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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종합자천공부법

비법

작성자환공(桓公)|작성시간26.06.12|조회수18 목록 댓글 1

 

 

 

비법

 

 

 

지식이라는 게 있습니다.우리가 흔하게 알고 있는 사회적인 상식, 정보 같은 것을 말할 수도 있는데, 난 학문적인 성취나 지성이나 각성으로 얻게 된 지혜나 안목이나 견해마저도 대강 지식이라면서 혼란하게 사용합니다. 그래서 내가 지식이라고 말할 땐 문맥을 보면서 이해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오해할지도 모릅니다. 불교에선 지식과 깨우친 것을 엄밀히 구분하려고 하는데 난 별로 구분하지 않고 씁니다. 읽는 분들이 그렇게 용어를 잘 알지도 못하고 일상의 말을 써야 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지식의 수량과 어떤 성격을 가지는지,또 한계와 도달한 곳의 경계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떤 종류의 지식들을 잘, 그리고 많이 알고 있는지, 어떤 개념을 규정할 때 사람마다 접근법이나 범위와 원하는 것과 의도가 다를 것인데 이런 것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고 있고, 어디까지 알아내고 있는지와 그 알아낸 것의 현실 적용성과 자기함양의 상태까지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생각보다 우린 많은 지식을 알고 있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보이긴 힘들 것이니 그중에 내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종류의 지식들에 한정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런 자기 지식의 성격과 개념규정의 경계선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뭘 알아냈는지, 과거의 나와 비교해서 또 남과 비교해서 더 나아간 생각인지?알게 됩니다. 이건 뭘 모르고 있는지 더 알아야 할 게 뭔지 어떤 개념이 부족하고 허술하며 빈틈이 있고 엉성한지 알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아니면 사후적으로 알게 되기도 합니다.

 

즉 내가 어떤 견해가 떠오르며 생각이 정리되어 가면 아하! 내가 이런 것을 너무 안일하게 정의하고 있었구나! 또 이렇게까지 간략화 되어 가는구나! 이런 관점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또는 항상 떠올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관념에 대한 해석이 풀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여러 가지 의심나는 것과 알고 싶은 구절이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이해되고 정리되기를 바라면서 생각나고 떠올려질 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따져보고 검토 해보면서 맘에 들 때까지 반복해서 연구합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지식들을 이런 식으로 떠올려질 때마다 다시 재고하고 따져보며 비판적이고 냉정한 시각으로 검토하면서 기존의 알고 있다고 하는 것도 다시 버리고 다시 구성하며 알아가지만 안 것을 소유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더 나아간 지식의 확충이 단순히 머리만의 애씀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내 마음이 포용력이 있어야 하고 더욱 커져야하고 넓어져야 합니다. 마음이 커진 것이 왜 지식의 확대가 되냐고 할지 모르는데 분명 그렇게 됩니다. 마음이 허용한 만큼 지식이 됩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으며 지적인 함양이 안되고 다른 것으로 빠지기도 하는 건 마음이 그걸 원하지 않아서입니다. 마음이 가는 곳의 지식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지식의 나아감만이 아니라 지식의 다양함과 세분된 정밀성도 역시 마음이 그런 것을 감당할 수 있을 시간이 필요하며 세분된 정밀함도 내가 그런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과정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자천은 몸으로의 함양이고 실천이기 때문에 지식과 마음이 함께이지 않은 건 자천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사물을 정의하고 알고 있다고 할 때, 이 알게 된 지식을 넘어가기 위해선 먼저 내 마음이 그러한 정의로 만족하지 못할 정도의 다름이 생겨야 합니다. 마음은 대개는 크기나 수용성으로 말하니 마음이 그 지식보다 커져야 합니다. 그럼 이해하던 그 지식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되고 머리는 다시 다른 정의를 찾고 다른 방법으로 개념을 설정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만족할 만한 이해가 생기면 그걸 마음에 대입해 보고 그럴듯 하면 우선 그걸 가집니다. 이렇게 가진 것을 전부로 알면 더 이상의 성장은 일어나지 않고 고착화 되어가며 고집불통으로 되어가는 사람이 됩니다. 마음의 융통성이 없는 것이 됩니다.

 

이런 마음의 융통성은 또는 포용력은 일상의 생활과 자기의 뜻과 연관해서 현실에서 점검을 받게 되며 이때 흡족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새롭게 가진 지식으로 내 뜻과 행동을 설명하는 것에 온전하지 못하고 더욱 발전시키거나 의지를 성취하는 것에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부족하다는 것은 생활하면서 내가 가진 지식으로 이해해도 별로 부족함을 모르다가 점점 틈이 벌어지면서 뭔가?차이를 느끼게 됩니다. 즉 생활과 지식이 또는 마음과 지식이 서로 잘 맞고 대응된다고 또 아는 대로 일어나고 아는 대로 살아가고 아는 대로 이루어 간다고 생각하는 게 내가 나에게 하는 설명이지만 이건 항상 부족함으로 끝납니다.

 

뭔가 다 설명되지 못하는 또 다른 부족한 차이가 있다고 알게 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합당하거나 받아들이기가 허술해 보이도록 하는 이 마음의 아쉬움이 지식의 추구로 일어나게 합니다.

 

이렇게 지식의 간략화와 지적인 한계돌파와 더 흡족한 관념과 새로운 시각으로 보려는 많은 지식의 나아감은 이러한 마음의 불만족이나 아쉬움 같은 마음과의 대응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의 학문적 지식이나 각성으로 평생을 산다면 평생 그러한 지식과 마음이 대응됨으로써 흡족하고 아쉬움 없이 머리와 가슴이 일체된 것입니다. 이 말은 더 나은 각성을 원한다면 자신의 마음을 더 넓게 키워야 한다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견해나 이런 것이 내 삶을 설명해 주고 이해시켜 줄 거라고 기대하지만 이건 불가능합니다. 이걸 처음 감지하는 곳이 마음이며 마음은 남고 모자란 듯한 식으로 느낍니다. 이러한 마음이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그 머리는 마음을 충족시킬 지식을 찾아 헤매며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전엔 그 아쉬움과 뭔지 모를 불안함과 허무함과 인생의 불만족을 채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에서 뭔가 설명해 줄 딱 이거다! 라는 납득되는 뭔가를 찾는 원인이 됩니다. 이런 마음의 허전함을 해소할 거 같은 것을 찾았다고 느껴지면 거기에 빠져 한참을 그것으로 살아가지만 역시나 거기에서도 나를 만족시켜 줄 만한 것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또는 처음엔 만족 되었지만 서서히 뭔지 모를 아쉬움이 싹틉니다.

 

사람마다 이것을 인식하는 기간이 많이 다릅니다. 대개는 한평생 모르기도 합니다. 이것이 빠르고 민감할수록 더 많은 변화와 성장을 하게 되겠죠. 이게 깨달음에 안주하지도 만족하지도 않는 머무르지 않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의 성장으로 포용력이 커져서 처음에 만족스러웠던 지식이나 무언가도 궁극은 아니라는, 즉 내가 커짐으로 해서 더 이상 나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 벗어나야 하고 다른 것으로 찾아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걸 인정하기 싫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차이나고 달라지며 빠져나오는 그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도 있어서 이런 틀의 파괴와 새로움을 찾아 떠나는 것의 아픔은 바로 존재의 두려움과 불안함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건 이런 이탈의 공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벗어나고 멀어져서 다른 것으로 다시 살아야 하는 것의 두려움은 엄청 큰 고통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벗어남 정도도 감당하지 못하는 마음 이룸이 이생을 사는 사람들의 한계입니다. 이런 마음의 성장이 더디어서 오랜 세월을 거기서 안주하는 경우도 있고 이런 안주를 유지하지 못할 때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또는 그 가르침이 너무도 광대해서 마음의 성장이 따라잡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르침의 광대함으로 빠져나오기 힘든 것은 내가 보기에 불교가 유일합니다. 그 외의 것은 저열하고 서구의 과학이나 철학은 번잡하면서도 단순하며 한계가 극명해서 사회적인 그리고 현실적인 이익에 의해 만족하기 쉬운 학문이며 그런 현실적인 이득이 마음의 성장을 억압하며 다른 것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나태함도 만듭니다. 하지만 대개의 불교공부가 공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의 성장이 그러한 것을 넘어가지 못할 정도로 공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게 일반적인 현상입니다.물질과 현실의 이러한 간단한 것마저도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나약하고 좁은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 됩니다. 이런 마음으론 철학이나 사상이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상식적인 관념을 뛰어 넘지 못하는 마음이 되기 쉽습니다.

 

마음의 커져감이나 확대는 불교적으로 말하면 무주인데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깨우침도, 경지도, 득도도 머무르지 않아야 그 다음으로 넘어 갈 수 있습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아직 마음이 성장하지 못해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주가 무조건 무주해야 하는 걸로 안다고 무주가 되지는 않습니다. 내 마음이 내가 깨달은 깨달음을 넘어 성장이 되어야 또 다른 깨우침으로 발심을 낼 것인데 이건 솔직히 버겁습니다.

 

별로 불교인들에게서 못 보았습니다. 깨우침도 힘든데 그 깨우침을 포용해서 더 나아간다는 건 글쎄요. 이래서 한 번의 생애에 한 번도 힘들고 두 번은 말도 없습니다. 이 말은 마음의 확대라는 것이 그렇게 쉽거나 원한다고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한 것이 또 가르침이 되지만 어찌 이게 먹히겠어요? 지식의 알려줌도 버겁습니다. 마음은 대개의 가르침에선 함구입니다. 요즘 가르친다고 하는 곳들이 생기는데 그건 마음이 아니라 뇌의 의식이나 무의식이며 감정 따위입니다.

 

마음이 차이를 만들고 이탈되지 못한다면 굳이 벗어나라고 할 것은 없다고 봅니다. 한 생애에서 하나의 관념에서 나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더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이런 현실적인 현상을 인정해야 하고 억지로 나무라고 부정하면서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간접적이고 장래의 기약을 하는 방법도 있는 것이니 지금 너무 서두를 것은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뭔가를 알기 위해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 마음을 연다는 것은 이러한 자기 마음의 성장을 인위적으로 한다는 것인데 이걸 할 수 있으면 자천은 아주 쉬운 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근기가 대단히 좋은 경우이겠죠.

 

그래서 대개는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치는 게 많습니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건 생활체계에 접목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기억하고 외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지식으로 살아가라는 것이고 자기의 생활에서 확인하고 성찰하면서 마음과 지식의 부합함을 보는 것입니다. 이건 지식의 자기 내면화이기도 하고 계정혜 삼학 중에 정이라는 마음의 형이상학이 되어가는 것도 됩니다. 곧 자천입니다. 자천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하나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됩니다. 난 근기 좋은 사람을 별로 본적 없다하고 이렇게 쉽게 설명하려고 애쓴다고 하지만 내 설명은 다 근기가 좋은 사람들이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쉬운 걸 쉽게 설명하는 게 아니라 어려운 걸 쉽게 하려고 하는 거죠.

 

또 머리가 새로운 개념과 지식과 이해를 가지고 마음에 대입하며 생활하면서 설득해 보려 하지만 역시나 뭔지 모를 아쉬움이 있게 됩니다. 그러면 또다시 다른 지식을 찾고 그 찾은 지식으로 마음을 삼게 되지만 역시 아쉬움을 얻을 때까지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다 아쉬움이 드러나면 또다시 지식의 추구를 하게 됩니다. 이런 더 나아가려는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이런 과정을 수년에서 수만 년을 또는 더 오랜 세월을 반복해 온 것입니다. 또 이런 마음과 머리의 왕복을 자주한 횟수만큼 성장한 인격이 됩니다. 대개는 한 생애에 한 번이거나 그보다 못 하거나이며 두 번이면 천재가 됩니다. 이런 왕복을 보면서 자천 진행의 점검을 하는 것입니다. 계제는 이러한 왕복으로 얻은 성취의 결과입니다. 아까 말한 대로 사회적인 통념, 이데올로기, 가치관, 세계관 같은 다양한 지식들을 일생에서 몇 번이나 바꾸고 재구성을 하는가요? 한 번이라도 하면 각성했다고 깨달은 줄 아는 게 작금의 수행세계의 현실입니다.

 

아시나요? 이 자천계제의 깊은 의미를........ 단순한 자천의 오름이나 성취를 말함이지만 그 성취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걸 성찰했어야 합니다.

이 글은 외부의 사물이나 사건들에 대한 지식의 정확함이나 방대하고 체계적인 이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 즉 자기주체와 생활과의 관련에서 지식의 남음과 부족함을 견주는 것입니다. 마음을 자신의 주체로서 그리고 생활하는 것으로서 안과 밖의 의미로 썼습니다.

 

다만 생활의 중요함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만으론 성장과 나아감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본성 자체의 한계는 외부와의 교류에서 일어납니다. 그 원천과의 교류는 우선 제외하고 내적인 것을 위주로 말했을 뿐입니다. 생활에 이러한 것도 포함하는 의미가 있습니다.마음으로 마음을 성장하는 것을 말하며 다음엔 지식으로 마음을 성장하는 것을 다룰 것입니다.

 

왜 비법인지 제목이 궁금한가요?

이걸 잘 이해하면 구차한 다른 자천법을 넘어 자기만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라만상이 자천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긴 시간을 생존하는 것입니다. 오래 살면 영명해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한 생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왜?

 

시간을 지속한다는 건 생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활한다는 것은 마음을 성장시킨다는 의미가 되는데, 생활하면서 자기를 발견하고 발견된 자기보다 더 나은 자기를 원하게 되며 이것은 나와 나를 비교하며 또 대상이 되고 목적이 되는 외부와 남과 세상이 있다는 것을 느끼며 그 외부와도 비교해서 나의 왜소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들보다 낫기를 바랍니다. 지식은 바로 이 세상에 대한 내 해석이고 이러한 세상 해석은 내가 세상보다 우위에 있다는 그 증거를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기의 존재 증명이며 나를 이끌기 위한 계획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알면 내가 세상을 지배하는 듯한 착각을 합니다. 우린 사물의 이름을 알거나 용도를 알면 더 이상 그 사물에 대해서 흥미가 떨어집니다. 미지의 무언가가 더 이상 없을 때 사람이든 사물이든 더 이상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이며 이건 마음이 이미 다른 사람과 사물로 옮겨가는 이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항상 나에게 좌절을 줍니다.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것이 늘어 가는데 이러한 굴욕이 내게 의욕을 주며 세상을 차지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내 삶과 운명으로 대체됩니다. 세상에 대한 좌절이 나 자신에 대한 좌절로 전환되어지면서 우린 단순한 세상정복이라는 것에서 나 자신에 대한 정복으로 바뀌면, 가장 커다란 성장인 인식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것을 빠르고 쉽게 하려면 더 많은 생활 경험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우린 식물 같은 부동성에서 움직이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진보를 하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생활을 극단적이고 활발하며 극대화한 움직임을 하는 것입니다. 장소 이동은 생활경험을 확대한 필연입니다. 이런 확대는 짧은 시간으로도 긴 시간을 산 거 같은 효과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살아봄으로써 지식이 생기고 그 지식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내가 존재하는지, 그 존재방식이 마음에 드는지, 내가 내게 맘에 드는지,이런 건 살아봐야 아는 것입니다. 이 살아봐야 한다는 게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살아봐야 이게 맞는지,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는 있는 건지, 이게 뭔지, 저게 뭔지, 이런 판단이 서게 됩니다. 뭐든지 생활해 보면서 결정 나야 하고 모든 기준과 점검과 판단의 가치는 바로 여기 우리의 삶에서입니다.

 

마음이 불만족해지며 더 나은 것을 욕구하는 것이 자기변형과 성장의 원동력이 되어갑니다. 이런 마음의 욕구와 충족과 생활하면서 다시 충족의 부족함을 알게 되고 또 다른 것으로의 이탈과 새로운 것에 대한 멈추지 않는 움직임이 성장입니다. 생활경험의 확장이 마음의 확장이 되며 이런 확장에 맞는 지식을 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지식이 마음과 생활체계 확장의 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어디를 어떻게 확장할지 마음에게 알려주는 등대가 됩니다. 이건 마음이 뭔가 부족하다고 느낄 근거가 된 것입니다. 뭔가 있어야 이게 좋은지 나쁜지 큰지 작은지를 가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불만족은 지식 때문입니다. 모르면 부족하다는 것이나 충족된다는 것이나 아쉬움이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마음과 지식은 서로에게 의지하는 곳이면서 서로를 부추기는 힘입니다.

이런 것을 자기 내면에서 홀로 할 수 있으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자기 안에 세계를 구축하면서 무한한 자유와 긍지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게 불필요한 형식을 배제하고 자천하는 비법이며 내적원리입니다. 이 원리 때문에 자천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자천법이라는 것이 이러한 것을 강화하고 더 빠르고 쉽게 하기 위한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좌선이나 뭔가 집중해서 한다는 것은 마음과 지식의 차이를 알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차이를 발견하거나 만족할 이치를 찾거나 새로운 재구성을 할 수 있는 기미를 발견하면 각성했다고 느낍니다. 그러다가 각성한 것을 생활하면서 또 좌선하면서 결국 부족한 것이 있음을 느낍니다. 또 느껴가야 합니다. 아니면 자기의 관념에 자기가 빠져 죽어가는 것입니다. 머무르면 썩는 것이고 머무르지 않는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퇴보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려면 또 다른 차이와 새로움을 이루어 내야만 합니다.

 

이런 것일 뿐인데 좌선이나 호흡이나 호수나 기타 다양한 자천법이라는 게 무슨 소용인가. 이러한 원리를 안다면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하는 것이 아닌가요? 마음을 성장시키고 그로 인해 견해의 부족함을 느끼며 견해의 확충을 노력 하고 견해가 생기면 다시 그것이 마음에 충족되는지 살아가 보면서 알아가는 것이 아닌가요.

이렇게 알고 하면 지식이 마음을 성장시키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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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빛몸 | 작성시간 26.06.12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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