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뢰야식
원효의 대승기신론에서 일심이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으로 나누어지고, 심생멸문에서 아뢰야식이 있는데 이 아뢰야식이 각의와 불각의로 나뉜다고 합니다. 아뢰야식을 진여에 두지 않고 생멸문에 두면서 아뢰야식이 진망화합식이라는 것입니다. 아뢰야식에 청정한 것과 오염된 것이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진여가 따로 있고 다시 생멸에 각의와 불각의가 같이 있다고 하는 건 별로 안 좋아 보입니다.
중생이 번뇌에서 다시 진여로 돌아갈 근거가 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차라리 아뢰야식에 각의와 불각의가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각의이고 어느 정도 불각의인 하나의 마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상태를 굳이 각의냐 불각의냐 하면서 규정짓는데, 각의의 청정한 것이 없으면 안 된다는 여래장의 집착으로도 보입니다.
이 여래장이 없으면 청정해지는 근거가 없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여래가 여래가 된다는 영원한 돌고 돔이 있어야 한다는 게 별로입니다. 그런 순환은 허무하지 않나요? 원래 애초에 우린 청정했고 그래서 청정해진다는 식의 순환은 악순환 아닌가요? 진여 역시 완전한 청정도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대전제로서 진여를 세워두어야 할 이유도 없고 그런 형이상학 같은 것이 있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진여와 생멸이 나누어진다고 하지만 애초부터 어느 정도의 진여와 어느 정도의 생멸인 하나의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진여와 생멸이 따로라고 안 해도 됩니다. 다만 수행에 따라 좀 더 진여에 가까운 마음으로 변하는 것이고 진여인 부분이 좀 더 강화된다고 하거나 입니다.
마음을 나누면 진여와 생멸이 구분은 할 수 있으나 애초에 분리는 아니며 이건 물이 깊으면 윗물과 아랫물로 나누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자천이 어느 정도 된 사람의 경우이고 일반인은 아직 진여를 논할 단계는 아닙니다. 원효의 설명처럼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으로 나누는 것이 일리가 있기도 합니다. 자천이 진행되면 저렇게 나뉘어져 있다고 느끼기도 하니까요. 수평적으로 마음을 나열해서 보면 심생멸과 심진여가 병렬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수직이나 직렬로 보면 어느 정도 진여심이라고 하든가 어느 정도 생멸심이라고 하면서 생멸심이 줄어드는 것처럼 말하거나 진여에 가까워진다고 하던가 해도 됩니다. 다각적인 시각에서 이해해도 되는데 다만 이건 느껴보아야 하는 것이지 원효처럼 이론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자천의 본래는 아닐 겁니다.
그래서 일반의 경우 진여와 생멸이 있는데 수행하면 진여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생멸만 있는데 생멸이 조금 청정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이 아까보다 조금은 맑아진 것인데 탁한 입장에서 말하면 맑아진 거고 맑은 입장에서 말하면 아직은 더 맑아져야 하고 이런 입장 차이일 뿐인데 어떤 기준에서 평가할지가 말의 다름이 됩니다.
진여 기준에서인지 생멸 기준에서인지가 있으며 진여는 자신이 또는 남이 굳이 이 정도는 되어야 진여가 아닐까? 하는 추측으로 또는 대개는 진여는 완벽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런 사고가 잘못이기도 합니다. 진여를 모르면서 진여 입장에서 더 맑아져야 한다는 건 오류입니다. 그래서 진여를 말할 땐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알지 못하면서 유추하고 문서적인 근거로 말하는 건 학자들이나 하는 것이고 정말 수행하는 상황에선 그렇게 하면 허상을 쫓게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발하기 전엔 딱히 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발하지 않아서 뭐라 말하기 어렵죠.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정이 발해야 발하기 전을 거슬러 유추한다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고 다른 방법도 분명 있습니다.) 암튼 이것이 진여는 아닙니다. 어떤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다가 발하여서 욕구가 되어 감정이 일어나면 이건 그동안 우리가 느끼던 방식대로 태생 이래로 혹은 이생의 태어남 이후로 길들여지고 습관이 된 익숙해진 감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감정이 10개인지 20개인지 모르지만 그중에 자주 느끼던 어떤 감정으로 우린 느끼게 됩니다. 감정이 100개, 천개, 만개 이상도 가능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린 몇 가지의 감정으로만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의 인식 안으로 들어오면 감정은 우리가 아는 어떤 것으로 변환되어 해석 되어져야만 우린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인지할 수 있는 감정의 숫자도 사람마다 다르고 그 시대의 문명이나 사회마다 다른데, 익숙해지고 연습하고 구분한 만큼 가짓수를 가진다고 봅니다. 과거엔 희노애락애오욕이라고 했는데 7개죠. 그 외 뭐라고 하던가요? 이건 유교적인 마음구분인데 유교는 이 7개의 감정 외엔 모르는 것이 됩니다. 야리꾸리하거나 허망하거나 놀라움 같은 거나 무수한 감정은 모르죠. 말이 없으면 감정도 없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얼마나 말로 표현하느냐가 감정의 가짓수이니까요. 하지만 이건 거꾸로 아닌가요? 감정이 먼저인데 말은 그 후에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인데 말이 감정을 만들고 제어하는 것이 되니 이상한 현상이죠. 그렇게 대개는 이때 진여는 느끼지 못하고 생멸만 느끼는 게 보통의 사람들이고 이때도 진여를 같이 느끼는 게 자천해서 획득한 진여가 됩니다. 진여가 생성된 것이지 애초에 있는 걸 느끼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진여 쪽에서 생멸을 보고 생멸 쪽에서 진여를 보는 것을 맘대로 하는 것은 고단자가 하는 것이며 이렇게까지 해야 정말 공부 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여는 완벽한 무엇이 아니라 어느 정도 생멸심에서 벗어나 가라앉아 있거나 포용하고 있거나 중심을 잡고 있거나 하는 구분되어진 마음입니다.
마음이 머리로 가서 언어로 변환되어지면 사고 작용이 됩니다. 이러면 좀 더 명확하게 분석되고 선명한 인식이 되어 우리의 행동으로, 말로, 논리로 나옵니다.
이렇게 저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차츰 올라오며 감정이 되고 사고 작용이 되어 오는 마음이 있으며 이러한 것을 성찰 할 수 있는 자천력이 있어야 합니다.이때 역시 자기 관찰력이나 성찰이 있으면 자기관조가 되지만 대개는 습관적인 사고체계이고, 관찰을 한다고 해도 역시나 억지로 하는 것일 뿐 정말 내관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진여나 생멸이나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의 마음인데 그리고 진여도 진여라기보다 좀 더 청정하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하나란 전체적으로 말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하나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마음이 일어나고 느끼고 사고 작용하며 다시 사라지는 이러한 반복을 하는데 자천해서 경지 이룸이 되면 나오기 전이나 나올 때 진여의 부분이 항상 함께 하지만 일반사람은 진여의 부분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일어나기 전은 인지할 수 없어서 진여도 생멸도 아닌 거지 청정하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도 인지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뢰야식이나 일심이나 이러한 것으로 마지막 형이상학으로 생각하지만 그것보다 더 깊고 광활한 마음이 또 있습니다. 이런 것을 추구해 가는 것이 주(도)의 상달함이 됩니다. 애초에 일심이면서 끝까지 일심입니다. 하나의 마음을 이문으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지 진여심 따로 생멸심 따로는 아닙니다. 또 물로 설명하면 물이 깊고 넓으면 하나를 여러 개로 나누어서 쓰거나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움직이는 물과 고요한 물, 더러운 물, 깨끗한 물, 깊은 물, 옅은 물, 물속에 또 물, 물 밖에 물 다양하게 합니다.진여는 우리와 함께 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바로 앞의 이정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수평적으론 우리의 일부분으로 나의 중의가 되어 있으며 또 수직으로 앞으로 인도하는 욕망으로서의 마음이기도 합니다.원효의 일심은 진여와 생멸이 융화한 것인데 이럴 때 진여를 알기 전에 이 일심을 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아우라가 다르지 않나요?
설악산 대청봉에서 아침 일출을 보며 감동에 젖어 흥분하고 충격을 몸으로 직접 겪다가 사진을 찍어서 집에 돌아와 본다면 뭔가 빠진듯 하고 그때 느끼던 흥분보다 못한 허전함이 있게 되는데 이게 아우라 아니던가요? 즉 아우라가 다르거나 없다는 것입니다. 직접 뭔가를 체험하지 않고서 그것을 안다고 하거나 그것에 대해 논한다는 건 거짓이거나 전혀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거나 최소한 아우라가 다른 것입니다.
내가 동경하는 연예인을 티비로 보는 것하고 직접 만나서 접하는 것하고의 차이랄까요? ^^
암튼 일심은 진여와 연관해서 이해하거나 체득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여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말해야 소용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