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 공부에 대한 견해
내가 어쩌다 사주라는 것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것이 자천에 도움되느냐 하는 것은 도움되게 하면 도움되고 안되게 하면 안되는 것이지 꼭 이런 것이 자천에 필수인 것은 아니다. 그건 자천법도 같아서 그것이 자천을 전문적으로 하기 위한 방법이라서 도움되는 것이 아니라 자천이 되게 해서 자천법이다. 오직 자천을 위한 그런 방법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되고 안되고는 당사자가 하기 나름이라는 이것이 우선 자천의 시작이고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어릴때 동양철학이라고 사서삼경 같은 것을 배우기도 하고 다른 동양적인 고전들도 보려고 했다.그러면서 사주 같은 것을 하고 싶었는데 이것을 이해못하고 동양학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했다. 이것도 저것도 다 동양학인데 동양학이란 과거의 분들이 이루어낸 학문인데 그중에 이건 되고 저건 안되고 식으로 가르는 그 기준이 애매하고 천하게 보거나 낮추어서 보는 것이 나에겐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라서 애초부터 거부감은 없었고 알고 싶은 학문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지금의 동양학을 하는 강단에서 무시하기도 하지만 무시하려면 알고서 해야 해서 나도 사주를 배우고 그 지식을 얻은 후에 그것을 버리든 비판적이든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고 그런 확실한 견해를 가지기 위해서 알고 싶었다.
사주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기는 하다. 그런데 사주를 알고 비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도 비판하기 위해서 공부하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비판을 하는 그 근거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고 일반인이 그런식으로 하는 것은 그들이 학문이라는 근처를 안가서 그러니 할말이 없는데 자천하고 공부하는 사람이 그런식으로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뭔가를 비판하고 의견을 말하기 위해선 얼마나 공부해서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하는지 알긴 하는가
얼마나 공부해야 안다하는가 적어도 그 학문에 대해서 자유로움을 느껴야 한다.
자천에서 자천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앉는거 손모양 발모양식으로 자세를 말한다. 그런데 난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내가 그 자세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움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그자세에 충실하며 오랜 세월을 견디어 왔는지 아는가
뭔가에서 자신있게 의견을 내기 위해 견뎌온 세월이 있는 것이다. 지금도 사주에 대해서 자신있게 말하기 위해 자유를 얻는 경지를 가려고 한다. 그정도는 가고 뭐라 말할 자격이 있다고 난 본다. 누구나 뭔가에 대해서 나름의 의견을 내는 것은 본다. 그리고 그 의견이 천박하다는 것도 본다. 어느 학문이든 깊이가 있다는 것을 아는데 그건 내가 이룬 어떤 한 분야에서 이룬 깊이가 있어서이다. 내가 깊이를 이룬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다른 학문도 그럴 것이다. 그런 깊이를 이루지 못하면서 그 학문에 뭔가의 의견을 내는 엉성함은 알 수 있다.
처음에 블로그로 시작해서 자천을 알리고 있을 때 이런 사주나 풍수나 그런 공부를 하는 것에 난 반대 했었다.이유는 일종의 어려운 말로 완물상지라고 하면서 뜻의 분산을 우려했던 것이다.그런데 지금와서 이런 것을 내가 하는 이상한 일이 있기도 하다.그 당시에도 난 여기서 이런말 저기서 저런말을 하면서 수미일관되지 못한 언행을 한다고 말하기도 했고 말의 앞뒤가 다르다고 미리 언질해 놓기도 했었다.이유는 간단한데 대개 그 내적인 원리나 진의를 파악하려고 하기보다 말의 단어 의미나 간단하고 쉽게 판단하고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성급함이 만연되었고 일반적인 사정이라서 그랬다.
자천을 하려는 것에 자천이외의 것을 한다고 하면 그다지 말릴 상황은 아니다.
한다 하는 것에 뭐라 할 것도 아니고 자기의 판단으로 사는 것이 자천이기도 해서 도의 의미에 어긋나니 그렇다.
그런데 정말 자천을 하려하는가에서 자천을 하는 과정에서 의지를 얼마나 강하게 내고 일관성 있게 해 가는가를 보면 말려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건 의지를 내는 방법을 몰라 해서 그랬다. 의지를 내는 것을 해본적이 없고 배운적도 없고 해야 한다고도 못들은 것이라서 의지를 내는 것을 우선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것을 함께 하든 말든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 자천은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내는 것을 아는 것이고 그로인해 자기를 다루고 세계를 이해하며 나아가 세계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하는 것이라서 그렇다.
다른 면을 보여주고 다른 의견을 보여주고 다른 방향에서의 관점이 있다는 것도 있고 이미 정해진 사고유형에 금을 가게 하고 해체하고 다른 사고와 다른 세계와 다른식의 행동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앞뒤 다르고 여기말 저기말 다르고 이상한 듯한 말들을 많이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의 사고하는 방식에 충격을 주고 방향을 정하게 하고 싶지만 역시나 이런 것만 하다가 끝나기는 한다. 이것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대개는 말려야 한다. 그다지 의지 내는 것에 잘 하지도 못할 뿐더러 헷갈려 하기도 한다.어떤 것이 자천이고 자천하는 것이고 자천에 대한 의지이고 그런 것을 알기 어려워해서이다.자천이 명확하지 않는 상황에서 다른 것도 함께 하기엔 너무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라서 못하게 했다.하나라도 집중적으로 해보고 거기서 뭔가 성취가 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천에 대해서 감을 잡아가면서 뭔가 성취가 있기 시작하면 다른 것도 겸하게 된다.그것이 직업적인 기술일 수도 있고 과학적인 또는 인문적인 학문일 수도 있고 운동이든 사회적인 활동이든 개인적인 취미이든 성향적인 뭔가를 하는 것도 있을 것인데 근데 그것이 자천이 되고 자천으로서의 대의에 맞게 해가야 한다.
즉 자천을 이해해서 그것으로 다른 것으로의 확장을 할 수 있어야 해서 우선 자천에 대한 견해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자천을 한다고 하지 못한다.사서삼경이 사주 보다 쉬웠다.사주에 대해서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아직 뭔가를 말하기에 부족함을 느낀다.
하지만 논어같은 것은 내가 논어에 대해서 뭔가를 말하는 것에 그다지 주저하지 않는다.그 명확한 해석이나 한문실력이나 연구가 다른 학자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뜻에 대한 이해는 그다지 밀릴 생각이 없다. 그건 평생을 거쳐 고민하고 행동해온 그것이 곧 학문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오래도록 해왔기 때문이다.논어를 읽는 것으로 논어를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숨쉼이 논어 이해에 더 다가가는 방식이 되어가고 있어서이다. 거긴 논어적인 논법이 이미 익숙하다는 것이 된다.도에 대한, 권에 대한, 정치에 대한, 군자에 대한, 세상에 대한 이해가 나에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건 내 경우이다. 다른 사람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논어만이 아니라 맹자든 주역이든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사주는 다르다. 물론 사주 하나만을 두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역학적인 논법이 나에겐 쉬운것이 아닌데 그것은 그렇게 지금껏 살아오지 않아서이다. 사주식의 논리로서 산게 아니라 지금부터 그렇게 살려고 하니 그것이 오랜 세월이 걸리면서 습득하게 한다.내가 살아온 것을 사주식으로 해석하고 풀어내며 그런 방법으로 행동하게 하려는 것인데 아직도 미흡함을 느낀다.자천하다 보면 합일 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합일이라는 것에 선망함이 있기도 하다.
합일이 하루 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감상적으로 체험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와 합해지면서 황홀할 그런 것도 아닌 것을 아는지는 모르겠다.
난 사주와 합일 하려고 지금 이러고 있는데 그 과정이 어려움이 많다. 한번에 되는 것이 합일이 아니고 수시로 합일하려는 집요한 경계함이 있어야 하고 체득되는 것이고 습관된다는 식으로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사물을 설명하고 또 행동하는 동기에 사주식의 이론으로 무리없이 해낸다면 합일이겠다.
내가 아는 지식을 사주로 풀어내기 위해선 내가 아는 지식에 대해서 잘알아야 하고 다시 사주도 알아야 하며 그래야 지식을 사주로 설명하고 풀어내게 된다.
아는 것에 대해선 그래도 해보는데 사주에 대한 논법을 익숙하지 않아 그게 오래걸리는 것이 된다.
오늘은 병자일인다. 이걸 일진이라고 한다.
왜 진이라고 하는지는 별이라는 것인지 용이라는 것인지 환경이라는 것인지 구축되어가는 변화라는 것인지 이런 것들이 다 포함한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써도 될 것도 같다.병은 나에겐 편관으로 칠살이라고도 하며 이것이 우리가 불행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질병도 되며 아픔도 되고 고통도 되며 불운도 되고 그런 우리가 싫어하는 그 전부를 이 칠살이라고 한다.이건 외부에서 또 내가 주동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당해야만하는 것이며 종속된다는 것이기도 하고 이런것을 하늘을 원망하며 울부짖는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내가 수동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그것이 가장 우리가 힘든 삶이 된다는 그런 의미가 있다.그것이 인생의 현실로 와서 해석하면 질병이고 액운이며 천재지변이고 불행이고 사건이고 사고이며 고통이다. 그래서 이러한 고를 없애면 행복할 거라고 그런 상태를 추구하기도 하지만 사주는 말한다. 그런 일은 없다.
오행에 의해 육친에 의해 그것은 당연히 있는 세계의 구조이다. 그것이 없으면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나에게 丙이 칠살이니 없어야 한다면 병은 원래 불이고 태양이라는 것인데 없어야 한다는 것이 된다.불이 없으면 세상이 존립하기는 하나?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고는 최소한 사주에서는 안한다.이거보다 못한 사고하는 종교나 가르침은 수두룩한데 세상의 이해가 편협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사주엔 현실성과 현장성이 있다.
현실성이란 이론적으로 아무리 그럴듯하고 아름다운 공식으로 보여도 현실에서 쓰임이 부족하면 가치가 없다. 누군간 유교적인 이념으로 편재가 아버지 되는 것을 거부했다. 아버지를 내가 극하는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이 불편한 것 같다. 이론적이거나 감정적으로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문제가 안되는데 그것이 현실에 얼마나 적용할 수 있는가가 사주는 결정되는 것이다. 이념이나 이론이나 감정으로 사주를 배우는 것은 거기서 끝인 것이다.
그리고 현장성이 있다. 현실을 넘어 현장 그곳에서 정말 적합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엔 벼슬이외는 해야하는 목적으로서 부족한 것들이었고 벼슬이외의 것에 종사하면 천한 것이었다. 그래서 격국을 따지면 벼슬할 수 있을지 그게 아니면 부라도 쌓을지 그 두가지를 보려고 했다. 하지만 막상 우리가 대하는 사주의 주인공들은 사업해보려고 시도하고 먹고 살려고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하고 힘들어서 언제쯤 빛보는지 알고 싶고 회사 붙을 수 있을지 돈벌 수 있을지 그런 목고사는 것이나 안정적인 밥벌이를 원하는 그런 정도이다. 이게 현장에서 보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런것에 이론을 들이대고 격국을 들이대고 이렇게 책에 있다고 하거나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고 이런식으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현장에서 만나는 그 당사자들이 바라는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외면하면 결국 자기 만족으로 끝나는 것이고 거짓말로 돋뜬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학문이 또 어떤 것이 이렇게 우리의 삶에 진정으로 다가가서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가 책이나 내고 이론을 정리해서 잘난척이고 돈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적용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망을 가지게 하고 실재적인 이득을 주려고 하는 것에서 결판이 나는 그 냉혹함을 견디는 학문인겠나.
그런데 무조건 편재가 아버지는 아니다. 고정성으로 보지 않는건 무엇이나 같다. 그리고 아버지를 편재로 보는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이유가 변하면 다른 육신으로 바꾸어야 한다. 인성이든 관이든 이거 역시 현실성이다. 불변적인 의미는 없으니 시대에 따라 사는 방식이 다르면 그에 따라 보는 방식도 바뀌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여자가 재가 되지 않는다. 여자에 의지해서 살게 되면 여자가 관이 되지 말란법 있나.
그건 그렇고 나에게 병이 칠살이지 남도 그런건 아니다. 남은 갑이 편관일 수 있고 경이 그럴 수 있다.뭐가 편관이든 분명 있다는 것은 예외가 없다. 다만 인생에서 그것이 얼마나 작용하는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것이 또 현실이다. 편관이 즉 삶의 고통이 있지만 누구나 같은 고통은 아니다.
이것이 억울하다고 하면 그것도 이상한 이해이다.
편관이 고통이지만 이건 당한다는 의미로만 쓸때이다.
내가 누군가에겐 편관이 된다. 편관이란 외부이고 타인이며 자기가 어떻게 못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내가 누군가에게 타인이니 남에겐 내가 편관이다. 그렇게 누군가를 억압하고 억누르며 강압하는 것이 타인에게 칠살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칠살도 관이라서 이것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한다.
옳은 것이니 그렇게 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이래라 이런 것이다. 이것이 맞다식으로 남에게 칠살짓을 한다.
이런 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나
내가 남에게 칠살일 뿐이라는 그 단순한 구조이해가 안되니 사주조차 모르는 것이다.사주를 배운 것이면 이런 이해는 당연해야 한다.
물론 칠살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또 칠살이 있어야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있고 그 극복이 세상을 나아지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서로간의 견제나 균형이나 조화는 분명 있다. 그러니 나쁘니 없어야 하고 좋으니 무조건 이건 건드리면 안되고 이것만 있어라 하는 그런 것은 없다. 편관을 이기는 식신이 복이고 좋은 것이고 하지만 인성이 치면서 제거하려고 하니 변화는 끝이 없고 길이든 흉이든 지나가는 것이 된다. 영원한 평화나 행복은 결단코 없고 있다면 거긴 현실이 아닌 곳이다.좋은 식신을 치는 인성이 나쁜거라고 하지 않는다. 인성이 없으면 엄마가 없는 것인데 이게 말이 되나 이런 사주는 하나의 작용에 다양한 의미부여를 한다. 좋기만 한 것도 없고 나쁘기만 한 것도 없으며 나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 그것이어서 나쁜게 아니다.
그리고 좋은 것을 치고 제거한다고 나쁘다 못한다. 그것도 역시 좋고 나쁜게 뒤섞인 것이다. 우리 인생에 나쁘게만 하는 것이 어디있나 보기 나름이고 때에 따른 것이고 주관적인 것이고 관계적인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이지 않던가 다만 그것을 현실에 자기 삶에 적용하지 못하는 어리숙함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 두리뭉실하고 어림이라서 모르겠다고 하거나 합리적이지 않다고 하지만 역시나 자유로운 경지를 못가서 하는 말이다. 이런 추상적이고 어림인 것이 더욱 우리 일상에 정밀하게 나오는 그것을 보는 경지를 못가서 그렇게 말한다.
오늘 난 편관운이다. 그 운이라서 외부에서 힘든 일이 온다. 그로인해 두통까지 가세하며 하루종일 힘들게 보내고 있다. 그런다고 이러한 편관이 없어야 한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이것이 또다른 운으로 작용하고 변화해서 오게 되는 그것이 보이기도 해서 편관이 편관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관은 인을 생하고 비겁을 생하며 식상을 생하고 재를 생한다. 관을 견디기 위해 식상을 쓰며 식상이 너무 과도하지 않게 인성을 쓰기 위해 이렇게 글을 쓰며 인성은 재로서 견제하니 인성의 글이 현설에 누군가에게 도움되는 것이어야 하며 사실에 적합해야 하며 재는 비겁이 제어하니 내가 할 일이 되어간다.
엄밀히 처음부터 사주로서 운의 방법론이나 세상의 구조적인 방법론을 이해한건 아니다.그전부터 알고 있던 것들인데 사주는 너무 개인의 인생화복론에 치우친 것이어서 접근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내가 사주를 몰랐을 때도 역학의 방법으로 운의 흐름을 알고 있었다.
다만 사주식으로 점더 번역을 하려고 하니 걸리는게 있어서 해결하고 익숙해지는 것이 지체되어서 그렇다.내 지적체계를 사주로 번역하는 과정이 오래걸린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