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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종합자천공부법

비법-2

작성자환공(桓公)|작성시간26.06.13|조회수9 목록 댓글 1

 

 

 

비법-2

 

 

 

비법이라고 거창한 것을 쓰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그저 다들 알고 있는 자천(수도)하는 원리를 알자는 것입니다. 앞에선 마음이 생활의 모든 걸 평가하고 그 마음의 확충이 근원적인 것이라고 한 것이고 여기선 그 방법이 마음과 지식을 따로 나누어 서로의 차이를 세우고 말한 것입니다. 즉, 두 가지로 나눈다는 것인데 마음공부와 지식공부입니다.

 

지식공부는 지혜나 견해나 안목, 성이나 교학이나 이론이나 인식의 확장이나 격물치지나 지성적인 것이나 이러한 머리로 하는 것이고 관법입니다. 서구인들이 철학이나 합리적인 이성주의나 과학주의나 모두가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성장하자는 것일 겁니다. 객관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시작해서 자신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과거부터 여러 서적을 공부하고 독서를 하고 묻고 답하며 공부하는 것이나 글 쓰고 대화하는 것부터 지금의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나 서점에 널려 있는 것이나 누구나 쉽게 할 수 있고 또 하고 있는 그러한 것이 지식을 이용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공부라는 것은 좀 어려워 보이는 것인데 접근하기도 어려워하고 이해하기도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의미는 간단합니다. 그건 자신 안에 선천적으로 도덕과 하늘과 신과 여래와 선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선정이나 삼매나, 지, 정, 유교에선 함양공부나 거경공부나 미발공부나 존천리나 중이나 도교적인 양생이나 신인합일이나 단전공부나 결태나 계제 이룸이나 명공부라고 하며 또 간단히 위에서 열거한 도덕이나 여래 등과 같은 것을 기르고 드러나기 위한 것입니다. 다만 선정 같은 것을 번뇌가 사라지고 신비한 체험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건 지나가는 또는 방편적인 기술을 말하는 것으로 목적은 불성을 증득하기 위한 것이니 선정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과정상의 현상과 근본 목적이 헷갈리면 안 됩니다. 즉, 마음의 경지 이룸으로 사물에 나아가 현명한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의 여래장이라는 것이 이 마음공부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여래라는 것이고 마음이 여래처럼 되어야 한다는 식이며 이기론이나 선이나 사람이 착하고 순수하며 완벽한 무언가를 마음에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선천적인 도덕을 기르고 밝히는 것을 자천의 목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선정이나 삼매라고 하면 감당하기 어려워 하지만 자기마음이 여래처럼 또는 부처처럼 되어 있으니 그것을 알면 된다고 하는 식으로 접근하면 또 좋다고 합니다. 본성이 선하다는 것이나 신성이 있다는 것이나 같은 원리입니다. 이런 것의 목적인 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사람 되기나 부처나 신이나 하늘이 되는 것이나 다 같습니다.

 

이것을 사회적으로 풀면 도덕적인 인격을 가지는 사람으로 어떠한 감정과 외부의 유혹과 자극에서도 자기의 마음을 지키고 선을 이루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종교적으론 온전한 신이나 부처나 이상적이거나 초월적인 존재로 거듭난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간단히 지식적인 탐구와 심성적인 바름을 익히고 배우는 것이 자천이 됩니다.

 

구체적으로 호흡으로, 호수로 등등 기타 여러 방법으로 지식을 얻을 것인지 마음을 밝힐 것인지 그건 하는 사람 마음이지만 이런 것이 원리로 있음은 알고 하면 됩니다. 호흡이나 호수나 좌선이나 행공이나 어떤 것을 하든지 같습니다. 이런 걸 알면 호흡이나 좌선이나 호수나 무술을 이용하거나 일상에서나 자신만의 자천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내 삶에서 생활에서 적용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고 해간다면 별 어려움이 없고 이론과 현실의 괴리에서 좀 더 일치된 사람이 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에서의 불합리와 부정과 억울함과 피해당하고 좌절당하며 손해 보듯이 살아가는 것에서 내적인 자기 마음을 견지해 가면서 최소한의 도덕적인 또는 신성적인 마음을 보면서 허물어지지 않고 자기를 지켜내는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곧바로 자천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일종의 인내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참으라고 자기의 인격을 가지라고 할 순 없고 무엇이 불합리한지 무엇이 나에게 억울함을 주는지 적극적 해결법은 없는지 긍정적으로 해쳐 나가는 방법은 무엇인지 따지고 해결하면서 나와 타인과 사회에 더 이익이 되며 함께 사는 나은 세상을 바라는 것이 역시나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지식을 추구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비법이라는 글에선 이 둘의 내적으로 작용하는 상호 유기적인 교류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머리가 나빠서 더 헷갈리게 한 거 같습니다. 지식이 없어 자신의 마음 상태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그 고요하고 안정적인 마음도 불안해지고 퇴보도 되는 것이고 이런 경우가 실제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식을 가져야 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반대로 마음의 성취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이론의 공허함을 면하기 어렵고 한계 부딪힘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사회적인 공부가 이런 이론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시대라서 그럴듯한 발상과 현란한 지식이 난무하면서 그것이 진정한 인격의 함양과 성장을 이끌진 못하는데 게다가 마음공부의 중요성과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별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지식은 사람을 평등하게 봅니다. 물론 우린 평등합니다. 하지만 어느 면에서 평등한지 그 한계를 명확히 하면서 말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 마음의 성취에 대해선 평등하지 않습니다. 도덕의 수준과 신성과 불성의 증득의 경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걸 할 수 있는 기본 잠재력은 평등할지 모르지만 가능성으로서 지금 이룰 수 있는 부분은 차별이 되며 이룬 것 역시 차별됩니다.

 

그래서 평등하기 때문에 우린 언젠간 누구나 비슷한 마음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지만 명확히 알 건 알아야 이정표로서 마음공부의 집중할 단계적이고 방법적인 효율성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공부란 자기변형과 같은 거라서 마음이 변하고 그로 인해 자신이 변해가는 것을 거치는 것인데 지식 연구가 지식으로 끝나고 마음으로 적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다보니 마음과 지식의 간극이 벌어지기만 하고 좁혀지진 않고 있습니다.

지금이 무조건 그르다고 할 순 없습니다. 과거는 지식보다는 심성적인 면을 더 치중했는데 그것도 개인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그저 착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욕망 부정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욕구의 억압이 사회문제가 되며 자기의 내면의 솔직한 욕구를 외면하고 부정만 하면서 도피하는 비뚤어진 사람들을 기르게 됩니다. 자기 욕구부정이 타인의 부정과 제어로 가면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인정받기보다 권력이나 국가의 필요에 의한 사육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지금도 자기는 가진 게 있고 힘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식의 행동을 하면서 자기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성찰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생각하기보다 이용하는 것에 더 영민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좀 더 지식 추구하는 합리적인 논리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감정적인 면보다 체계적이고 규율적이며 시스템적인 것이 개인의 욕구를 제어하면서 견제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그런 제어나 견제를 빠져나가는 역시나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부정은 없어지지 않고 있지만 항상 빠져나가는 이탈자들은 있고 또 그런 욕구가 없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힘없는 사람들의 피해를 등에 업고 그런 사욕을 취한다면 그들의 욕구는 이해해 주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을 것입니다. 욕구의 부정이 아니라 욕구의 합당함은 사회적인 의견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자천에선 선악이나 욕구의 합당함과 시비나 의와 불의를 나눔이 다릅니다. 사회적인 것과 자천적인 것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난 자천적인 측면에서 그동안 많은 말을 하고 그것을 위한 지식을 말한 게 많은데, 사회적인 것을 말하기엔 소양이 부족함을 느끼고 또 지금의 내 위치에서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천도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라서 조심스러웠습니다.우린 같이 사니 함께 해결점을 찾고 논의해 가야 한다고 보는데, 혼자선 어떤 욕구도 없을지 모르고 그 욕구의 해소도 없을지 모르니 우리의 욕구가 발생하는 것도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함께 사는 공동체로서의 의미와 홀로 사는 것의 힘겨움과 무의미와 두려움과 불편을 알고 공동체내에서 합리적이고 서로의 뜻을 이루는 방법을 고민하며 살아가야 할 거 같습니다.

 

내적인 심성의 기름이나 외적인 지식의 추구는 우리 삶입니다. 난 이걸 주(도)라고 한 것입니다. 사회생활과 나의 삶의 과정에서 보고 들으며 경험하면서 쌓아가는 지식이 있고 그러한 지식에서 나름의 통찰을 가지기도 합니다. 또 난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니 내면으로 침잠하면서 자신의 욕망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게 되고 그 욕망과 외부와의 관계에서 무엇을 욕망해야 하고 욕망하지 말아야 하며 욕망하는 것을 어떻게 충족할지 충족하지 말지를 판단도 하면서 긍정적인 자신의 성장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인데, 다만 좀 더 효과를 확실하게 하고 더 빨리 이루고 쉽게 이루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자천이나 수도나 공부입니다. 공부는 누구나 하는 것이고 삼라만상이 하는 것이며 이건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그것이 이걸 하고 있는 것이니 필연적인 숙명입니다. 이것부터 인정해야 다음을 논의 할 것인데 이것을 인정하는 시대는 아직 아닌가 봅니다.

 

사회 즉,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나 홀로 있어선 아무것도 일어나지도 않고 아무것도 달라질 것도 없으며 아무 의욕도 없습니다. 누가 있고 그가 나로 인해 또는 나도 그로 인해 생각하고 감정을 일으키게 되어 시간은 흐르며 나 또한 자극을 받아 내면의 욕망이 일어나고 나 역시 시간 속에서 사고하며 감정을 일으키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시간이 외부의 사물변화를 느끼며 아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흐름과 감정의 변화로 인해 인지하는 것입니다. 생각이나 감정이 변하지 않는다면 객관적인 시간은 무의미합니다. 오직 내가 생각하고 감정이 있으므로 인해 시간이 흐르고 그 시간이 흘러야 난 살아 있는 것이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주 허공 속에선 아무것도 없고 그 안에선 생각할 것도 감정 일어날 것도 없습니다. 그저 진 속에서 허무할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 같은 고등생물이 있는 행성에 오는 것이며 그 안에서 생각을 먹고 감정을 느끼면서 함께 성장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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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빛몸 | 작성시간 26.06.13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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