 더 나은 감정과 행위를 하는 사람으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이게 심층을 보는 것이지만 심층을 보기만하는 불교적인 것이 아니고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그것을 정해가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덕행을 행하기 위한 심층을 봐야 합니다. 즉 단순한 감정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루고자 하는 서원이나 뜻에 맞는 감정으로 변화해야 하고 행동으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아니라 부처로서 살아가기 위한 지금 현실의 행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이 아니라 우리가 하늘로서 지금 할 것을 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러기 위한 자기 돌봄이고 세상에 대한 또는 나에 대한 나의 다그침입니다. 이러면 현심법에서 실현법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현심법은 관심법이 자기를 보는 것을 한순간의 각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매순간 해야 하는 의미를 말합니다. 실현법은 뜻을 이루기 위한 행위를 말하구요.
이 현심법은 선종에서 좌선도 하지 않고 즉심시불이며 수행도 안하고 불립문자이며 견성성불이며 하는 그것인데 이걸 하기는 결코 어렵습니다. 단경에서도 상근기를 위한 것이라고 하니 별거 아닌 듯한, 이걸 하기는 의외로 어렵죠. 견성성불이라는데 견성이 자기의 심층을 보는 것이고 한번 보는 것이 아닌 항상 보면서 살아가는 그 무애행을 말하는 거겠죠. 지금 바로 부처가 된다는 게 부처되어서 끝나는 게 하니라 지금 바로 부처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진행형이겠구요. 항상 진행형이기만 해서 부처되어서 끝난 게 아니라 매순간 부처로 있기 위해 부단한 애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수행법입니다. 결과가 없습니다. 증득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오히려 증득된다고 할 수 있구요. 끝나지 않는 그 애씀이 있는 것이고 영구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득도 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건 득도가 이루어지는 뭔가가 있을 거라는 잘못된 인식이 있는 거겠죠.
성불이나 열반이나 멸진정으로 궁극을 동경하는 자기 마음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 봐야 한다는 것이 관심법입니다. 자기의 성불과 안빈낙도와 행복과 이룸과 성취만을 보려는 그 이기적임을 봐야 하고 자기의 마음이 이러한 고정된 허구를 쫓고 있으면서 그걸 모르고 있음을 봐야 하는 것이고 왜 내가 이런 불안함과 불안정을 두려워하고 아무것도 아님이나 허무나 무의미나 가벼움을 못 견디거나 싫어하는지를 알아야 하며 허영과 교만으로 권력욕과 지식욕으로 우월감을 가지려는 것을 봐야 하며 이런 다양한 욕구들을 봐야 하는 것이 마음을 보는 것이며 그것이 지금 그 자리에서 부처로서 하늘로서 무극으로서 살아가는 그 모습입니다. 심층을 보는 건 관심이지만 언제나 봐야 해서 현심법입니다.
돈頓이 되겠죠. 이게 일종의 돈오돈수가 됩니다. 깨우침은 언제나 알아채야 하는 마음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돈 돈 돈....... 내 마음을 보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끝나지 않으며 그러니 그 연속적인 돈의 이어짐도 끝나지 않겠죠. 인간의 지각능력상 불연속의 연속이지만요. 의식이 쭉 직선으로 이어지진 못하죠. 흐트러지고 혼미해지고 다시 정신 차리고를 반복하면서 그럴듯하게 이어가는 것이겠죠. 돈이니 마음은 행동으로 가야 하는 것이구요.
자기의식의 자연스러운, 들고 나고 집중되고 흐트러지고 잡념 일어나고 무심해지고 이런 주기적이고 율동적인 번뇌의 나고 사라짐이나 감정의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그에 맞게 자기를 알고 살피며 이해해가는 것입니다. 즉 지금 여기에서 자기 마음의 흐름을 자각하고 있는 그것을 말합니다. 돈 뿐이며 영원히 돈이겠죠.
그래야 좌선의 압박과 수도나 수행이나 호흡이나 호수나 기타 다양한 수련법의 방황과 그걸 해야 뭔가 한 거 같은 아쉬움을 견디겠죠. 이걸 견디는 게 얼음법이고 일상에서 자기의 마음을 본다면 관심법이며 관심법으로 사니 현심법입니다.
선종의 어려운 법이나 양명의 심학이나 이런 것으로 말하기엔 나도 잘 모르겠구요. 그저 사건마다 얼마나 성실하게 임하느냐는 것이며 그로 인한 내적 충실과 외적 바른 행위가 됩니다. 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성으로 행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체만 여기 있고 손만 일하고 움직이기만 하고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이런 불성실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실현법으로 성실하게 행하되 의롭고 자기의 뜻을 위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미를 주고 거룩해지고 싶다면 그런 행위로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간단한 것이죠.
물론 난 이렇게 마음이 지금 여기에만 집중되어야만 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마음의 크기도 광대해지는 거라서 이 순간에 모든 마음을 둘 수 없기도 합니다. 물론 화엄식으로 이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되면서도 안 되는 것이 있어서 차별이 있습니다. 겨자씨에 수미산을 넣는다고 하지만 자천인의 작은 각성도 넣지 못합니다. 겨자씨에 넣기 위해선 겨자씨가 변해야 합니다. 그래서 겨자씨 아닌 겨자씨가 되어야죠.
시공의 크기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게 뭐든 된다는 것으로만 말한 것이고 안 되는 부분은 말하지 않은 것인데 그건 이미 깨우친 다음의 일이라 말할 필요가 없어서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하지만 거긴 방법이 있는 거지 그걸 생략하고 다 된다는 식의 말은 간략하게 한 게 아니라 의미의 변화로 다른 것이 됨을 모르는 것도 됩니다.지금 이 시공간에 내 모든 게 포함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시공이 마음에 포함되는 겁니다.
이 지금 여기에 들어오지 못하고 포함시키지 못한 것을 되찾고 다시 이루며(과거에 이룬 경지가 있는 경우)아니면 창조시키고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 자천입니다. 부처로 예를 들면 석가모니로 태어날 때 원래의 깨친 정도가 훨 크지만 석가모니로 태어나기 위해선 대개의 깨침은 버립니다. 또 버리는 것도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쓰레기통에 버리듯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그래야 태어날 수 있습니다.
다시 석가모니가 자기의 본래를 깨달아 가지만 이 생애의 한계 내에서 이며 본래의 자신으로 전부 돌아가지는 못합니다. 이건 이세상의 한계 내에서의 것이라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문제입니다. 필요한 만큼 그만큼의 모습일 뿐입니다. 석가모니에게 절대성을 부여하려는 것은 이후의 종교적인 현상이지 본래는 아닌 거죠. 한 생애가 안배라서 그만큼의 존재입니다. 우린 부처의 본래를 볼 수 없습니다. 그의 시공간이나 차원에 도달하지 못하니 항상 보여주는 그만큼인거죠. 그래서 난 부처를 모릅니다. 언제나 모를 것입니다. 항상 내 한계만큼만 알 것이니까요. 어떻게 부분에, 하나에, 전체가 또는 모든 게 들어가겠어요. 이런 말은 어떤 의미에서의 말인지 그 의도가 다른 것이죠.
세상의 수련법은 실현법 정도에서 끝납니다. 이 이상을 말하는 곳은 없는 거죠. 자비죠. 실현법의 궁극은 본의입니다. 난 여기에 삶의 안배도 해야 하고 또 뜻에 따른 마구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안배가 있어서 지금에 얼마의 마음을 두고 미래에 얼마, 어느 정도의 미래에 얼마 식으로 또 공간도 안배하는 것도 자천이거든요. 하지만 이건 정도의 이해 즉, 어느 정도, 얼마나의 그러한 존재의 농도를 알아야 합니다. 농도법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 자천의 이름이요. 이건 자비행의 좀 더 광활한 확장이고 자세한 법인데 이걸 가르치진 않더군요.
불교는 불교적인 색채로 다른 듯한 가르침이 있을 것이며 유교 역시 그 독특함도 있을 거지만 기본은 이러한 현재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행위 해야 하는지 그걸 위해 마음을 어떻게 다룰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다루는 시발점이 현심법이며 이것은 정체성으로 이어져가야 합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요?
정체성이란?내가 사회에서나 이 세계에서의 가치와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고 그 과정이고 이러한 것이 자천이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